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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사는데 질서는 20세기"... 노회찬의 죽비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②-2 : 비례 8번 노회찬

등록 2020.12.10 09:06수정 2020.12.1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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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을 선보인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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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월 '오마이뉴스'와 인터뷰 중인 노회찬. ⓒ 이종호


[지난 기사] 노회찬은 왜 '비례대표 후보 8번'이었을까 에서 이어집니다.

'비례대표 8번 노회찬'의 배경

비례대표 '8번' 노회찬. 사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결과였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됐을까? 그 영향의 정도에 대해 섣불리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 당원의 지적처럼 '1인4표제'의 영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004년 2월 14일 밤 대구에서는 민주노동당 내 양대 계열(평등파와 자주파 계열 또는 범좌파와 자민통 계열)의 하나인 '평등파' 내의 이른바 '17인 모임'이라는 것이 열렸다. 17명이 모여 논의했다고 해서 붙여진 17인 모임은 이후 노동운동 내 '전국조직추진위원회'(민주노총 '중앙파' 계열)와 함께 '전진'이라는 민주노동당 내 정파그룹을 결성한다.

'17인 모임'은 당내 '범좌파'들의 모임이다. 2003년 9월 당발전특별위원회에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발전하자"는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모인 것이 계기가 돼 한 달에 한 번꼴로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 민주노동당 각 광역단위의 주요 좌파 활동가들과 민주노총 '중앙파'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으나, 네트워크 수준의 모임이었기에 의결집행기능은 약했다.

경기동부, 인천, 울산 등 3개의 지역연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자민통' 계열과 달리 범좌파 계열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학생운동 출신의 화요모임, 민주노총 중앙파 등 서로 다른 경험과 노선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수평적 분포도가 넓었다. 이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17인 모임'이고, 이 '17인 모임'의 다수가 참여해 만든 조직이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이다(정용상, '누구도 그렇게 많이 당선될 줄 몰랐다', <매일노동뉴스>, 2005.8.16.).

2월 14일 대구 모임의 주제는 '비례대표 경선에서 누구를 조직적으로 지지할 것인가'였다. 단병호(전 민주노총 위원장)와 심상정(전 금속노조 사무처장)은 이미 지지 후보로 사실상 결정됐기 때문에, 이날의 쟁점은 노회찬을 지지 후보로 결정할지 말지였다. <매일노동뉴스> 정용상 기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정파, 움직이기 시작하다-최초의 당원직선 비례대표경선... 모두가 승리했다', <매일노동뉴스> 2005.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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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3월 15일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로 선출된 뒤 기자회견을 가진 심상정 중앙의원. 뒤로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보인다. ⓒ 김진석

  
민주노총 중앙파와 진정추 쪽은 단병호, 심상정, 노회찬 이렇게 3명을 지지 후보로 결정하자는 의견이었고, 이에 대해 화요모임 쪽에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당시 화요모임 쪽에서는 "지난해 10월 중앙위에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의 계승'에 대한 안건 처리과정에서 노 총장은 좌파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면서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진정추 쪽과 '중앙파' 쪽 사람들이 중재 노력을 했지만 무산되고, 화요모임은 급기야는 '표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 결국 노회찬은 17인 모임이 조직적으로 지지하는 후보에서 빠졌다.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은 "그 모임에서 다신 내 이름을 거론치 마라"고 전했다.

결국 17인 모임은 일반명부 한 표는 단병호 후보, 여성명부 한 표는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지만 나머지 한 표씩은 자율에 맡겼다. 범좌파의 '나머지 한 표'는 지역별로, 성향별로 나눠졌다.

실제로, 평등파 쪽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노회찬은 비례대표 경선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비례대표 8번 후보로 결정됐다. 만약 조직적인 지원을 받았다면 비례대표 순번을 좀 더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노회찬의 정치적 판단과 이해관계에 부합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 노회찬은 이렇게 회고한다(<매일노동뉴스> 2005.8.19.).

"경선에 나서는 입장에서 지지해주겠다고 하면 거절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란이 있다면 굳이 기대고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가서 잘 보이고, 설득하면서 지지를 호소할 입장도 아니었고, 선대본부장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내 등수 올리기에 주력할 상황이 아니었다."

