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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원과의 일전 앞, 노회찬이 무명용사탑 찾은 까닭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①-2 : 삼겹살 불판, 노회찬 어록

등록 2020.12.07 07:38수정 2020.12.07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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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을 선보인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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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7대 총선 당시 노회찬이 여의도 윤중로를 거닐며 선거운동하는 모습. ⓒ 노회찬재단


[지난 기사] '노회찬 촌철살인',빛 못 볼 뻔한 사연 에서 이어집니다.

TV 토론의 성공 이후 노회찬은 일약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노회찬은 어깨띠 하나 두르고 당직자들과 함께 점심시간에 맞춰 여의도 국회의사당 옆 윤중로로 거리유세에 나섰다. 장석준은 그날의 풍경을 15년이 지나 이렇게 술회한다(<프레시안>, 2019.4.23.).

"의사당 옆 윤중로는 마침 식사를 마치고 산보를 하거나 벚꽃 축제에 나들이 나온 시민으로 가득했다. 이때 처음 보는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마치 유명 연예인이라도 본 듯 노회찬 후보 앞에 멈춰서고 환호성을 지르며 에워쌌다. 먼저 악수를 청하는가 하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진보정당에게는 전에 없던 경험이었다. TV 토론회에서 노회찬 후보가 일으킨 바람이 실감됐고, 대중정치가 무엇인지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노회찬은 "벚꽃 날리는 것이 표 내리는 것 같다"며 당시 분위기를 표현했다. 민주노동당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4년 3월 28일자 노회찬의 <선대본 일기>는 "힘내라 진달래!"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여의도 나들목 부근은 어느새 밀려온 봄꽃 천지다. 개나리가 듬뿍 피어 있고 벌써 곳곳에서 진달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3월 28일 아침 여의도. 노란 개나리와 연분홍 진달래꽃이 지금의 열우당과 민주노동당 지지율만큼씩 상륙해 있다. 힘내라, 진달래. 가슴도 눈시울도 연분홍이다."

TV 토론, "보낼 곳은 많고, 선수는 부족하고"


사실 TV 토론에 나간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노회찬의 경우는 총선 이전부터 몇 차례 TV 토론에 나가면서 기본훈련을 이미 마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운명의' 3월 20일 토론을 앞두고 한 케이블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최종 점검을 마친 '준비된' 토론자였다.

1인2표가 총선에 처음으로 도입된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TV 토론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2002년 대선에서 쌓은 인지도와 유권자들의 막연한 호감을 표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확실한 이미지 만들기가 필요했고, 이를 위한 유일무이한 방법이 TV 토론이었기 때문이다.

노회찬과 중앙선대본은 당시 TV 토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감을 넘어 절감하고 있었다(김능구, '한국정당실록 60년 인터뷰-노회찬 편', 2009.1.29.). 

"특히 TV 토론이 국민여론과 선거에 표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저희들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2002년 대통령선거 때 TV 토론 나가면서부터 실제로 권영길 후보가 국민여러분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국민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이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어떻게 여론을 바꾸어내고 또 인지도를 높여내는가를 저희들이 실감을 했기 때문에 비록 저희들에게 많은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지만은 TV 토론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노회찬은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TV 토론을 "우리의 메시지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에 대해서 가장 주요한 선거운동"이라고 생각했다. 즉 "저희들이 지역에서 어차피 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비례대표에서 의석을 늘릴 가능성이 더 높다면 정당득표를 높이기 위해서는 가장 유력한 것이 TV 토론"이라고 판단한 노회찬은 당 차원의 TV 토론 참여에 큰 공을 들였다.

노회찬이 큰 공을 들였다는, 민주노동당의 TV 토론 참여는 투쟁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토론 참여를 위해 사이버 시위, 언론노조를 통한 압박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3월 20일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노회찬 어록'이 등장했고, 방송사 쪽의 출연 요구를 다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 출연 요청이 당으로 쇄도했다.

문제는 방송 토론에 당장 나설 수 있을 만큼 훈련이 된 정치인의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민주노동당 선대본 문명학 기획조정실장은 이렇게 말한다(정용상 기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이!-TV 토론, 탄핵 수렁에 빠진 민주노동당을 건져내다', <매일노동뉴스>, 2005.8.24.). 

"사실 TV 토론에 처음 나가서 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서 실수도 하고, 질타도 받으면서 훈련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실수할 여유가 없었다. 매번 홈런을 쳐야 할 상황이었고, 실제로 매번 홈런, 최소한 장타를 쳤다. 그러고 나니까, 노회찬, 심상정 후보 말고는 다른 사람들은 안 나가려고 하더라. 막판에는 토론 나갈 사람이 없어서 고생했다." 

