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9

통도사 개화승 이동인, 본원사 부산별원을 방문하다

등록 2020.12.15 10:47수정 2020.12.15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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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포교사 엔신, 부산에 오다

"얘들아. 저번 초량왜관에 갔을 때 일본 절 있었잖아!"
"응, 본원사인가 하는 절 말이제."
"그래 그 절에 개화승 이동인 스님이 옛날에 자주 왔다 갔다 했다네."
"뭐라꼬. 저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과 가깝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맞다. 스님으로 개화파들에게 엄청 영향을 줬다카더라."

초량왜관에는 임제종 불교사원인 동향사(動向寺)가 본정 지역에 있었다. 승려는 외교문서 작성 확인 관리 업무, 불교 행사, 장례 의식 등을 수행하였다. 동향사는 1876년 폐사되어 초량어학소의 학생기숙사로 이용되었다. 개항 이후 불교사찰은 개항 다음 해인 1877년 12월에 가장 먼저 진종 대곡파 본원사 부산별원이 개설된 이래 1910년까지 10여 개의 불교사찰이 들어왔다. 1881년 법화경을 신봉하는 일련종 묘각사, 1896년 정토종 지은사. 1897년 진종본파 부산포교소, 1898년 진언종 금강사, 1898년 지산파 고야산, 1899년 진종본파 본원사 부산별원 등이 그것이다.
 

본원사 부산별원 1930년대 정토진종 본원사파 본원사 부산별원[서본원사 ⓒ 출처: 부산의 옛모습

 
일본인 거류민들은 왜관 시절 민간인의 생활영역인 육행랑(六行廊) 주변의 서정과 대청정 지역에 살았다. 자연 교육기관과 종교 기관도 주로 이 지역에 있었다. 교육기관은 처음에는 사찰에 있다가 점차 독립적인 학교 공간을 확보하여 설립되었다. 부산지역에 가장 먼저 설립된 교육기관은 1873년 10월 초량왜관 내 첨사옥(僉舍屋)에 개설되었던 '초량어학소'였다. 한일무역을 위한 일본인의 조선어학습기관이었다. 개항 이후는 대곡파 본원사 별원에 1880년까지 있었다. 1877년 거류지회의소 일부에서 시작한 '수제학교(修濟學校)'는 1880년 영사관 일부를 교사로 사용하였다. 진종 대곡파 본원사 별원에 '여아학교(女兒學校)'가 있었다. 이 두 학교는 1889년 '부산심상소학교'로 합병되었다. 1906년 부산고등소학교로 보수정에, 1910년 부산고등여학교로 토성정에 각각 분리 건립되었다. 거류지의 부산유치원은 대곡파 본원사 별원에 1897년에 부설되었고 1906년 직원은 3명, 생도는 96명이었다.

1876년 조선 수신사 일행이 도쿄에 체류할 당시 본원사측에서 인사를 청하고 조선에 승려를 파견하여 포교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했다. 1877년 11월 5일 메이지 정부의 외무경(外務卿) 테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와 내무경(內務卿) 오쿠보 토시미치[大久保利道]가 오타니파[大谷派] 본산(本山)에 조선 개교를 의뢰・종용하게 된다. 이에 동본원사 본산은 오쿠무라 엔신[奧村円心]과 히라노 케이스리[平野惠粹]를 부산에 파견하였다. 오쿠무라 엔신은 임진왜란 당시 종군승으로 참여, 부산에 '부산해 고덕사(高德寺)'란 사찰을 세우고 국내 사정을 정탐하여 본국에 보고하는 등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적극적으로 도왔던 오쿠무라 조신[奧村淨信]의 7대손이었다. 그는 조선 침략의 선봉이 되었던 조상과 같은 길을 걷기 위해 온 것이었다. "부산별원은 단순한 종교시설이 아니라, 정부가 개입된 반관반민적인 종교기관이었다."

오쿠무라 엔신(1843~1913)은 비교적 유능한 인물로 일본 인민을 위한 포교사업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한편으로 사원 내에 학교를 개설하고 한편으로 자선사(慈善社)라는 것을 조직하여 구제사업을 하는 등 활동의 폭을 넓혔다. 특히 1878년 1월부터는 한어학사(韓語學舍)를 개설하여 일본인들에게 우리 언문을 교습시켰다. 여기서 대한 침략의 하수인들이 양성되었음은 물론이다. 엔신은 1895년 초량에 학원을 개설했고 1898년에는 일본부인회를 조직했으며 1904년에는 화장장을 설치했다. 이러한 공로로 엔신은 일본 관리청으로부터 임시차용하고 있던 사정1정목8번지의 사원 부지 968평에 대한 영구임대차의 특혜를 받아 52평 5합의 본당을 비롯한 부속건물을 신축하고 1902년부터는 본산의 후원을 받지 않고 자체 운영하게 되었다.

