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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어른들은 치매 걸린 할머니를 돌보라고 했다

[조기현의 영 케어러 ④] 그렇게 11년 간병한 박푸른씨 이야기... "너의 잘못이 아니야"

등록 2020.12.01 07:08수정 2020.12.0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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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돌봄'을 말할 때 떠오르는 얼굴들은 '중장년'입니다. 하지만, 분명 한국 사회에도 아픈 부모나 가족을 돌보며 살아가는 청년들이 있습니다. 영국과 일본 등에서는 이들을 지칭하는 '영 케어러'(Young Carer)라는 개념이 있을 정도지만, 한국에서는 그저 '효녀', '효자'로 불릴 뿐 사회적 주체로 가시화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난 10여 년간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직접 돌본 조기현 <아빠의 아빠가 됐다> 작가가 자신과 같은 한국의 영 케어러들을 찾아나섭니다. 돌봄이 형벌이 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더 많은 청년들의 경험담을 기다립니다. 
(제보 - youngcarer90@gmail.com, jeor23@ohmynews.com)[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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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씨가 하얀 동굴 속에서 비몽사몽한 할머니의 입에 죽을 넣어주고, 하루 네다섯 번씩 기저귀를 갈았다. ⓒ pixabay


하얀 동굴 속에 할머니와 단 둘이 있는 기분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 할머니는 병원 1인실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의료진과 보호자 한 명 말고는 누구도 드나들 수 없었다. 1인실은 사방이 흰색으로 뒤덮인 동굴 같았다. 지난 5월, 할머니는 요양원에 입소한 지 이틀 만에 발작을 일으켰다. 할머니는 급히 대학병원으로 옮겨졌고, 늘 그랬듯 유일하게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은 손녀 박푸른(가명)씨였다.


그는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킨 '돌발 상황'이 돌발적이지 않다고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평소 요양원을 '죽으러 가는 곳'이라고 표현하며 멀리하고 싶어 했다. 12살 때부터 11년 간 할머니를 돌보았던 손녀 푸른씨가 할머니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할머니의 자식들, 그러니까 큰아빠들은 "또 왜 저러느냐"고 타박과 한탄뿐일 때, 푸른씨는 조용히 할머니를 돌봤다.

푸른씨가 하얀 동굴 속에서 비몽사몽한 할머니의 입에 죽을 넣어주고, 하루 네다섯 번씩 기저귀를 갈아주는 동안 병원비는 쌓여갔다. 이틀 만에 80만 원이라는 병원비가 하얀 동굴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유일한 활로처럼 느껴지던 큰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병원비는 네가 어떻게든 내라."

그렇게 전화가 끊기고, 뒤이어 큰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왜 작은 큰아빠나 고모한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았냐는 게 이유였다. 큰아빠 가족은 할머니 자식들 중에 가장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 또한 할머니에게 무관심한 건 마찬가지였다.

"누워 있는 할머니 모습이랑 큰아빠, 큰엄마의 행동이 겹치면서 할머니가 너무 불쌍하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는 자식이 없다는 게."


지난 11월 13일 부천의 한 카페에서 98년생 박푸른씨를 만났다. 부모의 이혼 후 아빠, 할머니, 동생과 함께 살던 푸른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치매 걸린 할머니를 돌봤다.

그가 할머니를 돌보면서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느낀 건 바로 '가족', 더 정확히는 친인척들이었다. 아빠를 포함한 자식들은 할머니에게 무관심하거나 웬만해서는 돈을 쓰지 않으려고 했다.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든 손녀인 푸른씨에게 돌봄의 책임을 떠넘기려 했다.

어른 없는 세상에선 아이가 빨리 어른이 되는 수밖에 없다. 어른 없는 세상에서 아이는 어떻게 할머니를, 그리고 자신을 돌봤을까. 푸른씨가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게 무슨 치매야?"

2004년, 아빠와 엄마는 갈라섰다. 작은 거실에 방 한 칸 있는 할머니 집에 할머니, 아빠, 동생, 푸른씨 넷이서 먹고 자고 생활했다. 아빠는 건설 현장 일용직 노동자로 전국을 다녔다. 그가 집에 오는 날은 2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는,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임금을 받으면 하루 만에 다 쓰는 날도 여럿이었다. 할머니가 아빠의 임금을 관리하려고 해도 돈을 달라며 다시 생떼를 부렸다. 푸른씨에게 아빠는 "아빠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사람"이었고, 경제 상황은 대체로 불안정했다. 