방송토론 섭외와 일정조정, 정책 제공의 실무를 담당했던 김홍석 기조실 부장은 "토론을 소화할 수 있는 정치인이 부족했다. 또 방송사들과의 실랑이 과정이 쉽진 않았다"며 당시를 회상했다(정용상 기자, <매일노동뉴스>, 2005.8.24.). 

"방송사 쪽에선 단연 노회찬 의원의 출연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후보이자 선대본부장이었던 만큼 일정 조정도 어려웠고, 계속 한 사람만 내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으로 권영길 의원이 많았고, 심상정 의원, 김종철 대변인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쇄도하는 방송출연 요구를 수용할 만큼 '선수'가 많지 않았다. 방송국 관계자들과 말씨름해야 했던 내 입장에선 난처한 일이기도 했다. 토론자가 적절하지 않을 경우 당원들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당장 방송사쪽에서 항의를 많이 받게 된다. '왜 그런 사람을 내보냈냐'는."


"4월 15일 판갈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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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삼겹살 불판과 오래된 축음기를 등장시킨 민주노총, 공공연맹, 언론노조가 제작 배포한 정치 포스터. <진보정치> 173호 (2004.4.5.~4.11.). ⓒ 진보정치

 
민주노동당 기관지(편집위원장: 이광호)인 <진보정치> 173호를 보면 "민주노동당을 찍어주세요"란 제목 아래 각계의 지지 발언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소설가 공선옥이 노회찬의 '50년 불판'을 불러낸다.

"장애인이 행복한 나라, 노동자 농민 도시서민 등 힘없고 가난한 민중의 편에 서는 것이 언제나 당연시되는 나라, 적어도 돈 없어서 공부 못하고 돈 없어서 치료받지 못하는 일은 없는 나라, 지역만 믿고 정치하는 정치인이 없는 나라,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고 싶고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정당이 민주노동당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나는 민주노동당을 지지합니다.

그러고 무엇보다, 수구 대 보수가 아니라 이제는 개혁 대 진보의 판이 열려야만 한다는 간절한 소망 때문에. '50년 불판'이라는 노회찬 선생의 말씀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50년 불판, 정말 지긋지긋 합니다. 4월 15일은 그 더러운 불판을 민주노동당이라는 새판으로 산뜻하게 '개비' 할 날입니다. 그날이 기다려집니다."


17대 총선에 출마한 민주노동당 후보들은 '삼겹살 불판'과 '노회찬 어록'을 최대한 활용했다. 그만큼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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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선거대책본부장으로 17대 총선을 치르던 2004년 4월 노회찬은 서울 구로동 오류시장을 방문해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노회찬 오른쪽 옆으로 선거운동원이 까맣게 그을린 고기 불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왼쪽은 민주노동당 초대 기획위원장 출신인 박홍순 후보. ⓒ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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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부평갑지구당에서 했던 '아침을 여는 시사만평': 시사만평은 대형간판을 세우고, 실제 사람이 그림처럼 들어가서 시사만평을 만든 것이다. 전철역 앞, 출근길 인파가 많은 곳에서 행해진 시사만평은 시민들의 '디카 세례'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물론 선거법 문제로 만평에 '민주노동당'을 적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나는 유권자들은 누구 작품인지 다 알았을 것이다). ⓒ 노회찬재단

 
전국의 민주노동당 총선 후보와 선거운동원, 활동가와 당원들은 노회찬 어록을 부지런히 이곳저곳 실어 날랐다. 이를 불법으로 간주하는 대전시 선관위와 차마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대전시 선관위가 2004년 3월 22일 민주노동당 대전시지부 앞으로 '선거법위반 게시자료 삭제요청' 공문을 발송했다. '바다로'라는 ID를 쓰는 누리꾼이 퍼나은 '심야토론 노회찬 어록 화제'라는 제목의 언론 기사를 퍼날랐기 때문이었다. 반면 민주노동당 중앙당 언론보도 모음 게시판에 게재된 '노회찬 어록 인기' 게시물은 삭제요청을 받지 않았다. 선거운동 권한을 가진 정당 누리집에 오른 같은 게시물이더라도 개인이냐 관리자냐에 따라 선거법 위반 여부가 달라진다는 설명이었다.

이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김성희 부대변인 이름으로 "선관위의 이러한 주장은 인터넷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사적 의사 표명이나 소통은 이제 모든 국민이 다 아는 보편적인 문화이다. 이를 선거법으로 규제하겠다는 것은 무지를 넘어 궁극적으로 국민의 정치적 참여를 옥죄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는 선관위의 존재 이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선관위가 변화하는 사회와 확대된 온라인 문화에 대한 상식 수준의 이해를 갖춰주길 기대한다"는 논평을 낸다. 노회찬은 2004년 3월 30일 <선대본 일기>에 이렇게 적는다. 

