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12년 다닌 직장을 퇴사했습니다

평생 이 일만 하고 살기는 내 인생이 아까워서요

등록 2020.12.05 17:32수정 2020.12.06 16:05
1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마지막 출근길, 눈물이 났다. 값비싸기가 한없는 한 방울이로다.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환희의 눈물이다. 출근 길이 활주로처럼 느껴졌다. 이 길은 죄가 없으되 나로선 언제쯤 여길 그만 달리려나 했던 길이었다. '이대로 차 사고 나면 회사는 안 갈 수 있는데…'라는 생각까지 하곤 했던 길.

오래된 직장을 퇴사하게 된 용기가 대단하다고들 말하지만, 그보다 내 삶의 너무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고 있구나 싶었다. 이렇게 하기 싫은 일만 하다 죽을 순 없다는 절박함. 다른 삶이 절실했다. 아마 반대일지도 모른다. 직장에 맘이 떠난 것이 먼저이고 그래서 내 삶의 유한함을 깨달은 걸까. 서로 상호 상승작용을 한 것이 맞겠다.

본래 직장생활은 일단 출근이 9할이라는데… 나도 그럴 때가 있었다. 아니, 더 그 전에는 주말 출근이 일상의 낙(樂)인 적이(지금 생각하니 내가 미쳤었군). 그렇게 열정을 다 쏟아부어 원 없이 일한 시절, 그다음은 알람에 의지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서 차에 실어만 놓으면 어떻게든 퇴근은 오는 때도 있었는데... 길고도 긴 배배 꼬인 단장의 미아리고개 같은 직장 이야기.

아이고, 말 안 해도 척이면 척이지. 출근은 지겹고 퇴근은 지쳤다. 또 그 시절을 지나면 회사의 모든 게 죽을 만큼 싫어진다. 그 어떤 미련 1그램도 없게 된다. 바람 불고 날이 저무는 것과 같다.

이때가 그때다. 모든 직장인이 가슴속에 품고 다닌다는 그 사표, 그걸 써야 할 때. 오디션에서 심사위원이 슈퍼찬스 쓰듯이 사람 하나 살려야 하는 것이다. 재미없고 하기 싫은 것은 오래 하는 게 아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100년전, 일찍이 러셀 선생은 말씀하셨지. 하루 4시간만 일하라고~ ⓒ 황승희

 
그러려고 태어난 사람은 적어도 이 지구별에는 없는 게 좋지 아니한가. 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우리는 더 지나치게 부지런히 노동한다. 하루 4시간 노동이 적당하다는 100년 전의 러셀 선생을 끌어들일 것도 없다. 쉬고 싶다는 생각, 다른 삶이 절실했다.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편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33쪽

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일하는가? 독서를 하면서 바뀐 것이 있다면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하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이런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삿된 것을 몰아내고 본질로 접근하여 결국엔 자유를 선사한다. 물론 대화 상대로 하여금 답답함을 유발하는 단점도 있다.

그럼 이제 당장 수입은? 덜 소비하고 검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간적 자유와 신체적 자유를 선택하겠다. 사람들은 아직도 더 벌어야 한다며 계속 자유를 자꾸만 유예한다.

나는 그 사람들 통장에 있는 숫자에 놀라고 그 사람들은 나의 철없음에 놀란다. 대체 통장에 얼마가 있어야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수 있단 말인가. 게으를 권리가 훼손되는 정도까지 돈을 번다면, 그것은 망가진 삶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떠나니 몸이 아파 오는 걸까. 둘의 순서도 사실 헷갈린다. 뭐 딱히 순서에 의미가 있을까 싶다. 기대하지는 않지만 일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조금 줄이고 싶다는 것이 그렇게 대역죄일 리는 없지 않을까?

우리 회사의 근무 형태는 출근이냐 퇴사이냐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다.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 햄릿 정신이 곧 기업 정신이라고나 할까. 시간제 계약직이라든가 탄력근무, 선택근무, 재택근무 같은 선택지가 없다. 다양한 개인의 상황과 환경을 어느 정도 수용해서 근무 형태를 조금 유연하게 해주면 훨씬 효율적일 텐데. 계속 다니고 싶어 질텐데. 회사가 장난이냐고? 유연한 근무형태는 이미 대세이며 직원과 회사가 오래 같이 가고자 하는 상생인 것이다.

좌우지간, 조금 쉬고 싶으면 사표를 내면 될 일이고 일을 조금 줄이고 싶으면 퇴사를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 까짓 거 일을 조금 줄여서 모해? 아예 관두고 푹 쉬자. 내가 당최 언제 쉬어 봤어? '다음 밥벌이는 마련해놓고 관둬야 되는 거 아냐?'라는 친구들 말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처럼 하나마나한 말 아닐까.

일단 지금 살고 봐야 하니까. 놀면서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맞다. 직장 안에서는 새로운 생각이 있을 수 없다. 그럼, 퇴사하고 뭐할 거냐고? 나, 끝내주는 자유와 함께 멋진 백수가 되겠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새로운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나서는 특권을 누리겠어.

 

결재판 저 결재판으로 커피 참 많이 날랐습니다. ⓒ 황승희

 
일필휘지로 사표를 썼다. 쓰는 것은 쉬우나 말하는 것이 어려울 줄이야.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기도 먹어 본 놈이 잘 먹는다고. '회사도 따위 자주 때려치워 봐야 이것도 할 만해지겠구나'라고 혼자 농담이 나왔다. '사표 결제 바랍니다.' '저 회사 관둘까 하는데요.' 어떤 말도 입에 잘 안 붙었다.

지난 밤 연습도 했지만 커피 5잔까지 올려서 나르던 결재판이 철판떼기처럼 무거웠다.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맛 본 곳이고 또한 내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기반도 되어준 직장. 이젠 이별이다. 막연히 상상했던 사표 장면이 있었다.

내 꿈을 담기에 이 조직은 너무 보잘 것 없었다는 말은 생략하더라도 빙벽을 마주한 지난날의 처절함, 유리 천장의 부당함과 부서장의 업무상 불만, 이 모든 것을 낱낱이 적어온 노트를 장계 상소를 펼치듯 하여 소상히 죄다 밝히고 목젖이 휘둘리도록 고래고래 분노해 주고, 진상 규명, 관련자 처벌을 요구하고, 대표는 석고대죄하며 나를 만류하고, 역시 이 모든 것을 뒤로하고 멋지게 보란 듯이 걸어 나오는… 에고, 의미 없다.

아무튼 칼을 빼어 든 이상, 험난한 다음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면담과 후임자 문제와 인수인계 문제가 꼭 쉽지만은 않았다. 그 이야긴 다음 회에 하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조기 은퇴 후, 돈 안 되는 텃밭농사꾼. 최소한의 벌이만을 위해 노동하는 백수형 프리랜서.

AD

AD

인기기사

  1. 1 윤석열 총장, 이게 다 쇼였나
  2. 2 공교롭고도 낯뜨거운 '윤석열 단독'
  3. 3 연금에 적금 깨고 빚내서 주식했습니다, 결과는요
  4. 4 박근혜 탄핵 후에도, 매년 100억 받으며 돈 쌓는 이 재단
  5. 5 로고만 싹 잘라내고... '상습 표절' 손씨, 오마이뉴스 사진도 도용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