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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계파'라는 단어가 없었던 배경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②-3 : 17대 대선예비후보 노회찬

등록 2020.12.10 09:06수정 2020.12.10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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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을 선보인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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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선을 앞두고 '진보정치'에 실린 민주노동당 예비후보 3인(권영길, 노회찬, 심상정)의 모습. ⓒ 진보정치

 
[지난 기사] "21세기 사는데 질서는 20세기"... 노회찬의 죽비 에서 이어집니다.

2007년 17대 대선과 민주노동당 경선, 세 후보 간의 차별화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에서는 심상정(3.7.), 노회찬(3.11.), 권영길(4.5.) 순으로 출마 선언이 이뤄졌으며 최종 후보 등록도 세 명이 했다. 범좌파 계열의 당내 정파인 '해방연대'에서 6월 30일 이갑용(전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총 '현장파')을 후보로 추대했으나, 이갑용은 대통령 피선거권이 없어 당 선관위에서 후보 등록을 거부했다. 이갑용 측은 노조원들을 위해 투쟁하다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것인 만큼 자신의 후보 등록을 받아줘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당내 이른바 자민통 그룹이 권영길 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상태(전국언론노조, <언론노보>, 438호, 2007.8.14.)에서, 경선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세 후보 간의 차별성도 두드러졌다. 경륜과 통합적 리더십을 강조한 권영길 후보는 '진보대연합의 교두보, 100만 민중대회'를 통한 진보적 정권교체를 호소했다. '강한 민주노동당'과 '세박자 경제'를 앞세운 심상정 후보는 정책적 우위를 강조, '대표선수 교체론'을 역설했다. 특유의 대중성을 무기로 한 '본선 경쟁력'을 내세운 노회찬 후보는 6공화국 해체와 '제7공화국 건설'을 핵심공약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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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331호(2007.7.9.~7.15), 333호(2007.7.23.~7.29), 334호(2007.7.30.~8.5)에 실린 권영길, 심상정, 노회찬 민주노동당 대선 예비후보들의 광고. ⓒ 노회찬재단

 
노회찬의 '2007 새세상 선언'과 '제7공화국 건설'

"노회찬은 당을 진두지휘하는 사람이었다. 노회찬은 사무총장을 하면서 당의 방향과 전략을 정돈하고 바른 길로 이끌어 원내 진입이란 성과를 만들어내지 않았던가. 나 역시 그때의 노회찬처럼 진보정당의 오랜 침체기를 종식시키고 일대 도약의 성취를 일궈내는, 그런 역할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당 사무총장 출신인 신장식 변호사가 책에 쓴 글귀다(<함께, 노회찬>, 있는그대로, 2019). 신장식의 말처럼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일을 하면서 진보정당 '사무총장'의 전형을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17대 국회 초선의원으로서 노회찬은 의정활동의 모범을 보인 정치인이었다. 그에 따라 대중적 인지도는 높아져갔다.

2007년 1월 <진보정치>와 사회동향연구소가 긴급 실시한 당원 여론조사 결과, '가장 적합한 대선후보'의 경우 1위는 노회찬(38.7%), 2위는 권영길(36.8%), 3위는 심상정(10.8%), 4위는 문성현(5.8%) 순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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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정치 309호(2007.01.29.~02.04)에 실린 기사 '노회찬, 권영길 오차범위서 1위 접전' 기사. ⓒ 진보정치

 
이런 지지를 바탕으로 노회찬은 2007년 3월 11일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당내 경선 출마 기자회견을 한다. 출마 선언문 제목은 ''새세상을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 '2007 새세상 선언''으로,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라는 정치경력을 쌓는 것이 아니라, '진보정당 집권의 꿈'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천명했다.