"MBC 'PD수첩'에서 찾아왔다. 선거관리위원회의 과도한 법 해석으로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사례에 대해 묻는다. 특히 최근 '노회찬 어록' 퍼나르기를 대전선관위가 불법으로 간주한 데 대한 의견을 묻는다. 임좌순 중앙선관위 사무총장 면담에서 시정 약속받은 바를 설명했다."

"내 손으로 국회교체 지금 당장 판을 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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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7.30재보궐선거 당시 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노회찬 정의당 후보. 사진은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 당시 모습. ⓒ 권우성

 
10년이 흐른 2014년 7.30 동작을 재보궐선거에 출마한 노회찬은 "여의도에 새로운 '불판'을 깔겠다"며 '불판론'을 다시 들고 나왔다. 출마기자회견(2014.7.8.)에서 노회찬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10년 전에 '50년 된 불판을 갈아야 한다'고 했을 때 국민들이 진보정당 의원을 10명 당선시켜줬듯이 이번 재보선에서 오만한 새누리당과 무기력한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 모두를 환골탈태시키는 정치 판갈이를 할 수 있도록 저를 당선시켜 주십시오. 이번 7.30 재·보궐 선거는 한국 정치의 판갈이 시즌2의 신호탄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앞장서서 낡은 정치판을 바꾸겠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의 혁신을 위해 노회찬이 있는 국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기자회견을 마치고 노회찬은 현충원 무명용사탑을 참배한 뒤 <난중일기>에 글을 올린다. 판갈이된 한국정치가 지향하는 바를 압축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첫날 첫걸음을 무명용사탑으로 정한 것은 이름 있는 사람 앞에 줄 서는 정치가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들을 주인으로 모시는 정치를 펼쳐나가겠다'는 다짐의 뜻이다. 이름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건강한 다리가 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다." 

여당의 실정과 야당의 무능함에 숨통을 트기 위해 출마했다고 밝힌 노회찬. 선거 결과, 상대 후보인 나경원 새누리당 후보에 929표 차로 낙선함으로써 노회찬발 '한국 정치의 판갈이 시즌2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데 실패하고 만다.

2020년 1월 8일 오전 국회 로텐더홀 계단에 고기 불판을 든 정의당 당직자와 관계자들이 등장했다. 정의당이 '제21대 총선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 선출 시민 선거인단 대국민 제안' 기자회견을 연 것이다. 그가 떠나고 1년 6개월이 지난 뒤, '노회찬 불판'의 재등장은 '2004년의 승리와 영광'을 재현해보겠다는 뜻이 짙게 배어 있다. 

심상정(정의당 대표)은 "기득권 양당체제를 교체하는 새 판을 짜기 위해선 '물갈이'가 아닌 '판갈이'가 필요하다" "시민의 뜻을 반영하는 개방형 경선제도인 비례대표 후보 선출을 위한 시민선거인단 모집을 시작한다. 수십 년 동안 정치에서 배제된 이주민, 비정규직 노동자, 장애인 그리고 수많은 이름 없는 국민들에게 마이크와 연단을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민선거인단 이름은 '판을 가는 사람들', 슬로건은 '지금 당장 판을 갈자 내 손으로 국회 교체'다. 2004년의 노회찬을 연상시키는 글귀다. 김종민(정의당 부대표)은 2004년 총선에서 노회찬이 "다 타버린 불판에 좋은 고기 올린다고 고기가 맛있지 않다. 불판을 갈아야 한다"라고 한 발언을 언급하면서 시민선거인단 이름을 '판을 가는 사람들'로 정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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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심상정 대표를 비롯해 시민선거인단으로 참여한 11명의 시민과 참석자들이 '불판'과 피켓을 들고 "내손으로 국회교체, 지금 당장 판을 갈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1.8.) ⓒ 노회찬재단

 
"지금 당장 판을 갈자"고 했지만, 2020년 4월 15일 21대 총선에서 정의당은 20대 총선과 마찬가지로 6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데 그치고 만다. 언론의 조명도 많이 약해졌다. 

16년 전 그날인 2004년 4월 15일 민주노동당은 10석의 의석을 확보,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44년 만에 당당히 원내에 진출했다.

과연 여의도 정치의 다 타버린 시꺼먼 불판을 누가, 언제. 어떻게 갈 수 있을까?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②]로 이어집니다(12월 10일)
#노회찬 #노회찬재단 #노회찬어록 #삼겹살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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