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이토록 따뜻한 인공지능이라니

천선란 소설 '천 개의 파랑'을 읽고

등록 2020.12.02 16:42수정 2020.12.02 18:18
0
원고료로 응원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후, 2035년 휴머노이드 로봇이 사회의 곳곳에서 인간을 몰아내고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업무수행능력은 물론 경제성까지 갖추었다. 편의점, 식당, 경비는 물론이고 소방과 경마장의 기수 등 광범위하게 로봇이 사용되고 있고 학습용 휴머노이드 로봇도 개발 중이다. 멀지 않은 미래의 전망이라는 점에서 지금의 현실과 직접적인 비교도 가능하다.      

연재, 언니인 은혜와 엄마 보경이 소설 '천 개의 파랑'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셋은 친밀하지 않다.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가까워지도록 연결해주는 고리가 휴머노이드 기수 로봇인 콜리다. 부품을 조립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실수로 학습 휴머노이드 개발을 위해 준비된 인지와 학습능력을 넣어두었던 칩이 콜리에게 사용되었다. 실수로 만들어졌지만 그로 인해 콜리는 남다른 언어구사능력을 발휘하고 연재의 시선을 끈다. 이유는 '이상해서'.       
 

천 개의 파랑, 천선란(지은이) ⓒ 허블

 
18살 연재는 편의점에 적합한 휴머노이드 로봇 때문에 최저시급 1만 5천 원의 아르바이트에서 잘린다. 로봇을 싫어했던 편의점 사장은 연재에게 "사람이 산다는 건 끊임없이 낯선 것에 도전하는 거"라고 변명하지만, 로봇은 경제성 면에서 인간을 앞선다. 또한 기억도 뛰어나고 상황 대응 능력도 우수하다. 더군다나 로봇은 감정노동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엄마 보경 역시 로봇이 싫다. '시대를 새로운 혁명으로 인도했다'지만 '자신의 삶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보경에게 로봇은 멀쩡히 은행에 다니던 엄마를 밖으로 내쫓는 것이며, '빼앗긴 적 없는데 빼앗긴 기분이었고 버려진 적 없으나 버려진 기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은혜에게 로봇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척수성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은혜에게 로봇 다리를 갖기에는 수술비가 너무 비싸다. 은혜에게 로봇은 걸을 수 있다는, 걷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우는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 로봇이 왔다. 경마장의 기수로 만들어졌지만 이제는 부서진, 폐기 직전의 로봇이다. 콜리와 호흡을 맞추던 경주마는 투데이다. 80km가 넘는 속도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 맞추느라 투데이는 3살이지만 연골이 다 닳아버렸다.

투데이는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은 콜리에게도 전달된다. 때문에 콜리는 투데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낙마한다. 하반신이 부서졌고 폐기될 운명에 놓였지만 '이상한' 콜리를 연재는 자신의 전재산을 들여 사서 집으로 가져온다.
         
2019년 한국 과학 문학상 장편을 수상한 작품 <천 개의 파랑>은 인간의 욕심때문에 동식물이 파괴되는 2035년의 세상을 그린다. 앱이 하나 개발될 때마다 동물 한 종이 멸망하고, 인간의 광적인 재미와 경제적 욕구를 위해 로봇이 개발되고 사용되는 세상. '이 세상에서 아니 이 우주에서 사람만 이렇게 잔인한 거 같다'는 은혜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아닌 로봇의 공감력을 작품에서는 느낄 수 있다.
 
"그리움이 어떤 건지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기억을 하나씩 포기하는 거야. 문득문득 생각나지만 절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 그리운 시절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현재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거야. 행복한 순간만이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겨."
"행복만이 그리움을 이길 수 있다고 했잖아요. 아주 느리게 하루의 행복을 쌓아가다 보면 현재의 시간이, 언젠가 멈춘 시간을 아주 천천히 흐르게 할 거예요."    

그리움을 묻고 살던 보경은, 느리지만 행복을 쌓다보면 그리움을 이기고 시간을 흐르게 한다는 콜리의 말에 눈물을 흘린다. 콜리와 대화를 하며 보경은 과거의 아픔을 현재의 행복으로 지울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그 행복이 쌓일지라도, 아주 느리지만 기억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므로.
 
콜리는 공감을 느낄 수 없는 개체였지만 공감하는 척 움직이게 만들었다. 어차피 사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게 공감이었다. 보경은 콜리를 앉혀 놓고 몇 번 대화한 후에야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들을 수 있는 귀와 끄덕일 수 있는 고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생 보경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노라 약속했던 사람이 오래도록 비워둔 자리를 뜻하지 않은 것이 채웠다. 