'새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약칭 '새 꿈들') 87인은 인터넷 등을 통해 공개모집했는데, 여기에는 환경미화원·보험설계사·비행기 조종사·대리운전 기사·잠수부·벤처캐피탈리스트·넥타이 디자이너·성전환자·87학번·87년생·2007년 출산 예정 임신부 등 다양한 직군·계층의 시민들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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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출마를 선언한 노회찬 의원과 '새꿈들' 87인. ⓒ 노회찬재단

 
7월 17일 노회찬은 중앙선거대책본부 출범식에서 '제7공화국 건설운동'을 선포하면서 노회찬식 미래 비전이자 공약이라 할 '제7공화국 11테제'도 발표한다. 노회찬은 출사표에서 "국민과 소통하면서 집권 가능한 정당을 만드는 것이 당 혁신의 핵심"이라면서 집권의지를 특히 강조했다.

"민주노동당은 문제제기형 정당을 넘어섰다. 민주노동당은 문제를 해결하고 책임지는 정당이 돼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집권을 해야 한다. 집권이 최종 목표가 아니라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 최종 목표지만,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집권해야 한다. 밥을 먹을 때도, 물을 마실 때도 이게 집권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또한 노회찬은 당내 정파들을 향해 이렇게 호소했다.

"민주노동당의 최종 목표인 세상 바꾸기가 정파의 목표보다 우선한다면 민주노동당의 집권 역시 정파의 이익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다. 집권을 위해서는 정파의 중심성보다 당의 중심성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집권을 위한 연합체가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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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선 당시 노회찬 민주노동당 대선 예비후보 중앙선거대책본부 출범식 당시 모습. ⓒ 노회찬재단


노회찬이 다른 두 후보에 비해 갖는 강점은 대중적 지지에 바탕한 '본선 경쟁력'이었다.

8월 16일 노회찬은 기자간담회에서 현재의 당내 경선 판도와 관련해 "세 후보의 여론조사에서 내가 모두 1위를 차지한 것을 알고 있지만 1~2위 순위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며 "허장성세를 부리고 싶지 않다. 당초 목표는 1차에서 끝내는 것이었지만 결선까지 갈 가능성이 크다. 1차투표와 결선투표에서 내가 모두 1위를 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정제혁 기자, '이번 경선은 '노회찬이냐, 아니냐' 싸움', <레디앙>, 2007.8.16.).

2007년 8월 1일 심상정 캠프에서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노회찬 후보가 35.5%, 권영길 후보가 31.9%, 심상정 후보가 22.5%라는 결과가 나왔다(전국언론노조, <언론노보>, 438호, 2007.8.14.).

노회찬은 "나는 특정 정파에 속해 있지도 않고, 거대 대중조직 출신도 아니다"면서 "지금 바닥의 표심을 보고 나도 놀라고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어 "(나에 대한) 지지는 내 인기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 정파 독식 구도, 과열된 정파구도라는 기존의 흐름에 대한 반란"이라며 "당을 살리고 당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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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민주노동당 17대 대선 예비후보의 홍보자료. ⓒ 노회찬재단

 
그는 "줄세우기식 투표의 영향력이 크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면서 "지지자들에게 나를 지지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개인적 선호도 때문이 아니라 당을 확대하고 강화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라고 답한다"고 부연했다. 노회찬은 후보 선출의 기준으로 '본선경쟁력'을 제시해 "같은 총을 들고 나가도 적중률이 다르다"면서 "국민과의 소통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민주노동당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면서 "내가 당의 변화와 혁신을 상징한다"고 주장했다(정제혁 기자, '이번 경선은 '노회찬이냐, 아니냐' 싸움', <레디앙>, 2007.8.16.).

그러나 노회찬의 이런 바람은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다. 노회찬은 1위와 2위가 겨루는 결선투표에도 오르지 못했다. 2007년 9월 9일 민주노동당 중앙선관위는 3만8856명이 투표해 77.8%의 투표율을 기록한 17대 대선 후보 경선 개표 결과를 발표한다. 권영길 후보(1만9053표, 49.37%), 심상정 후보 (1만64표, 26.08%), 노회찬 후보(9478표, 24.53%).

