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은 어떤 시일까?

김륭 시인, 동주문학상 수상 시집 펴내 ... 김문주 문학평론가 해설

등록 2020.12.02 10:58수정 2020.12.0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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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언젠가

다시 당신을 만났으니, 이제
나는 당신을 만나지 않은 것처럼
간절해질 수 있다.



김륭 시인이 쓴,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시집인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도서출판 '달을쏘다' 간)에 실린 시다.

동주문학상제전위원회와 계간 <시산맥>이 윤동주 시인의 이름을 딴 '동주문학상'을 운영하고 있다. 2019년부터 '윤동주서시문학상'에서 이름을 바꾸고 시집 공모를 통해 수상자를 선정해 오고 있다.

"내가 좋은 세상은 볼 만큼 봤으니, 이젠 그녀가 좋은 세상을 볼 겁니다"는 설명이 붙은 이 시집에는 48쪽에 걸쳐 김륭 시인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시인은 "집에 두고 온 복숭아를 보러 가던 여자가/말했다, 꼭 같이 보러 가요.//검은색입니다, 당신만/보입니다"라고 할 정도다.

문학평론가 김문주 영남대 교수는 "해찰과 존재증명의 언어"라는 제목의 해설에서 "단도직입적으로, 김륭의 모든 시는 욕망의 시, 사랑의 시, 아니 사랑의 폐허, 그 텅 빈 어둠에 관한 시이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 오래되고 낡은 문학의 테마, 아니 우리 삶의 종결될 수 없는 그 유구한 구멍을 들여다보는 그의 시들 앞에서, 나는 다시 망연자실(茫然自失)하다"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인이 상대하는 이 식상(食傷)한 통속의 주제들은 그 깊이의 도저함으로 인해 또다시 간절해지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수일(秀逸)한 문학 중에 삼류와 다투지 않는 작품이 있었던가. 김륭 시의 말은 그 도저(到底)한 어둠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서의 언어이다.

그의 시에 따라다니는 난해함의 혐의는, 시의 말들이란 때때로 존재를 현현(顯現)하는 증상임을 기억함으로써 해소되어야 한다. 입은 먹는 기능으로서가 아닌 입술에 대한 감각 경험으로서 존재에게 더 깊이 기억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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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륭 시인의 시집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표지. ⓒ 도서출판 ‘달을쏘다’

 
김륭 시인은 동주문학상 수상소감을 통해 "실패한 생을 그것보다 먼저 실패한 사랑을 버릴만한 딱 한곳을 찾으라면 시, 그러니까 느닷없이 발생한 사랑이다"며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고학 냄새가 나는 것은 내 시속에 내가 모르는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실패'라는 내 시공간 아래 몸이란 유적을 상상하게 된다. 문득이란 말 속에 내재된 아득함은 지나간 삶의 한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늙은 펭귄처럼, 시간을 잃어버릴 수 있는 시계를 찾아 너무 멀리 왔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고 덧붙였다.

김륭 시인은 "동주라는 이름이 새겨진 상을 받게 돼 무척 기쁘지만, 내가 가진 언어는 아직 이 세상에 영주할 권리를 얻지 못했다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 한 번 더 절망하며 꾸벅, 머리 숙여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고 했다.

김륭 시인은 그동안 문학동네 동시문학상 대상(2013년), 지리산문학상(2014년), 경남아동문학상(2019년) 등을 받았고, 그동안 시집 <원숭이의 원숭이>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 <별에 다녀오겠습니다> 등을 펴냈다.

검은 기린
- "이 육체 속에서 우리는 무얼 한단 말인가." 내 옆 침대에서 누울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 말했다.―안토니오 타부키, 『인도 야상곡』

영혼을 다 써버린 후 검은 연기처럼, 다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나는, 내 몸이 어떻게 지내는지
당신이 지새는 밤과 어떻게 섞이는지 보려고

내가 없는 내 죽음도 보일지 몰라 하얀 침대시트를 함께
말았던 당신의 죽음 또한

그러나 지금은 자는 게 좋겠다고
선반 위에 올려놓은 130g 햇반처럼 납작해지는
별, 하얀, 검게 그을리기 좋은

문득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면 당신 또한 돌아왔다고
나는 다 써버리지 못한 울음으로 가만히
두 눈을 꺼트릴 것이다

없는 아름다움도 막 팔아먹을 만큼 우린 참
식물적으로 아팠지, 이런 문장 하나쯤은 서로의 입에
넣어줄 수 없을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듯
검게 부러져가는 서로의 목을
베개처럼 껴안고

엄마, 엄마

나는 왜 자꾸 눈사람 머릿속이
검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요
#동주문학상 #김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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