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사람들, 그렇지만 반짝이는 순간들

[서평] 이진순씨의 인터뷰집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등록 2020.12.01 17:47수정 2020.12.0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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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 문학동네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은  2013년부터 6년 동안 격주로 '이진순의 열림'이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에 연재된 122개의 인터뷰 가운데 12편을 엮은 인터뷰집이다.

외과의사 이국종, 영화감독 임순례, 소설가 황석영, 교육재단 이사장 채현국 선생 등 미디어에서 많이 거론되었던 인물부터 구술생애작가 최현숙, 베트남전 한국군 양민학살을 폭로했던 구수정, 발달장애인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장혜영, 성소수자 부모인 이은재씨 등 약자 편에서 목소리를 내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또한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용기를 냈던 현 문체부 차관 노태강, 고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씨, 그리고 뚜렷한 개성이 돋보이는 화가 윤석남과 소설가 손아람씨의 인터뷰까지 각자 진한 향기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12명 모두 뛰어난 업적을 이룬 건 아니다. 다만, 좌절과 실망의 순간에도 사람과 삶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서 있다. "좌절과 상처와 굴욕이 상존하는 일상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광채를 발화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순간을 담고 싶었다." (7쪽)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인터뷰마다 사람이 드러내는 다채로운 빛깔들이 담겨 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 

개인적으로 특히나 인상 깊었던 사람은 고 김관홍 잠수사의 아내 김혜연씨였다. 세월호 사건 때 목숨을 걸고 292구의 시신을 건져 올린 잠수사 고 김관홍씨는 이후 2년 동안 부실한 진상규명과 정부의 부당한 처우로 괴로워하다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김혜연씨는 '아빠가 의인이 되기보다 가족과 함께 오래 사는 것이 더 좋은데 엄마는 그게 좋냐'라고 묻는 아이에게 담담하게 말한다.


"그건 아빠의 선택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네가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얘기했어요. 누군가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아빠가 한 일로 292명의 가족들이 그나마 위안을 얻었으니… 아빠가 좋은 일을 한 거라고 말했어요." (33쪽)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세월호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던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듣고 읽어도 어제 일처럼 슬픔이 밀려온다. 아이의 질문과 엄마의 대답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저자 역시 몇 번이나 울음을 삼키며 인터뷰를 진행해야 했다. 남편의 선택을 끝까지 인정해주는 김혜연씨. 그는 고 김관홍 잠수사처럼,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이라도 하도록 용기를 준다. 

"왜 사람들은 할 말을 안 하나? 언론은 왜 안 하나? 우리는 물속에서 막일하는 사람들이야. 우리보다 많이 배우고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왜 저것 밖에 안될까. 진짜로 할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네…" (35쪽)

고 김관홍 잠수사가 생전 했던 말이라고 한다.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행태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 부역자들의 이름이 가득했던 뉴스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최고 학벌에 능력 많은 사람들이 저럴 수 있을까. 그런데 이 책엔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아직 희망이 남아있음을 전한다. 바로 노태강 전 문체부 체육부장의 이야기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그를 두고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 정유라 편을 들지 않고 사실  관계에 충실한 보고서를 썼다는 이유였다. 그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좌천되었고 결국 사직서를 내야 했다. 부당한 권력에 양심을 지키다가 최고권력자의 표적이 되었던 것이다. 이후 노태강은 그 권력자가 탄핵 되고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문체부 차관으로 복귀하게 된다. 현재는 주스위스대한민국대사관대사를 맡고 있다. 

"내가 기대어 위안을 삼고 있는 퇴계 이황 선생의 가르침을 모든 공무원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하며, 때를 만나기도 하고 만나지 못하기도 하지만 결국 몸을 깨끗이 하고 의를 행할 뿐이요, 화복은 논할 바가 못 된다'. (71쪽)

가끔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나 사회 곳곳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주기를 바랄 때가 있다. 달라지지 않은 현실에 대한 한탄 섞인 허상일 뿐이다. 영웅을 기다리기보다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노태강 차관처럼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원칙에 맞게 일을 수행하면 되지 않을까. 지극히 상식적이며 바로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공직에서 쫓겨나 다시 복귀할 때까지 5년 시간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자신의 본분에 최선을 다했다는 '진심'에서 나왔을 것이다. 물론 그는 용감하게 대들었어야 했다며 아쉬움을 표현했다.

"솔직히 전 불의에 대항하거나 소신 있게 저항한 사람이 아녜요. 그냥 공무원으로 당연히 해야 될 일을 한 것인데 이름이 노출된 것뿐이지요." (88쪽) 

'있는 그대로' 쓴 이야기가 주는 감동  

저자는 밀레니얼 세대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1980년생 손아람 소설가다. 그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2000년대 학생운동권 이야기를 다룬 소설 <디 마이너스> 와 용산참사 내용을 다룬 책 <소수의견>을 쓴 작가다. 비슷한 시기에 청춘을 보내고 운동권에 관심을 가졌던 독자라면 더욱 공감하지 않을까? 이제 중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손아람 작가의 고민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그의 소설에는 어떤 세상이 담겨 있을까?

"패잔병의 정서. 뭔가 아주 큰 목표, 정권교체처럼 당장 눈에 보이는 큰 목표는 사라지고, 민생이나 경제투쟁 같은 쪽으로 옮겨왔는데, 이 싸움은 가도 가도 쉽게 끝날 것 같지 않고… 우리가 맞서 싸우는 그 세계로 언젠가는 전부 편입될 운명이라는 느낌. 그런 패잔병의 정서가 지배한 시기였죠. 시간이 흐른 뒤, 80년대 싸움은 기억해도 2000년대 싸움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아요. 심지어 존재했는지조차 모르는, 기억에서 아득한 시절의 얘기. 뭔가 젊음이 통째로 삭제된 느낌이랄까, 그런 걸 쓰고 싶었어요." (200쪽)

막연하게 느꼈던 그 시기의 감정과 답답함을 명확한 문장으로 대면하게 되니 굉장히 시원한 느낌이다. 해답을 찾기보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어 위로가 된다. "꿈꾸던 모든 게 이뤄지진 않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계속 나아간다는 믿음이 있어요. (중략)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제가 원했던 것 중의 상당한 부분이 실현될 거라고 믿고요."(203쪽)  조금씩 나아질 것이라고 함께 믿고 그 방향으로 한 걸음씩 걸어가 보자.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온 이들의 깊고 솔직한 인터뷰는 저자의 진심 가득한 질문과 애정어린 글로 다시 태어나 신문에 연재될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인터뷰를 한 인물들이 큰 주목을 받고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저자의 힘이 크다.

세상의 이목을 끌지 않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의미 있는 도전을 해온 사람들을 발견해 만났고, 형식적이고 과장된 질문과 답변이 아니라 부드럽고 편안한 대화를 이끌었다. 특별히 더 내세우거나 강조할 필요가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담겼다. 작가의 뛰어난 필력 덕분에, 읽는 재미와 감동이 있다.

인터뷰에 다 담아내지 못한 또 다른 삶의 이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과장되거나 미화되는 것을 걱정했던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 인터뷰 너머 각자 고유의 삶이 있고 감당해야 할 일과 역할이 있을 것이다. 언급하지 못했지만,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하는 순간들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응원이 있다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으리라. 이 책은 우리가 서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좋은 디딤돌이 되어 준 뜻깊은 책이다.

당신이 반짝이던 순간 - 진심이 열리는 열두 번의 만남

이진순 (지은이),
문학동네, 2018


#이진순 #당신이반짝이던순간 #인터뷰 #진심이열리는열두번의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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