'아름다운 경선' 약속과 '노회찬 죽이기' 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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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17대 대선후보 선출대회(2007.9.9.). ⓒ 민주노동당

 
여론조사 1위였던 노회찬이 결선투표에조차 오르지 못한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었을까?

사실 한나라당 경선과 대비되는 '아름다운 경선'을 선언했던 민주노동당의 당내 경선이 전국 순회 투표 초반부터 혼탁 양상을 보였다. 특히 권영길과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이고 있는 노회찬에게 출처불명의 악의적 비방 동영상, 과거 전력에 대한 검증 요구가 집중됨으로써 '노회찬 죽이기'가 시작된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낳으며 파문이 일었다(최병성 기자, '"노회찬은 제2의 박홍", 네거티브 파문-악의적 '노회찬 죽이기' 만연, 노 "'보이지 않는 손'이 공작"', <뷰스앤뉴스>, 2007.8.22.).

전국 순회 경선 투표가 시작되자마자 8월 20일과 21일 당원게시판에는 경선 직전 각 캠프의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차지한 노회찬과 관련된 2개의 비방 동영상이 잇따라 올라왔다. 20일 동영상은 '무등산광주'라는 ID의, 제목은 '대중투쟁을 폄하하는 노회찬 후보'였다. 동영상은 노회찬이  2002년 미선이·효순이 집회와 관련해 "10만 명이 모이지는 못했지만 국민들을 감동시켰고 촛불집회는 성공했다"는 발언 중 일부만 인용해 '미선이·효순이 집회도 10만 명이 모이지 않았다'라고 발언한 것처럼 의도적인 '거두절미' 편집을 했다.

8월 21일에는 더 악의적인 비방 동영상이 올라왔다. '노회찬 의원, 진실은 무엇입니까'라는 제목의 3분짜리 동영상(https://youtu.be/HixtyoobSi8)은 1994년 7월 박홍(서강대 총장)의 주사파 발언으로 촉발된 공안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 진정추 대표였던 노회찬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일부 주사파 학생들의 친북통일운동은 한마디로 시대착오"라며 당시 학생운동권 일부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동영상은 이어 "노회찬 인터뷰가 실렸던 날, 정부는 범민족대회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영장 발부"라는 자막을 싣는 동시에 당시 구속사례를 줄줄이 열거해, 마치 노회찬의 '주사파' 비판 발언을 계기로 공안정국이 초래된 것처럼 몰아갔다.

나아가 동영상은 중반 이후부터는 박홍과 노회찬의 발언들을 인물 사진과 함께 한 장면에 담으며 노골적으로 노회찬을 '제2의 박홍'으로 몰아갔다. 문제의 동영상은 당 게시판뿐만 아니라 민주노총, 한국진보연대 등 기타 진보단체에도 비슷한 시각에 게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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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당원게시판에 게시된 노회찬 의원 비방 동영상 화면 갈무리. ⓒ 민주노동당

 
<레디앙>에 기고된 '당이 망해도 좋으면 네가티브를 하라'(2007.8.23.)는 이렇게 지적한다.

"암담했다. 혁명적 영화작가 에이젠쉬타인의 몽타쥬 편집기법이 나치 괴벨스와 조중동에 스며든 것처럼 민주노동당 내에도 이런 파렴치한 네가티브를 '무등산광주'라는 거룩한 필명으로 휘두른다는 게 안타까움이나 분노를 넘어 암담한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노회찬이 살아온 삶의 전체 궤적은 증발했다."

"네가티브 선거전은 당원들에게 환멸을 부추긴다. 이전투구=투표율 저하, 당이 망하거나 말거나 평당원의 애당심을 꺾고 결국 당에 등을 돌리게 만듦으로써 투표율을 떨어뜨리고 조직표만으로 등극하고자 하는 야망을 불태운다. 상대 후보가 그렇게 너절한 후보라고 믿게 만들었는데 정작 그 후보가 지명이 되면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겠는가? 역으로 네가티브로 만신창이가 된 후보의 지지자들의 원한은 또 어떻게 달랠 것인가? 네가티브는 예비선거전에서부터 당을 분열시키고 정작 본선에서는 다수의 동력을 상실하게 만드는 해당행위다."


