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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는 세계공용어가 아닙니다, '아싸'거든요

비교언어학적으로도, 세계 언어 네트워크상으로도 '고립어' 인 우리말

등록 2020.12.11 08:09수정 2023.01.30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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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보강 : 2021년 1월 6일 오후 5시 8분]

한국어의 인기가 높아져 간다는 소식에 '그럼 한국어도 세계 공용어가 되는 날이 올까요? 우리가 외국어 공부를 안 해도 되는 날이 올까요?'라는 희망을 피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은 그냥 장난삼아 해보는 생각이겠지만, 진심으로 바라는 순수한 영혼도 간간히 있는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우선 한국어는 비교언어학적으로 고립어(language isolate)에 가깝다. 한국어와 비슷한 언어는 한국어밖에 없다는 뜻이다(참고로 한국어는 언어형태학적(문법적)으로는 고립어(isolating language)가 아니라 교착어이다). 한국어를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보는 이론이 최근 힘을 받고 있지만, 만일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해도 일본어와 다소 비슷할뿐, 같은 어족의 다른 언어들과 상당히 다르다.

포르투갈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 등의 로망스어족이 서로 굉장히 비슷한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한국어가 비교언어학적으로 고립어가 아니라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해도, 한국어와 유사한 언어가 없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인도유럽어족의 수많은 친족 언어들은 갈래가 비슷해서 서로 배울 때 고생이 덜하다. 몇몇 언어는 사투리 수준으로 비슷하다고 한다. 프랑스 사람이 이탈리아어 배울 때는 함경도 사람이 전라도 말 배우는 수준의 노력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려워 봤자 서울 사람이 제주 말 배우는 정도.

그런데 한국어는 비슷한 언어가 없다. 한국 사람은 다른 모든 언어를 배울 때 고생하지만, 전 세계 모든 사람들도 한국어 배울 때 고생을 한다는 뜻이다. 한국어가 공용어가 되면 지구마을 사람들이 힘들게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 이제 와서 7700만 명(한국어 사용자 숫자)이 편하자고 나머지 77억 명의 인구가 생고생하게 만들 수는 없지 않겠는가?

문법적으로도 고립어지만, 세계 언어들의 네트워크에서도 고립어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구한말 이전에 한반도 밖에 한국어의 존재가 알려졌다는 증거가 없다. 한국어는 오직 한반도에서만 쓰였다. 심지어 교황청에 조선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사제를 보내달라거나 조선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막아달라거나 하는 서신을 보낼 때도 한문으로 작성했으니, 한국어가 외부로 전달될 일이 없었다.


한국어의 모어 사용자(7730만 명)가 공용어인 프랑스어(7720만 명)나 독일어(7610만 명)의 모어 사용자보다 많다는 이유를 들어 한국어도 공용어, 세계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봤는데, 빈약한 근거로 이른바 '국뽕 코인'을 '당기려는' 시도이므로 거르는 게 좋겠다(모어 사용자가 적더라도 넓은 지역에서 교역, 소통의 수단으로 쓰여야 공용어이다).

'외계어네, 외계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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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외계어 같아요."의 각 언어별 표현 못 알아듣겠다고 말할 때, 우리는 '외계어 같다'고 말한다. 영어에서는 '나한테는 그리스어 같다'고 말하고 스페인어에서는 '중국어 같다'고 말한다. ⓒ 김나희

 
이 표는 무엇일까? 전 세계 언어들에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외계어 같아요'라는 표현이 어느 언어를 지칭하는지 연쇄로 나타낸 것이다.

영어에서 '못 알아듣겠어요'는 '나한테 그리스어처럼 들려요.'(It's Greek to me)라는 표현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스페인어에서는 못 알아들을 때 '중국어예요'(Es chino)라고 한다. 체코어에서는 '나한테는 스페인 마을이에요!'(To je pro me spanelska vesnice!)라고 말한다.

못 알아듣겠다는 말의 연쇄는 이렇게 이어진다.