할머니는 늘 외로워했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는 할머니를 귀찮아했다. 자식이 여럿이었지만, 할머니의 안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외로움을 장녀인 푸른씨에 대한 애착으로 표현했다. 푸른씨가 집 밖을 나설 때면 상냥한 목소리로 "빨리 들어와, 언제 올 거야?"라고 물으며, 늘 곁에 있기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누구세요?"

할머니는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푸른씨와 동생의 정체가 궁금한 듯했다. 학원을 마친 뒤, 막 집에 들어선 순간이었다.

"애들은 언제 오지?"

눈에 앞에 푸른씨와 동생이 있는데도 할머니는 푸른씨와 동생을 기다렸다. 이제 12살인 푸른씨와 10살 동생이 '치매'라는 병명을 알 리 없었다. 그저 할머니가 아닌 것처럼 행동해서 혼란스럽기만 했다. 푸른씨와 동생은 할머니가 다시 원래처럼 행동하기를 기다리며 눈물만 펑펑 흘렸다. 다음날이 되니 할머니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씨와 동생의 아침 식사를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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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이게 무슨 치매야?"

문제를 알리고, 할머니의 행동을 제일 먼저 마주한 큰엄마의 첫 마디였다. 초기 치매는 인지 저하가 벌어졌다가 다시 평소처럼 행동하는 패턴을 반복한다. 친척들은 두 모습 중에 자신들이 '믿고 싶은 모습'만 보려고 했다. 푸른씨와 동생이 겪는 혼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됐다. 

어느새 할머니는 음식을 만드는 법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냉장고에서 음식 재료를 꺼내 밥통에 마구 뒤섞어두길 반복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치워야 하는 푸른씨도 힘들었지만, 자신이 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지 연유를 모르는 할머니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할머니는 평소보다 말수가 줄었고 푸른씨에 대한 애착은 이전보다 심해졌다. 푸른씨가 집 밖에 있는 동안, 휴대전화 벨 소리가 늘 따라다녔다. 

두 아이는 '돌봄의 밑천'이었다 

하교를 하고 집에 오면, 어느 날은 음식물이 여기저기 뒤섞여있기도 하고, 어느 날은 배설물이 흩뿌려져 있기도 했다. 컵라면을 사두면 할머니는 자신이 컵라면을 먹었다는 사실을 잊으며 대여섯 개씩 먹기도 했다. 모두 푸른씨와 동생이 학교에 가 있는 사이 할머니가 혼자 벌인 일들이었다. 

푸른씨는 집에 오자마자 할머니의 늦은 점심을 차렸다. 때때로 동생도 손을 거들었지만, 돌봄은 주로 푸른씨의 몫이었다. 아빠는 가끔 집에 와도 TV만 봤다. 푸른씨에게 '할머니 밥 차려드려라', '할머니 목욕 시켜드려라'라고 요구할 뿐이었다. 집에 있는 것도, 집을 나서는 것도 불안한 삶이었다.  

"가끔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는 길이 너무 두려운 거예요. 문 열면 또 어떻게 해놨을까? 바닥에는 오줌이 얼마나 있을까? 어떤 음식물을 섞어 놨을까? 냉장고나 서랍장을 못 열도록 다 테이프로 붙여놓고 나가는데도 다 꺼내놓으니까요."

어른들에게 어린 푸른씨는 커튼과도 같았다. 그들이 보고 싶지 않은 할머니의 모습을 가려주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할머니를 보고 싶을 땐, 아무런 제약 없이 그 커튼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른들은 단 한 번도 돌봄을 하는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힘든지 묻지 않았다. 애초에, 푸른씨에게 이런 역할을 맡기는 게 적절한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저 푸른씨가 늘 그 자리에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푸른씨가 고등학교 1학년이 되던 해, 할머니의 치매가 심해지자 명절에 모인 친척들은 할머니가 치매라는 사실을 수긍했다. 치매가 시작된 지 5년 만에 이뤄진 합의였다. 그날 어른들은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요양 등급을 신청해보자고 얘기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입을 모아 푸른씨와 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가 너희를 돌봐주었으니, 너희가 돌봐야 한다."

어른들에게 이 어린 손들은 그저 돌봄의 밑천이 될 '자원'이었다.

그을린 자국, 돌봄의 기억  

한번은 푸른씨가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니, 방바닥에 불에 그을린 자국이 번져 있었다. 할머니의 전기장판에서 불이 시작된 듯했다. 다행히 불은 꺼져있었고, 할머니도 다친 곳은 없었다.