취재 결과 정용상 기자는 비례대표 경선과정에서 각 정파의 "후보군이 형성되긴 했지만 확고부동하진 않았던 것으로 분석된다"면서 독식을 의도한 '세팅선거'는 없었다고 결론짓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각 정파그룹의 선택을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경선 당시, 당권자는 2만2525명, 투표율은 60.6%였다. 실제 투표한 사람이 1만3639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승패의 핵심 관건은 '조직'이었다. 결국 정파의 지원과 당원 일반 정서상의 지지, 이 두 가지를 모두 얻어야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앞 순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명확한 것은 진정추 외에는 노회찬을 조직적으로 지지하는 쪽은 민주노동당 내 정파나 민주노총 정파(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가운데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 대목이 60.6%(1만3639명)의 당원이 참가한 투표에서 일반명부 1인2표임에도 불구하고 노회찬이 11.8%(3048명)의 득표로 비례후보 8번을 받게 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노회찬에 대한 비토와 민주노동당 내의 '정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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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 14일, 권영길 대표 등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선거를 하루 앞두고 연 기자회견에서 '부패한 야당, 무능 야당을 교체하는 진보야당이 되겠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천영세 선대위원장, 노회찬 선대본부장, 이문옥·단병호·심상정·송경아·최순영 비례대표 후보와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문경식 전국농민회 총연맹의장, 윤금순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의장, 김흥현 전국빈민연합 의장 등이 참석했다. ⓒ 이종호

 
노회찬에 대한 견제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것이 2002년 3월 16일 민주노동당 '2002년 정기 당대회' 사무총장 선거에서였다.

624명 대의원 가운데 430여 명이 참가한 2기 대표단 선거 결과, 경선으로 치러진 당대표 선거에는 권영길 후보가 294표를 얻어 정윤광 후보(131표)를 163표 차로 제치고 당 대표로 재선됐다. 부대표 선거에서는 최순영(403표), 김태일·김혜경(379표), 천영세(360표) 후보가 당선했다. 신임 사무총장에는 단독 출마한 노회찬 전 부대표가 찬성 296표를 얻어 당선됐다.

경선이 아니었던 부대표와 사무총장 득표수를 들여다보면, 많게는 107표, 적게는 64표 차이가 났음을 알 수 있다. 왜 그랬을까? "전설적인 사무총장이 되겠다"고 당선 소감을 피력한 노회찬에 대한 견제가 당 대의원 가운데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찬성표를 던지지 않은 130여명의 대의원들은 어떤 생각과 판단을 갖고 있었을까? 그것이 당내 정파에 의한 조직적 비토인지 아니면 노회찬의 정치적 부상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다.

"현재의 퇴행적 정파운동으론 당 미래는 없다."

창당한지 1년이 채 안된 2000년 12월 16일 <진보정치> 특집 좌담이 있었다. 주제는 '2000년 민주노동당 평가와 전망: 현재의 퇴행적 정파운동으론 당 미래 없다'로, 참석자는 김태현(민주노총 정책기획실장), 노회찬(당 부대표), 이용길(당 충남지부 위원장), 조희연(참여연대 집행위원장)이며, 사회는 이광호(당 기관지 편집위원장)가 맡았다.

노회찬은 2000년 총선에서의 울산북구를 평가하며 이렇게 언급한다(노회찬은 총선평가위원장을 맡아 5월의 4차 중앙위원회에 위원회 이름으로 평가시안을 작성해 제출한 바 있다).

"총선 교훈의 핵심은 종파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당의 이익보다 자신의 종파를 앞세운 종파주의가 후보선정과정, 후보자 확정 이후 당에 해악을 미쳤다. 이는 의석 한 석을 얻지 못한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도 여러 계기에 다시 표출될 수 있다.

진보정당 내에 견해를 달리하는 여러 정파가 존재할 수 있는데 현존하는 정파들은 태생적인 성격에 비추어볼 때 어떤 정파나 정파연합도 당의 장래를 책임질 수 없다. 정치적 쟁점과 지형 등 운동의 상황은 과거와 달라졌는데 그들은 과거의 인맥에 의해 유지되는 퇴행적이고 과거지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보수정치판의 지역할거주의를 연상케 하고 있다. 당의 미래는 현재의 정파 운동에서 찾을 수 없다. 아직 미래지향적인 정파는 형성되지 않은 상태다. 우리 당의 미래는 현재의 정파가 아니라 건강한 당원들의 어깨 위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 16대 총선 울산 북구 후보 경선 및 인준과정에 대해 당시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두 가지 입장이 대립했다. '민주적 절차로 위장한 사기극' '선거 참패 위기 자초한 종파주의'등 비판적인 입장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민주적 절차에의 승복' '적전 분열을 중단하고 대승적 차원에서의 결단'이라는 이름 아래 결정을 따르라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중앙위원회에서, 최용규 후보 인준안에 대해 투표 결과 재석 65명, 찬성 40명, 반대 24명, 무효 1명으로 통과되고 선거 후에 전반적인 평가를 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일시적으로나마 봉합되었다.

