미국, 사실은 핵무기 확산의 '주범'

다른 나라의 핵무장을 자극한 미국의 역사

등록 2020.11.25 14:03수정 2020.11.2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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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핵 무기 확산을 막는 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 하지만 핵 무기를 처음 개발하고 핵 무기가 없는 국가에게 핵 무기를 사용하여 다른 나라들이 핵 무장을 하도록 자극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이 핵 확산의 주범인 것이다.

'핵무기 철폐를 위한 캔버라 위원회'가 1996년 발표한 '핵확산의 공리(Axiom of Proliferation)'에 따르면 어느 한 국가가 핵무기를 갖고 있는 한, 다른 모든 국가들 역시 핵무기 보유를 추구한다. 핵무기 확산 과정은 이러한 명제와 부합한다.

실제로 트루만 대통령은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스탈린에게 "엄청난 폭탄을 실험하였다"고 언급하면서 사실상 소련에 대해 핵 무기를 사용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당시 스탈린은 미국의 핵 개발과 핵실험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핵무기를 개발하였다.

또한 트루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때 중국에 대해 핵 무기 공격을 검토하였다. 중국은 미국이 핵공격을 하였을 때 보복용으로 핵무기를 개발하고자 하였다. 중소분쟁 당시 소련이 중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검토하자, 중국은 핵 무기 증강에 나섰다.

미국은 1946년 유엔에 원자무기와 원자력 기술의 유엔공동관리안, 즉 '바루크안 계획(Baruch Plan)'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아직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한 소련은 자신의 핵무기 개발이 저지되고 결과적으로 미국의 핵무기 독점이 제도화될 것을 우려하여 이러한 계획에 반대하였다.

미국의 핵공격에 직면한 소련이 1949년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의 핵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이 정보를 제공하였다.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뉴멕시코의 핵개발 연구소에서 일하는 독일 공산당 출신의 영국인 과학자 클라우스 푹스는 소련에 플루토늄 폭탄의 핵심 기술인 내폭장치 기술과 수소폭탄의 이론적 개념을 소련에 넘겨준 혐의로 체포되었다.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막고자 핵 기술 소련에 넘겨


그는 9년 동안 수감된 후 동독으로 추방되어 중국 등 공산권의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였다. 이밖에도 미국과 영국의 핵무기 공동 개발 프로젝트에 참가한 영국인 도널드 매클레인, 미국의 로스 알라모스 원폭연구소에서 기계 기술자로 일하던 그린글라스 등이 소련에 핵무기 정보를 넘겼다.

이들이 정보를 제공한 이유 중 하나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핵폭탄을 미국이 독점하면 세계평화를 위협하기 때문에 핵 균형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중국은 코리아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핵공격 위협을 받은 경험이 있고 소련과 주도권 다툼으로 핵무기가 필요하여 1964년에 핵무기를 개발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동맹으로서 소련의 핵공격에 노출되었다. 양국은 소련이 자국을 핵 공격할 때 미국이 소련과의 핵전쟁을 감수하고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뉴욕이나 워싱턴이 핵공격을 받는 것을 감수하면서 파리나 런던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비핵국가에게 핵무기 사용 후 보복용 핵무기 확산

또한 양국은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는 한 미국의 패권에 굴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핵무기를 필요로 하였다. 영국은 1952년에 핵무기를 개발하였다. 핵무기 개발에 있어 경쟁국인 영국에 뒤질 수 없었던 프랑스는 1960년 핵무기를 개발하였다.

프랑스는 1962년 알제리 정부와의 밀약에 따라 1978년까지 사하라 사막 내 4곳의 비밀기지에서 핵실험과 화학무기를 실험하였다. 특히 프랑스는 1960년에서 1966년까지 17 차례 핵실험을 하였다. 그 중에는 대기권에서의 핵실험이 포함되었다.

핵무기 보유 국가들은 1968년 핵확산방지조약(NPT)을 주도하고 다른 나라의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핵 확산을 막지 못하였다. 인도는 1962년 중국과의 국경 분쟁 중에 서방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자체 개발한 소련과 중국을 제외하면 친미국가만 핵무기 허용

중국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인도 역시 본격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나서 1974년 핵 실험에 성공하였다. 미국은 중국과 분쟁 중인 인도의 핵무기 개발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미국은 2006년 인도와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통해 인도의 핵무기를 사실상 인정하였고 나아가 장거리미사일 개발 역시 묵인하여 중국을 압박하였다.