푸른씨는 그을린 자국에 걸레질했다. 지우려고 해도 다시 번지고, 또 번졌다. 걸레질을 하다가 그만 울어버렸다. 지우려고 할수록 다시 번져나가는 그을린 자국이, 꼭 푸른씨가 할머니를 돌봐온 시간 같았다. 끝내려고 해도 끝낼 수 없고, 점점 더 짙은 상흔만 남기는. 

요양등급을 받고 난 뒤엔 요양보호사가 집에 찾아와 하루 3시간씩 할머니를 돌봤다. 요양보호사는 할머니의 말동무가 되었고, 배설물도 치워줬다. 반찬을 해줘서 음식 만드는 부담을 덜었고, 할머니가 벌이는 사고 위험을 줄여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푸른씨의 불안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3시간 이후, 나머지 21시간은 또다시 푸른씨의 몫이었다.

푸른씨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학교를 가야 했고, 다른 친구들처럼 방과후 체험학습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친구들이 동네에서 모일 때면, 오래 함께 하지는 못해도 얼굴이라도 보이고 싶었다. 그럴 때면 할머니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하며 외출을 했고, 외출 후에 벌어진 일들은 혼자 감당해야 했다.

집에만 있던 할머니는 아무런 자극 없이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서 살가죽만 남아버린 모습이었다. 요양보호사를 파견하는 센터에선 큰엄마에게 할머니를 주간보호센터로 옮길 것을 권유했다.

주간보호센터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하루 8시간 생활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적어도 그곳에선 혼자 고립되기 보다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고, 식사와 간식도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있었다. 푸른씨가 22살이 되던 해, 어른들끼리 할머니를 주간보호센터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할머니는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는 동안 활기가 넘쳤다. 주간보호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그곳에서 배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예전과 다르게 푸른씨가 묻는 말에 곧잘 대답했고 말수도 부쩍 늘었다. 오랜만에 느낀 할머니의 활기가 반가웠지만, 한 편으론 초조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상태가 나빠질 수도 있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런 초조한 마음이 현실이 되는 건 채 1년도 걸리지 않았다. 할머니는 예전보다 더 쇠약해졌다. 치매도 더욱 심해져 대화를 나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할머니가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는 동안 푸른씨는 대학을 다닐 수 있었지만, 과제를 할 수는 없었다. 집에 컴퓨터나 노트북이 없어 PC방에 가서 과제를 해야 했는데, 할머니를 두고 집 밖에 나갈 수는 없었다. 이제 더 이상 혼자서 감당하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친척들에게 할머니 상태를 알렸다.

"할머니 때문에 힘들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할머니로 인해 제 자신이 달라지는 게 더 힘들었어요. 할머니를 미워하게 되니까요."

결국, 대안으로 얘기되는 건 '요양원 입소' 뿐이었다.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함께 돌볼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침 집에서 5분 거리에 요양원이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푸른씨와 함께 있고 싶어 했고, 요양원에 대한 친척들의 인식도 좋지 않았다.

큰엄마는 푸른씨가 돌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머니가 푸른씨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는 게 요지였다. 푸른씨가 자신이 요양원을 알아보겠다고 하니, 큰엄마는 할머니처럼 상태가 심각한 사람을 받아주는 요양원은 없다며 푸른씨를 가로막았다.

푸른씨가 모든 걸 결정하고 책임지는 수밖에 없었다. 푸른씨도 이제 어른이었다. 말이 통하지도 않는 할머니의 자식들을 붙잡고 설득만 할 수 없었다.

"제가 엄청 펑펑 울면서 '할머니 집에서 못 살아', '요양원 가면 할머니를 맨날 봐줄 수 있는 사람도 있어', '나도 너무 힘들어' 그랬어요. 갑자기 할머니가 마치 치매가 없는 사람처럼 '울지마, 알았어' 이러는 거예요. 그때 너무 슬펐어요."

누구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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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을 하던 손녀가 할머니를 살해한 사건을 보도한 마이니치 보도 내용 갈무리. 왼쪽은 가족관계도다. 보라색 글씨로 한글 설명을 추가했다. ⓒ 마이니치 신문 갈무리

 
1년 전 일본에서 손녀가 할머니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났다. 손녀가 할머니를 돌봤고, 그는 푸른씨와 같은 98년생이었다. 지난 10월 28일 <마이니치신문>은 이 여성에게 징역 4년이 구형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촉발한 주요한 요인은 독박 돌봄 구조와 친척들의 무관심이었다. 

<마이니치 신문> 등에 따르면, 이 여성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자신이 꿈꾸던 유치원 교사가 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할머니가 언덕길에서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설상가상 치매 증상이 시작된다. 친척들은 그에게 '할머니가 너의 학비를 대줬으니 네가 간병해야 한다'며 돌봄 책임을 전가했다. 부모가 이혼하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를 거두어준 것이 할머니였기 때문이다. 

