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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가 '탑' 때문에 지구 한 바퀴를 돌게 된 사연

[서평] 사진가와 시인이 함께 만든 책, '탑: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

등록 2020.12.25 10:08수정 2020.12.2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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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옛탑은 천여 기에 이른다. 그중 가장 오래된 시기에 해당하는 백제탑은 몇 기 되지 않는다. 그중 하나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지난날엔 평제탑으로 불렸다.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의미로 1층 탑신에 새긴 '대당평백제국비명(大唐平百濟國碑銘)'을 오해한 탓이다.


2016년 7월,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찾았다. 8m가 넘기 때문일까. 웅장하고 굳건하게 느껴졌다. 사극을 통해 봤던 기골 장대하며 옹골찬 장수를 보는 듯, 기개가 느껴졌다. 용문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를 마주했을 때 느꼈던, 범접하지 못할 신령스러움까지 느껴졌다.

옛 탑들은 이미 사라진 시대의 유산이다. 어느 정도의 아쉬움을 안고 마주할 수밖에 없는 탑들이었다. 그런데 이민족에 의해 멸망한 백제에 대한 안타까움과 씁쓸함 때문일까? 오랫동안 치욕스러운 이름으로 불렸음을 알고 만났기 때문일까?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유독 더 아쉽게 와닿았다.  

발로 뛰며 기록한 우리의 탑
 

<탑: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 책표지. ⓒ 마음서재

  
<탑: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마음서재 펴냄)는 한 사진작가와 시인이 엮은 '우리의 옛 탑'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의 탑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독창적이며 뛰어난 문화예술 작품이다. 신앙심이 바탕인 불교 문화 작품인 동시에 민족의 염원과 예술혼이 스며 있는 문화유산이다. 민족의 흥망성쇠를 간직한 유물이기도 하다. 품고 있는 사연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런 탑들을 풍경 사진이나 문화재 설명 혹은 자료로만 접하기에는 아쉽다. 그러니 직접 만나보자.

이 책은 이런 취지로 출발했다고 한다. 내용에 앞서 이 취지를 밝혔는데, 읽는 순간 깊이 공감했다. 그동안 탑을 만날 때마다 막연히 느낀 아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탑을 만나고 온 후 막연히 희망하곤 했다. '먹고 사는 것에서 조금만 홀가분해지면 탑만을 찾아 떠나보자'.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만나고 온 후엔 더욱 구체적으로 계획했었다. 그러니 이 서문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은 몇 기 남지 않은 백제시대의 탑이다. 6세기 말에 조성되었다니 지나온 세월은 천년을 넘기고 몇백 년이다. ⓒ 김현자

 
사진작가 손묵광씨가 탑들을 찾아 달린 거리는 2년 동안 5만km가 넘는다고 한다. 탑을 찾아 지구 한 바퀴를 돌고도 남는 거리를 다닌 것이다.

저마다의 모습과 나름의 사연을 품고 있는 탑들이다. '어떻게 하면 그 탑만의 특징이나 모습, 혹은 느낌을 오롯이 전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한 탑을 두세 차례 찾는 것은 기본. 카메라에 담기에 가장 좋은 때를 기다리며 셀 수 없이 찾거나, 날밤을 새운 적도 많단다.
 
그동안 만난 탑이 애착이 가지만 그중 설악산 봉정암 오층석탑은 소회가 좀 각별하다. 자동차로 400km를 달리고 또다시 6시간 산행을 해야 만날 수 있는 이 탑을 찍으려고 여덟 번이나 고단한 발걸음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 시대부터 이 땅을 지켰으나 일제강점기 시멘트로 누더기가 되어버린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20여 년에 이르는 해체·보수 공사 끝에 준공되던 전날 새벽녘, 탑을 촬영하던 감개무량함을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한여름 긴 산행에 탈수 증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고, 동트기를 기다리며 차 안에서 쪽잠으로 지새운 날도 부지기수다.


- <탑: 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 '사진가의 말'에서.

이런 고민과 노력 때문일 것이다. 탑을 주인공으로 하는 동시에 배경까지 아름다운 사진들이 유독 많은 것은. 그리고 단 한 장일 뿐이라도, 탑의 현재와 과거까지 유추하게 하는 그런 사진들이 유독 많은 것은.

탑 하나에 담겨 있는 수많은 이야기들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탑들은 천년을 훌쩍 넘긴 탑들이다. 글을 쓴 이달균 시인 또한 '탑들이 지나온 천년의 역사, 그 숨결에 화답하는 글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시조를 선택했다고 한다. 시조가 700여 년 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해 온 우리의 전통 시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의 결과, 책에 그 탑만의 특징과 느낌을 짐작할 수 있는 다양한 사진들과 그 탑을 노래한 시조, 탑의 역사적 배경이나 탑이 품고 있는 세월 등을 군더더기 없이 설명한 글을 담을 수 있었다.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은 지난날 일본인 골동상에게 팔려 공장 빈터에 세워지거나 해체되어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는 등의 비운을 겪었다. 탑이 고향 가까운 국립진주박물관에 안착한 것은 2018년. 고향 떠난지 77년 만에였다. ⓒ 손묵광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64호)은 고려시대 탑이다. 이 탑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이 발견된 흥법사 터는 현재 밭이다. 석탑은 그 밭 가운데에 서 있다. 탑은 아마도 독경소리 그리워 하지 않을까. ⓒ 손묵광

  
모두 흑백으로 촬영한 건 석탑, 즉 돌의 질감을 최대한 전하고 싶어서라고. 그래서 더 오롯하게 와 닿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옛 탑 대부분은 사라진 절터에 있다.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흥법사지 삼층석탑 역시 예전의 절터를 지키고 있다. 그나마 혼자가 아니라 받침돌과 머릿돌만 남은 진공대사탑비와 함께 있어 덜 외로운 것이 다행이다. 주변은 경작지로 변했으니 이 탑이 없었다면 나그네는 여기가 절터였음을 알지도 못하고 지나쳤으리라. 전란은 모든 것을 소멸케 한다. 사람을 죽이고, 문화유산을 없애고, 지난 연대를 확인할 증거들마저 멸실케한다. 영봉산 아래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운 것을 보면 진공대사의 법력이 높았으며, 흥법사 또한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원주 흥법사지 삼층석탑''설명 전문.
 
탑 조성 초기엔 목탑도 조성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석탑만 남아 있다. 다루기 힘든 돌을 다듬어 조성한 덕분에 전란이나 화재, 풍수와 같은 자연재해 등과 같은 엄청난 시련에도 살아남은 것이다. 그리하여 어쩌면 영영 묻히고 말지도 모를 지난날을 들려줄 수 있는 것이다.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탑은 총 70기다. 이중 국보 혹은 보물로 지정된 것은 68기. 우리의 중요한 탑 대부분을 담았다. 지역별로 구분해 실어, 우리 탑의 진면목을 느끼는 동시에 지역별 혹은 시대적으로 어떤 특징을 지녔는지, 혹은 어떻게 변화했는지 등을 쉽게 비교하도록 했다. 

그동안 우리 탑과 관련한 몇 권의 책이 나왔다. 그런데 대부분 특정 시대 혹은 특정 탑에 관한 것인 데다가 전문 용어와 설명 위주의 책들이다. 이처럼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탑 사진을 중심으로 담은 책은 아마도 이게 유일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이 더욱 특별하고 반갑다.

탑 : 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

손묵광, 이달균 (지은이),
마음서재, 2019


#탑:선 채로 천년을 살면... #손묵광(사진작가) #이달균(시인) #정림사지 오층석탑 #우리나라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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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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