1949년, 1965년, 1971년 인도와 전쟁을 겪은 파키스탄은 인도가 핵무장을 하자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파키스탄은 이슬람국가였기 때문에 이슬람으로의 핵확산을 우려한 미국은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파키스탄의 부토 대통령을 강하게 압박하였다. 키신저 국무장관 등 미국의 공개적인 경고를 무시한 부토 대통령은 1977년 군부 쿠데타에 의해 실각되고 교수형을 당하였다.

그런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맞서 미국은 파키스탄에 아프가니스탄 반군을 지원하는 기지가 필요하였다. 파키스탄은 미국의 동맹이 되는 대가로 미국의 묵인을 받아 핵무기 개발에 나섰다. 파키스탄의 고농축우라늄 추출 사실로 인해 미국 의회에서 파키스탄 지원이 논란 되었다. 하지만 파키스탄이 필요한 레이건 대통령은 계속해서 핵개발을 묵인하고 재정지원을 하였다. 파키스탄은 1998년 지하 핵실험을 통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였다.

영국와 프랑스 및 미국, 수에즈 운하 탈취 위해 이스라엘에 핵무기 허용

1956년 프랑스와 이스라엘의 수상과 국방장관은 비밀 회담을 통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먼저 침공하여 영국과 프랑스가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자"고 합의하였다. 프랑스는 그 대가로 이스라엘에게 원자로 재처리 시설을 지어주고 고농축우라늄을 주기로 하였다.

1957년 미국의 U-2 정찰기는 프랑스 과학자들이 이스라엘의 네게브 사막에 프랑스형 원자로를 건설하는 것을 탐지하였으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 1960년대부터 진행된 프랑스의 지하 핵실험의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핵실험 없이 1966년 핵폭탄을 만들 수 있었다.

1991년 이스라엘의 언론은 비밀 해제된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의 메모를 인용하여 "1969년 닉슨 대통령은 메이어 이스라엘 수상과 만나 이스라엘이 핵보유에 대해 대외에 공표하지 않으면 미국이 이스라엘의 핵 개발을 묵인하고 보호하겠다고 발언하였다"고 보도하였다. 그 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은 현재 최소 2백여 기 이상 3백여 기 미만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흑인정권이 핵무기 보유 못하도록 남아공 백인들이 자발적 핵 폐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정권은 강력한 인종분리 정책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주변국과 적대관계였다. 남아공은 반공정책에도 불구하고 서방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있었다. 국내에선 흑인들의 무장저항이 빈번하였고, 주변 국가들은 소련, 쿠바, 조선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이에 백인정권은 앙골라나 나미비아 등 인접국의 공격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핵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스라엘은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수소폭탄과 중성자탄의 개발을 본격화하였다. 특히 자국의 영토나 주변에서 적군에게만 피해를 줄 수 있는 중성자탄에 집착하였다.

이번에는 독자적 개발이라서 핵실험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비밀 핵실험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비밀협상을 하였다. 양국은 1974년 수교하였는데, 이스라엘은 핵기술과 장비를 넘기고 남아공으로부터 우라늄과 핵실험 장소를 제공받았다.

주변국에 포위된 이스라엘과 남아공이 핵무기 개발 위해 협력

1976년 소련이 미국에게 남아공의 핵무기개발 시설을 공동으로 공습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미국은 거절하였다. 이스라엘과 남아공은 1979년 남아공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 근처에서 중성자탄 실험에 성공하였다.

미국의 정보 위성은 이 폭발실험을 탐지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양국은 핵폭탄을 운반할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도 함께 개발하였다. 1989년 남아공의 백인정부는 흑인에게 정권을 넘겨주기 전에 서방의 조언에 따라 핵무기를 폐기하였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뒤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등을 저술하였습니다.
#바이든의 대북정책 #핵무기 확산 #이스라엘 핵무기 #남아공 핵무기 #파키스탄 핵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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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12년간 기관지위원회와 정책연구소에서 일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관계』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 『연방제 통일과 새로운 공화국』, 『미국은 살아남을까』, 『코리아를 흔든 100년의 국제정세』, 『 마르크스의 실천과 이론』 등의 저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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