손녀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며 야간과 주말에 할머니를 돌봤고, 할머니의 식비나 기저귀 비용 등도 직접 지불했다. 하지만 할머니를 돌본 지 2주 만에 한계를 느끼고 친인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다들 묵묵부답이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그녀에게 답을 내놓은 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 정도는 네가 컨트롤할 수 있어."

물론, 할머니가 공적 돌봄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할머니 곁에는 필요한 돌봄 사항을 체크해주는 '케어 매니저'가 있었다. 하지만 주 돌봄자인 손녀가 아니라 고모가 주로 케어 매니저와 소통했다. 케어 매니저는 할머니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입원을 권유했지만, 고모는 이를 거절했다. 점점 건강이 악화되는 할머니를 돌보며 스트레스를 받던 손녀는 결국 그를 살해한다. 

푸른씨와 이 여성의 사례는 돌봄 문제에서 '누구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하는가'라는 큰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왜 돌봄에 가장 많이 기여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아니, 우리는 왜 듣지 않는가? 음소거된 목소리를 듣는 것이, 보이지 않던 돌봄을 보이게 하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비극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생각해야 한다. 왜 푸른씨와 이 여성의 사례에서 남성 가족구성원의 존재감은 미미한 걸까. 그들 또한 돌봄에 개입할 수 있는 구성원인데, 어떻게 남의 일인 양 거리를 둘 수 있는 걸까. 푸른씨의 아빠는 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걸까. 더 나아가, 푸른씨는 왜 할머니의 자식인 큰아빠가 아니라 큰엄마와 소통하고, 갈등을 벌여야만 했던 걸까. 

푸른씨는 큰아빠가 큰엄마에게 할머니에 대한 돌봄의 역할을 강제로 떠밀었기 때문에, 큰엄마가 자신을 괴롭혔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큰엄마는 가해자였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했다. 가부장제 안에서 무관심한 큰아빠 대신 돌봄의 역할을 떠안은 큰엄마는 푸른씨를 괴롭히는 것으로 감정을 풀었다. 만약 아빠나 큰아빠가 돌봄의 몫을 함께 나눠가졌다면, 푸른씨는 분명 덜 힘들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남성도 돌봄을 해야 한다는 건 단순히 가정 내 성별 불평등을 해소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돌봄에 내제된 성별 불평등 문제를 보지 않고 단순히 '돌봄의 사회화'만 외친다면, 돌봄 일자리 대부분을 중고령층 여성이 담당하는 불평등한 상황이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푸른씨는 지금 청소년 지도사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준비중이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체험 학습을 지원하던 선생님이 푸른씨의 집안 상황을 알고 해준 한 마디 덕분에 찾은 진로였다.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 말이 마음에 높은 담을 쌓고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으려 했던 푸른씨에게 성큼 다가왔다.

"선생님의 행동이 저한테는 벽을 없앨 수 있게 해줬어요. 그때 생각했죠. '나도 나 같은 청소년들이 있다면 그런 청소년들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면서 청소년 지도사 꿈을 꾸게 됐어요."

물론 아직 취업은 요원해보인다. 하지만 지금처럼 조금씩 진전하면, 언젠가는 꿈을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동생은 대학에서 철학과를 다니고 싶다던 꿈을 접고 대형쇼핑몰의 보안 직원 일을 시작했다. 아빠는 여전히 지방 어딘가를 떠돌며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할머니는 집 앞 요양원에서 푸른씨를 기다린다. 푸른씨 말고는 아무도 면회를 가지 않는다. 요양원 비용 약 90만 원은 푸른씨가 10만 원을 보태고, 나머지 80만 원은 큰아빠, 작은 큰아빠, 고모가 나눠 낸다.

그는 자신의 돌봄 경험을 비추어 꼭 두 가지의 대안을 말하고 싶다고 했다. 하나는 돌봄자를 위한 상시적인 심리 상담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속적인 심리 상담 지원은 비단 돌봄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돌봄을 받는 당사자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푸른씨는 돌봄 상황에 대한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 스트레스 때문에 할머니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푸른씨에겐 돌봄에 필요한 경제적 비용을 마련하는 것 또한 중요한 문제였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푸른씨는 할머니의 병원비를 내기 위해 계속해서 친척들에게 손을 벌려야 했다. 경제적 지원이 있어야 안정적인 돌봄이 가능하고, 더 풍성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입구가 꽉 막힌 하얀 동굴을, 혼자 헤쳐나올 순 없다. 
#영케어러 #돌봄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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