핀란드어 : Täysi latina. (완전 라틴어야.)
라틴어 : Graecum est. (그리스어야.)
그리스어 : Εν τούρτζικα που μιλάς; (너 터키어 하고 있니?)
터키어 : Bu konuya Fransız kaldım. (난 이 주제에 대해 프랑스인이야.)
프랑스어 : C'est du russe. (러시아어야.)
러시아어 : Это для меня китайская грамота. (나한테는 중국 글씨야.)
중국어 : 火星文. (화성인 언어야.)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어요'의 비유로 많이 거론되는 언어 1위는 압도적으로 중국어다. 정말 많은 지구인들이 이해가 안 될 때 '나한테 완전 중국어 같아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어, 터키어, 스페인어, 아랍어도 많이 거론된다.

한편 포르투갈어와 네덜란드어, 폴란드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에서는 못 알아들을 때 비유하는 언어가 여러 개다. 포르투갈어에서는 못 알아들을 때 그리스어, 아랍어, 아람어, 중국어, 라틴어, 일본어, 히브리어 같다고 말한다!

재미있게도 터키어에서는 'Konuya Fransız kaldım' 즉 '우리는 이 내용에 대해서는 프랑스인이에요'라고 말한다. 터키어를 모르는 무식한 프랑스인처럼, 지금 터키어로 이루어지는 대화를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는 뜻이다.

다른 표현들은 모두 '당신이 말하는 내용이 외국어로 된 것처럼 내가 못 알아듣겠다'는 식으로 상대의 내용을 외국어에 비유하는 데 반해, 이 표현은 '내용은 변함없이 터키어인데, 내가 터키어 모르는 프랑스인이 된 것 같다'는 식으로 나를 외국인의 위치에 놓아 반대의 관점을 취한다.

또한 국제적 소통을 촉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어인 에스페란토에서는 Tio estas volapukaĵo(볼라퓌크예요)라고 말한다. 볼라퓌크가 뭘까? 에스페란토 이전에 있었던 또 다른 인공어이다. 인공어 에스페란토에서 '못 알아듣겠어요'로 또 다른 인공어를 인용하는 센스!

가장 예상치 못한 표현은 퀘벡의 불어권에 있었다. 여기서는 못 알아들었다는 표현으로 '이게 겨울에 뭘 먹지요?'라고 말한다. 이게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말인지!

(가상 대화)
- 기본은 민코프스키 덧셈과 강하게 관련된 병진 불변 연산입니다. E를 유클리드 공간이나 정수 격자로, A를 E에 있는 이진 이미지라고 하면, 구조적 요소 B에 대한 이진 이미지 A의 침식은....
- Qu'est-ce que ça mange en hiver? (이게 겨울에 뭘 먹죠?)
- 대체 무슨 소리...죠?
- 정확해요! 바로 그 뜻이에요!
- ....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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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알아듣겠어. 외계어 같아.'의 언어별 표현 많은 언어에서 '못 알아듣겠어요.'라는 뜻으로 '중국어 같아요.'라고 말한다. '한국어 같아요.'라는 표현은 어느 언어에도 찾아볼 수 없다. 한국어가 한반도 밖에 소개된 적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 김나희

 
이 표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한 나라에서도 지방마다 쓰이는 비유가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에서는 여러 언어들이 쓰이고, 네덜란드인들은 통상 여러 언어들을 배우기 때문에 동네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내가 이 주제로 질문했을 때, 한 네덜란드인은 '우리 네덜란드는 약소국이라 강대국 언어들을 다 배워야 했기 때문에 못 알아듣는 언어가 없어서 그런 비유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다른 네덜란드인은 '어? 우리 동네는 못 알아들을 때 그리스어, 중국어, 라틴어 같다고 말하는데요?'라고 대답했다. 한 이탈리아인이 '나는 그럴 때 터키어라고 해요'라고 하니, 또 다른 이탈리아인은 '나는 아랍어라고 하는데...'라고 했다.

