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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고생했어'라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

12년을 다녔는데... 예상했던 퇴사 이벤트는 없었다

등록 2020.12.15 07:59수정 2020.12.15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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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회에 이어서.


"두고 보십시오. 나는 여기서 임원까지 해 먹고 은퇴할 겁니다." 평소에 호기롭게 말했어서일까, 어찌해도 그만둘 것 같지 않던 12년 차 직원의 사표에 부서장은 조금은 놀라는 것도 같았다. 부서장은 최대한 들어주었다. 이유야 말해 뭐해, 그저 몸이 아프고 그래서 일을 안 하고 싶다는 동서고금에 가장 무난한 사유를 말했다.

한때 몸과 영혼을 이 회사에 묻으리라는 꿈도 있었다는 쓸데없는 사족은 뭐하러 말했을까. 부서장은 다른 불만이나 회사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고도 했다. '사표를 써야 회사가 비로소 귀를 여는구나' 싶었다. 고착화된 소통의 부재를 실감했다. 다시 생각해보라는 어느 정도 예상되는 반응이었다.

다시 생각할 만한 그 시간이 지났을 즈음, 부서장은 예상치 못한 하지만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제대로 쉬고 싶다'는 절실함을 잠깐 안주머니에 넣어두고 '이렇게 직장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는데'라는 생각에 잠깐 흔들렸다.

허나 갈증이 난다고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는 법. 그럼 아마 애초 생각한 목표는 이루지 못하고 한 발이 어중간하게 걸쳐진 상태가 될 것이다. 여전히 출퇴근의 고달픔은 사라지지 않은 채 말이다. 다른 직원들한테는 그것이 혜택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꼭 일을 해야 한다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재택근무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인 것을 안다. 그러니 어쩌나. 한 점 망설임 없이 퇴사할 수밖에. 

후임자 채용 후 인수인계와 실무를 겸한 교육은 응당 나도 최선을 다 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회사는 적극적으로 채용해주었고 대리 한 명이 입사했다. 어찌 보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할 고마운 구세주였다. 나는 잘해주었다. 커피도 많이 타 주었다. 회사에 대하여 희망적인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다. 업무에 미흡한 부분이 있어도 인자한 미소를 날려주었고 부서장에게는 순조로운 진행을 보고하였다.


출근 마지막 날을 세는 기분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시계 초침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의 퇴사가 아름답게 성공하는 줄 알았다.

"그걸 왜 인제 알려주어요? 그럼 다음 주부터 과장님 없는 거예요?"
"알고 입사한 줄 알았지요. 괜찮아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잘하는데요. 뭘."

후임자는 내가 이번 주까지 근무라는 사실을 알고 무척이나 놀라는 것이 아닌가. 일단 눈이 펭수처럼 커졌다. 안심시킨 만큼 괜찮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 대리가 다음날 잠적을 했다. 과장 후임자로서의 부담감과 업무 적응에 힘들어 고민한 듯하다.

내 퇴사 일정이 미뤄지게 될까 봐 안절부절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이 상황을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전역을 앞두고 발생한 북한 도발에 이대로 제대할 수만은 없다는 국뽕 감동 드라마를 연출해야 하나. 

플랜 B로 가자. 잠적 비슷한 어떤 사건도 없었던 것처럼 일부러 근무시간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나에게 하려던 말이 있다면 도로 삼켜달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청테이프 소리에 실어 날려 보냈다.

민망했지만 어떻게 하면 테이프 소리가 쫙쫙 더 크게 귀를 찢는지 연구하며 단번에 말고 일부러 틈틈이 짐을 여러 번에 쌌다. 보란 듯이 삼사일을 그런 것 같다. 내 굳은 퇴사 의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짠했다.

짠한 것은 또 있다. 보통 출근 마지막 날은 직원들하고 인사나 하며 차 한 잔 하는 풍경을 연출하고 점심쯤 회사를 나가는 것이 관례였다. 어떤 직원은 아예 컴퓨터 포맷을 전날 해놓기도 했다.

나는 복도 없지. 다시 사표를 번복해야 하나 눈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촉수가 곤두서있는데 요 며칠 계속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퇴사 날 퇴근 시간까지 꽉 채워 업무를 했다. 내 퇴사 소식을 인사하러 온 타 부서 직원이 오히려 차장에게 핀잔 같은 한 마디를 나 대신 해주었다.

"차장님, 나 작별 인사하려고 왔는데... 지금 과장님 일을 시키는 거세요?"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돌아간다고 내 천국의 문도 드디어 마지막 째깍 소리를 내며 열렸다. 부서장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는데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약간 서글프기도 했다. '그동안 고생했어'라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는데...
 

오우삼 감독의 영화 <페이스 오프> 중 한 장면. ⓒ 브에나 비스타 인터내셔널 코리아

 
나름 청춘을 바친 직장인데 마지막 장면이 마른 낙엽길 같다니. 그럼에도 나는 오스카 시상식에서 호명된 것 마냥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야, 기분 좋다~' 현관을 지나 회사 정문까지 마치 오우삼 감독의 슬로 액션 한 장면처럼 걸어 나왔다. 퍼드덕 날아줄 비둘기까지는 미처 준비를 못했다.

'나는 내 인격의 완전한 표현을 위해 자유를 원한다.' – 마하트마 간디

가슴 뛰게 하는 단어, '자유'가 나에게로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늘엔 조각구름 떠있었고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 대한민국이로다. 내일 아침에는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운 장르의 태양이 뜰 것이다. 지금 나는, 멋진 이야기가 있는 매력적인 백수로 살고 있다. '지질한'이 아닌 슬기로운 백수생활 이야기를 다음 회에 하고자 한다.

추신. 예비 퇴사자들이여. 후임자에겐 커피 말고 밥과 술을 사줄 것. 청테이프를 꼭 준비할 것. 실수로라도 컴퓨터 포맷을 해놓을 것.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퇴사 #자유 #백수 #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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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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