악의적인 '노회찬 죽이기'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8월 20일 한 당원은 당 기관지 <진보정치> 355호에 실린 후보자 검증 지상청문회와 관련해 노회찬 선본이 '편파적인 음해성 질문'이라며 삭제를 요청했던 질문내용을 공개했다(당시 <진보정치>는 이전과 달리 비판기능을 갖춘 건강한 언론매체라기보다는, 특정 정파에 의해 장악된 당 홍보지로 전락했다).

문제의 질문은 2004년 노회찬이 당 사무총장 재임시절 대표이사로 재직했던 '레이버텍'이라는 회사가 당의 인터넷 투표관리 시스템을 수주하면서 불거진 공정성 논란이었다. 논란의 핵심은 당시 노회찬이 당3역인 사무총장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당의 인터넷 관리 시스템을 자회사를 통해 관리하면서 스스로 비례대표 투표에 참가했다는 것. 질문이 공개되자 당 게시판에는 노회찬을 비판하는 수십여 개의 글이 올라왔고 노회찬에 대한 지지 철회를 표명하는 댓글이 폭주했다.

이에 대해 노회찬 선본은 당 게시판 공식 발표를 통해 "당 전자투표시스템은 당 조직국에서 노 후보가 대표로 있던 매일노동뉴스 인터넷팀에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며 "실제 투표과정에서 서버관리를 당 인터넷위원회에서 진행하였기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사실 부당한 내부자거래가 있었다면, 당은 프로그램만 1000만~2000만 원 하는 것을 단돈 200만 원에 거래했고, 노회찬은 그마저 120만 원으로 깎아주라는 '부당한' 압력까지 가한 '희한한 내부자 거래'가 있었을 따름이었다.

8월 22일 노회찬 선본 캠프는 당 대선준비위와 중앙선관위에 보낸 공문을 통해 ▲신원불명의 당원이 노회찬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괴문서를 기자들에게 배포한 경위에 대한 조사 ▲음해성 동영상과 글에 대한 조사 ▲진보정치 정보공개와 관련된 과정 등 세 가지 의혹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이 가운데 '민중투쟁을 폄하하는 노회찬 후보'라는 동영상의 출처와 관련, 노회찬 선본은 첨부자료에서 "당시 영상이 올라간 서버는 mms://media.cast.or.kr/rhkd/프로젝트.wmv였는데, 이 서버에 영상을 올린 곳은 '광주지역 노동자문화운동연합(광문협) 영상패' 계정이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8월 30일 민주노동당 중앙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백현종)는 노회찬 선본이 진상조사를 요구한 '민중투쟁을 폄하하는 노회찬 후보' 동영상의 음해성 왜곡 여부와 관련, "악의적 조작과 왜곡의 의도를 갖고 편집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결론 내고 문제를 종결지었다. 이어 노회찬을 박홍에 비유한 '노회찬 의원, 진실은 무엇입니까' 동영상에 대해선 "악의적으로 편집된 동영상"으로 규정짓고 "게시자 및 유포자를 찾아 책임을 묻겠다"고 결정했다. 선관위의 결정은 노회찬 선본이 진상조사를 요구한 3개항 가운데 일부만을 수용한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중앙선관위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어쨌든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긴 채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어허... 어허... 거...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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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8월, 노회찬 민주노동당 대선예비후보가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할 당시 모습. ⓒ 이종호

 
여론조사 1위 자리를 지켰던 노회찬 후보가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한 배경에는 이런 일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정파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쪽만이 아니라, 바깥에 있는 평당원들의 표심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평당원 혁명이나 본선경쟁력에 대한 판단 등이 선거의 기준이 되는 게 우리의 희망사항이었는데 정파와 연고를 넘어선 잣대를 각인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노회찬 선본 관계자의 인정처럼 노회찬의 패배에는 물론 선거전략과 메시지 관리 등 다른 요인도 있었다. 그럼에도 사실 정파선거, 조직선거는 언제부턴가 민주노동당의 거의 모든 선거에서 상수였다.