'못 알아먹겠다'의 비유에 한국어는 없다

못 알아듣는 말을 어떤 외국어에 비유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그 외국어의 존재가 그 사회에 알려져 있어야 한다. 중국어라는 낯선 외국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 사회 구성원이 공유하고 있어야 '완전 중국어야'라는 말이 '못 읽겠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일 수 있다(존재 자체를 모르는 외국어를 비유로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뭔 말이야. 나바호어 같아'라는 표현이 쓰이려면, 최소한 '나바호어'라는 말을 사람들이 알고는 있어야 한다).

낯설기는 하지만 낯설다는 사실 자체는 다들 공감할 정도로 길에서라도 한두 번은 중국어를 들어보거나 한문을 본 적이 있어야 하므로, 중국인이 현지에 어느 정도는 진출해 있어야 한다.

아예 다언어 사회라서 모두가 그 언어를 할 수 있다면 또 그런 비유가 존재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필리핀이나 인도에서 '영어 같아서 못 알아듣겠어요!'라는 표현이 생길 수 없다.

또한 그 언어가 계통적으로 아주 가까워서 배우지 않아도 대충 알아듣는다면 '정말 생경하다'는 비유로 그 언어가 쓰이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등 로망스언어들끼리는 천천히 말하면 대략은 알아듣기 때문에 서로의 언어를 '못 알아먹겠다'의 비유로 쓰지 않는다.

그 언어의 존재가 널리 알려졌지만, 공용어로 자리 잡지는 않을 정도로만 유명할 때 '이해 불가능'의 아이콘으로 인용된다. 그런데 전 세계 어느 언어를 뒤져봐도 '이거 한국어야'라는 표현은 없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의 의미로 '한국어 같네'라는 대사를 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영화 <디센던트>의 그 대목에서 예상치 못한 폭소가 터졌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이 한국인들이 꽤 많이 거주하고 있는 하와이였기에 가능한 대사였다.

한국어에도 외국어를 생경함의 비유로 쓰는 표현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현대판 이두, 꼬부랑 글씨,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 외계어, 솰라솰라... 이런 비유들 중에 외국어는 없다. 중국과 인접해 있는데도 '중국어 같아'라는 비유조차 없다(꼬부랑 글씨는 영어 및 알파벳으로 작성된 글에 대한 비유, 솰라솰라는 영어 또는 중국어 발음을 묘사한 의성어다. 솰라솰라는 중국어 '算了suanle'에서 왔다는 설도 있으나, 현재는 영어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좀 더 우세하게 쓰이고 있다. '못 알아듣겠어', '못 알아보겠어'라고 할 때 영어, 중국어가 비유로 쓰이기는 하지만 '영어 같아', '중국어 같아'라고 그 언어 이름 자체를 언급하는 표현은 우리말에 없다는 말이다. '소련말 하냐?'라는 표현이 잠깐 유행한 적은 있으나 이제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서로 어렵다고 갈구고 갈굼을 당하는(?) 물고 물리는 비유의 연쇄에 한국어는 끼어 있지 않다. 역시 한국어는 세계 언어 마을에서 '아싸'(아웃사이더)였던 것이 맞다.

한국어의 위상이 올라가고 한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전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래도 세계어(공통어, lingua franca)가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 어떤 언어가 세계어가 되려면 그 언어 사용 국가가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을 일으키거나, 장기간 세계 경제를 주름잡거나, 어떤 세계 종교의 종주국이 되는 등의 조건이 필요하다.

한국의 경제자본과 문화자본이 크게 성장하긴 했지만, 어떤 분야나 어떤 지역의 사람들이 한국어를 공통어로 삼는 현상이 가시권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세계사적 우연이 겹치고 겹쳐 한국어가 세계어가 되는 날이 몇 세기 뒤에 올까? 혹시나 그런 날이 오더라도 그 때의 한국어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일 것이다.
#한국어 #고립어 #외계어 #중국어 #그리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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