총선 이후 열린 임시당대회에서는 울산북구의 후보 선출에 대해 "당의 16대 총선 목표와 당내민주주의, 어느 쪽에도 부합하지 않는 심각한 종파적 행위였으며 불공정한 행위를 저질렀다"는 평가를 내렸으며, 이어 열린 당기위원회가 관련 당사자들에게 중징계 결정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됐다(조현연, '민주노동당의 분당과정 연구-정파·제도·리더십을 중심으로', <기억과 전망> 20호, 2009).

2000년 16대 총선 당시 울산북구 상황이 종파주의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 노회찬은 2003년 9월 당 기관지 <진보정치>(149호, 2003.9.29.)에 특별기고를 싣는다. '새로운 정파질서를 위하여'라는 글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2004년 17대 총선을 앞두고 정파연합당인 민주노동당의 종파주의적 폐해에 대한 심각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민주노동당 내의 정파와 종파에 대한 노회찬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는 글이기 때문에, 주요 내용을 발췌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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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149호(2003.9.29.)에 실린 노회찬 특별기고 '새로운 정파질서를 위하여'. ⓒ 진보정치

 
"민주노동당은 정파연합당이다. 민주노동당의 태동은 확실히 정파연합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불가피한 역사적 산물이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에서의 문제는 정파 간의 담합이 아니라 정파 간의 불건전한 대립과 비생산적인 긴장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그리고 이런 현상의 근원은 현재 민주노동당 내에 조성되어 있는 정파 질서가 구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당은 21세기에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는데 당내의 정파질서는 20세기적 사고와 전망에 갇혀 있는 것이다."

"정당 내부의 분파 즉 정파는 정파간의 생산적인 경쟁과 함께 당의 중앙권력과 건강한 긴장관계를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지금의 정파질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현재의 정파질서가 갖는 가장 큰 문제는 그것들이 민주노동당의 현재와 미래의 과제를 중심으로, 그것을 해결해가는 방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정파질서는 과거의 인연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소위 엔엘과 피디란 무엇인가? 그것은 80년대에 한국사회의 혁명전략을 둘러싸고 나뉘어진 정파대립질서가 아니었던가?"

"모든 조직의 생존논리가 그러하듯 정파 역시 확대재생산 될 때야 만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엔엘-피디의 낡은 정파체제는 현실이 보여주듯 각종 운동권 활동 경험자들을 재조직화할 뿐 대중적 조직화로 나아갈 수 없다. 현재의 과제와 미래의 전망을 둘러싼 경쟁과 대립구도가 아닌 낡은 정파질서는 과거의 인연을 재생산하는 '운동권 동창회'를 넘어서기 힘들다. 그리고 이 동창회 바깥에, 낡은 정파질서에 염증을 갖는 70~80%의 건강한 당원들이 놓여 있는 것이다."

"대체로 정파는 정당에 비해 그 규모가 작은 반면 인적 친밀도가 높다. 타 정파와의 일상적 경쟁관계 때문에 결속력 또한 높다. 이같은 정파의 강점은 자기정화 기능의 상실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를 낳기 쉽다. 특히 낡은 전략, 낡은 학교관계, 낡은 서클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파의 경우 조직보존 혹은 조직확장의 논리 앞에 자기정화 기능은 무력화되기 쉽다. 당의 공적 이익보다 정파의 사적 이익을 우선시하는 종파주의의 근원도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 전략거점을 당 바깥에 둘 경우 이런 종파주의의 폐해는 더욱 심각하게 나타날 수 있다."

"민주노동당 이전의 운동경험과 조직관계는 각자의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만 남아야 한다. 이미 물질화된 낡은 관계들은 당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형체도 없이 녹아야 한다. 그리고 민주노동당이 당면한 현재의 과제와 미래의 전망을 둘러싸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자.

어떠한 관계도 대중에게 설명하기 어렵다면 맺지 않는 것이 좋다. 당의 이익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있다면 당 바깥에서 도모하는 것이 옳다. 낡은 정파에 대한 염증이 당의 미래에 대한 기대를 뒤덮게 하지 말자. 당의 이익을 중심으로, 당면 과제를 중심으로, 대중의 눈높이에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실천하고 검증하자. 올바른 당 활동만이 올바른 정파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갈 것이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②-3]으로 이어집니다(바로 읽기 클릭)
#노회찬 #노회찬재단 #비례대표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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