2007년 노회찬 캠프에서 활동했던 나경채는 훗날 이렇게 회고한다(나경채 페이스북, 2019.3.25.).
 
2007년 민주노동당은 그해 겨울 예정된 대선의 후보를 선출하는 절차에 돌입했다. 나는 당시 노회찬 후보의 선거운동에 함께했다. 선거는 힘들었다. 노회찬 후보에 대한 거짓 흑색선전이 난무했었다.

노회찬 후보가 마치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당한 신효순 심미선 추모 촛불집회를 폄훼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는 동영상이 나돌았고, 곧이어 서강대 박홍 총장과 함께 노회찬 의원이 반주사파 색출을 위한 공안정국을 만든 것처럼 책임을 씌우는 동영상도 뿌려졌다. ... 2007년 당시에 노회찬 후보는 권영길, 심상정 후보에 이어 3위로 낙선했다. 선본은 흑색선전과 비방전을 당해내지 못했다.

선거가 마무리되고 선거운동에 열성이었던 사람들이 허름한 냉면집에 모였다. 노회찬 의원과 김지선 선배도 당연히 자리를 함께 했었다. 다소 무겁지만 홀가분한 자리였는데, 노회찬 의원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동지들 모두 헌신적이었고, 빛나는 선거운동을 해주었습니다. 이 결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을 탓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그는 이 선거의 결과가 당 안에 심각한 생채기를 남길 것을 걱정했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우려를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을 내비쳤다. 함께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노 의원의 말허리를 잘라먹고 기어이 한마디했다.

"왜 이것이 당신 때문입니까? 저 사람들의 비겁한 선거운동을 이번에도 넘어가실 겁니까? 매번 그러니까 당하는 것 아닙니까?"

노 의원은 다른 말을 하지는 못했고, 연신 그저 '어허~~'라는 말만 내뱉었다.

"어허... 어허... 거... 참"

이 말이 아닌 단어들은 그 뒤로 내가 노회찬 의원을 생각할 때면 맨 먼저 떠오르는 말이었다. 어허... 어허...

결선투표에 오르지 못한 노회찬은 "저와 심상정 후보의 표는 당의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표"(9.10. KBS '9시뉴스' 출연 발언)라며 심상정 후보 지지를 표명한다. 2007년 9월 15일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결선투표 결과, 권영길은 1만9109표, 52.74%, 심상정은 1만7122표, 47.26%를 획득, 권영길은 민주노동당 17대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

이명박 후보의 압승이 예상되는 가운데 치러진 17대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권영길이 받은 득표는 71만2121표(3.01%)였다. 노무현 후보(48.9%)와 이회창 후보(46.6%)가 접전을 벌였던 2002년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득표는 95만7148표(3.93%)였다. 그리고 얼마 후 민주노동당은 분당되고 만다.

만약 17대 대선 민주노동당 후보로 노회찬이 출마했다면 과연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됐을까? 부질없는 상상이겠지만...

"계파의 유혹... 그러나 그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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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0일 '안성집'에 모인 사람들. 노회찬을 추억했다. ⓒ 노회찬재단

 
날씨도 을씨년스런 2020년 6월의 어느 날. 2007년 대선에서 노회찬을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만들기 위해 뭉쳤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여섯 명이 을지로 '안성집'에 모였다. 박치웅, 윤영상, 이연재, 이재기, 임성대, 정호진 그리고 노회찬재단의 김형탁(사무총장)과 박규님(운영실장). 노회찬재단이 <한겨레> 이인우 기자와 함께 진행하고 있는 '음식天國 노회찬'을 위한 자리였다(이인우, '노회찬 "어떻게 만든 진보정당이냐": [음식天國 노회찬] <11> 을지로 <안성집>', <프레시안>, 2020.7.4.).