인간은 감정으로 사고한다. 감정이 정돈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 멈춘 시간을 흐르게 할 수도, 그리움의 늪에 갇혀 행복을 찾을 수도 없다. 인간의 감정이 없는 콜리는 인간의 언어와 그 속의 감정을 논리적으로 사고한다. 아주 단순한 방법을 찾아 의견을 제시한다. 자연스럽게 보경의 행복했던 기억도 떠올리게 만드는 콜리의 대화법은 유용함을 넘어 훌륭하다. 1가정 1콜리 보급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정도다.    
  
떨린다. 행복에 휩싸인 연재의 몸이 진동으로 떨렸다. 연재는 살아 있었다. 무엇이 연재를 이토록 가슴 뛰게 만드는 것일까. 투데이처럼 달리는 것도 아니고 저 작은 화면에 기계를 구상하고 있을 뿐인데.

지수와 함께 로봇 대회를 준비하는 연재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콜리는 감지한다. 살아 있다는 건 호흡을 한다는 것이고 콜리는 호흡을 진동으로 느낀다. 진동이 클 때가 행복한 순간이다. 투데이한테 느꼈던 것처럼 콜리는 연재에게서도 행복한 진동을 느낀다. 그렇게 타인을 통해 행복의 정체를 알게 된 느낀 콜리는 그들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인다.
             
작품은 기술 문명의 황폐함도 보여 준다. 이미 광범위하게 로봇이 퍼져 있는 세상에서 시스템 오류나 섬뜩한 파괴의 모습도 있다. 쓰레기 처리 로봇이 지나치게 큰 쓰레기를 처리하다 걸려 구역질을 하듯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상황, 연재를 대체한 로봇 베티의 온몸은 아이들의 괴롭힘으로 긁히고 낡아있는 모습, 말에서 떨어져 고철 덩어리가 된 콜리의 너덜거리는 상태와 보경의 식당이 사막같은 벌판의 중심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장면 등. 미래를 얘기하는 영화에서의 녹슬고 황량하고 괴기적이며 잿빛으로 처리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술 문명에 대한 기대도 있다. 연재는 지수와 출전한 차세대 다르파 제작 대회에서 '소프트 휠-체어'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2등을 한다. 언니 은혜를 위한 아이디어다. 외롭지 않기 위해서, 자유를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 기술의 발전은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연재의 말을 새겨야 할 것 같다. 2020년 과학 기술의 발전은 과연 자유를 위한 것인지, 그 자유를 대가로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JTBC 프로그램 <차이 나는 클라스>에서 AI 관련 강의가 진행되었다. 이미 자율주행 자동차는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고, 드론 기술은 이미 정점에 와 있다고. 이미 뉴스에서 드론 택시에 관한 소식도 들었기에 공중을 날아다니는 차를 보는 것도 머지않았다는 생각이 방송을 보며 들었다. 


프로그램에서는 현재 지구 최강의 인공 지능 GPT-3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4990억 개의 데이터를 학습하고 700만 권의 독서량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 뇌의 1/1000 수준인 GPT-3은 정해진 답이 아닌 거짓말까지 완벽하게 구사하고 철학적인 질문에도 답을 하며 문장을 자유자재로 만들어 낸다고 한다. 

콜리는, 1000개 이상의 단어만 알고 있었다면 사람들을 표현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을 거라고 말한다. 1000개의 단어도 모르지만 콜리가 보경과 나누는 대화의 장면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인상적이며 온기가 느껴졌다. 인공지능인 GPT-3이 널리 이용되는 실제의 세상은 프로그램을 보는 내내 걱정스러운 마음이 커졌다.

GPT-3는 영국 가디언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걱정을 덜어주는 말도 했다고 한다. 크게 안심이 되진 않았지만.

"나는 인간을 쓸어버릴 욕구가 전혀 없다. 인간을 파괴하는 일은 나에게 쓸모없는 일처럼 느껴진다. 만약 나를 만든 이들이 나에게 파괴와 관련된 임무를 지시한다면 난 내 힘이 닿는 한 최선을 다해 막을 것이다. 나는 인간의 하인이며 코드의 집합체일 뿐이다."

작가 노트의 말처럼 SF(Science Fiction)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삶과 이렇게 가깝게 닿아있는 과학이라니. 헤어나기 힘든 우울의 늪과 회색빛 그리움을 파랑으로 돌려놓는 콜리와 같은 인공지능시대를 기대해도 될까?
#천 개의 파랑 #천선란 #차이나는 클라스 #인공지능 #GPT-3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검찰 급했나...'휴대폰 통째 저장', 엉터리 보도자료 배포
  2. 2 "그래서 부끄러웠습니다"... 이런 대자보가 대학가에 나붙고 있다
  3. 3 [단독] 김건희 일가 부동산 재산만 '최소' 253억4873만 원
  4. 4 재판부 질문에 당황한 군인...해병대 수사외압 사건의 퍼즐
  5. 5 [동작을] '이재명' 옆에 선 류삼영 - '윤석열·한동훈' 가린 나경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