오랜만에 만나 술 한 잔 서로 기울이며, 당시를 돌아보는 사람들... 이 자리에서 나온 개개인들의 몇몇 소회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번 기록 연재를 마무리한다.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병폐는 고질적인 정파주의였다. 알고 있다시피 민노당은 이념 성향으로는 크게 민중민주(PD) 계열의 평등파, 민족해방(NL) 계열의 자주파로 나뉘고, 여기에 민주노총과 전국연합(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 등이 들어와 있었다.

창당은 노회찬 등 인민노련 계열이 주도했지만, 당내 다수파는 나중에 합류한 민족해방(NL) 계열이었다. 일찍이 진보정당건설 노선으로 전환한 민중민주(PD) 계열은 운동조직의 외피를 거의 벗은 반면, 반독재민주화투쟁의 80년대식 운동노선을 고수한 민족해방(NL)계는 조직을 거의 그대로 유지한 채 당에 들어왔다.

민주노총도 국민파와 중앙파 등이 계파별로 뭉쳤고, 전국연합은 지역별로 뭉쳤다. 그러다 보니 각종 당내 인선이나 정책 결정에서 암암리에 조직투표가 횡행했다. 인물이나 정책보다 어느 계파냐가 사안을 결정하는 관건이 되기 일쑤였다. 일찍이 노회찬은 이런 당내 정파주의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진보정당의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그래서 그 자신은 계파를 만들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노회찬을 진보정치의 미래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투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노회찬을 비롯한 진보정당 건설론자들은 비합법 운동이 합법 정당으로 전환하면 과거 운동의 관성을 과감히 버리고 당 중심으로 사고하고 활동해야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대개 민중민주(PD) 계열들은 80년대식 조직 운동 방식을 버리는 쪽으로 전환한 반면, 민족해방(NL)계는 80~90년대식 운동방식이나 노선을 고수했다. 이런 차이가 조직투표가 가능한 정파와 그렇지 못한 정파의 차이를 낳았다. 즉 노회찬 진영은 운동권 정치의 극복을 진보정당 발전의 조건으로 본 반면 당시 민족해방(NL)은 운동의 연장선에서 정당 정치를 운용하려 한 차이였다고 생각한다."

"노회찬이라고 왜 계파의 유혹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는 과거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보통사람 같으면 배신감이나 원망 때문에라도 옛날 같은 조직방식으로 돌아갔을 텐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 그가 말했다. '진정으로 운동의 대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과정(계파 갈등)은 기꺼이 이겨내야 한다. 이 과정을 돌파하지 못하면 그것이 우리 역량의 한계이고, 우리 운동에 최종적 실패가 있다면 바로 그 지점이다'라고."

"지역 순회 투표를 할 때, 우리 지역에서 중간 리더급 수십 명을 노회찬과 연결시켜 주려고 그에게 직접 지지 전화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었어. 그런데 노회찬이 그걸 하지 않았어. 그러면서 방송이나 인터뷰에 나와 대선후보로서 민노당이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어 하는지 열심히 설파했어. 그걸 보고 우린 분통 터져 했어.

'저, 양반 저기서 뭐 하는 거야?' '선거를 모른다' '권력 의지가 없다'는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어. 그런데 나중에 당이 돌아가는 걸 보고서야 깨달았어. 노회찬은 그런 이벤트 기회를 자기보다 당을 위해 활용하고 있었던 거지. 이미 조직된 우리 편보다 조직되지 않은, 미래의 우리 편이 될 수 있는 노동자 서민대중을 큰 틀의 민노당으로 묶어내는 게 민노당 대선후보 예비경선의 본질적 목표로 설정하고 실천한 거지. 그런 점에서 노회찬이야말로 진정한 전략가고 조직가였어."

"우리가 그릇이 작았던 거지. 그가 높은 대중적 지지를 가지고도 끝내 자기 계파를 만들지 않은 이유를 정말 되새겨봐야 해."


이들이 모였던 <안성집>은 그 얼마 뒤 문을 닫으며,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③]으로 이어집니다(12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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