본원사의 포교소는 부산 인근인 밀양, 삼랑진, 진주부터 원산, 함흥, 청진, 사리원, 신의주, 진남포 등지에까지 확장하였다. 당시의 포교소는 일본종교의 전파와 함께 한국의 정보를 수집하는 역할을 하였다. 엔신의 <조선포교일지>에 따르면 부산별원(현 부산 대각사)은 일본인 포교를 위해 설치되었지만, 한국의 전국 각지에서 방문한 스님과 일반인으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인근의 통도사, 범어사, 밀양 표충사부터 멀리 금강산의 유점사와 건봉사・신계사, 전라도 칠불사, 함양 법화사, 진주 대원암의 승려를 비롯하여 충청도, 경기도에서도 찾아왔다. 조선 불교의 폐쇄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에 일본 불교를 통해 해결할 방안을 얻기 위해서였다. 
 

엔신의 <조선포교일지>와 유대치의 간찰 엔신의 일지는 1880년 전후의 한국 개화인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 삼소굴일지(경봉스님)

 
또한 전국에서 많은 사람이 방문했다. 일본 불교에 관한 관심도 있었지만, 근대 문물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일본 사찰은 일본 근대화의 정보 창구였다. 그것은 또한 조선의 정보를 수집하는 창구였기도 하였다. 하루 2~3명에서 많게는 하루 수십 명이 방문하였다. 개인으로 오기도 하고 2~3명 어울려 오기도 하고, 단체로도 왔다. 엔신은 그 스스로 놀라서 "무엇보다 기쁜 일은 다른 것도 아닌 조선인의 왕래가 빈번한 것이라"고 1877년 11월 4일 적었다. 엔신은 그들에게 불교 경전, 염주를 주었고, 성냥과 램프와 같은 신문물을 선물로 주었다.

부산 별원은 정보의 교류 창구였다. 일본과 한국의 다양한 정보가 이곳에서 교류되었다. 일본인은 조선의 정보가 필요했고, 한국인은 일본과 서양의 정보가 필요했다. 일본은 한국 침략의 정보가, 한국은 개화와 근대화를 위한 정보가 요구되었다. 일본 사찰은 이중성의 공간이었다. 정보를 주고받음을 통해 서로의 이익을 추구한 것이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한국인에게는 친일(親日)과 지일(知日)의 공간이었다.


개화승 이동인, 일본 사찰을 방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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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승 이동인 조선의 개화를 위해 장벽인 일본과 한양을 드나들며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며 다양한 정보를 개화파에 제공하였다. ⓒ 이병길

  
엔신이 있는 부산별원에 1878년 6월 2일 경기도 삼성암의 승려가 방문했다. 나중에 이동인으로 밝혀진 스님이었다. 다음 날에도 찾아와 진종(眞宗)에 대해 필담을 나누고 불교 경전을 빌려갔다. 9월 15일 다시 이동인은 방문하였다. 이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영축산의 통도사 백련암 출신 승려로 법호는 서명(西明), 실명은 기인(琪印)인 이동인(李東仁, 1849?~1881)이라고 밝혔다. 통도사 출신인 때문인지 극락암 경봉스님이 이동인과 엔신 간의 편지 2통을 가지고 계셨다. 이동인과 엔신은 3일 동안 머물며 밤낮으로 필담으로 조선의 고립과 정강(政綱)이 번성하지 않고 종교의 패퇴함을 이야기하였다. 처음의 종교적 대담과는 다른 이야기가 중심으로 바뀌었다. 이동인은 조선 불교 경전 3권을 기증하고, 엔신 역시 <진종교지(眞宗敎旨)> 한 부를 선물했다. 그래 겨울 12월 9일 다시 방문하여 12월 11일까지 방문하였다. 비례함(比叡艦)을 구경하였다.

1879년 8월 중순 부산에서 이동인은 엔신을 다시 만났다. 이동인은 일본에 들어가려고 부산별원에 체재 중이었다. 엔신은 이때 이동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동인은 원래 승려인데, 항상 나라와 호법(護法)을 걱정하는 신경가(神經家)"라고 평가하였다. 나라의 국운이 쇠퇴하고 불교는 이미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혁명당 박영효, 김옥균과 교류하며 국가의 쇠퇴한 운명에 분개하여 크게 쇄신하려고 하였다. 그는 개화파들의 의촉을 받아 열국의 공법(公法) 등을 알기 위해 본원파에 입교하여 일본에 건너가려 했다. 이동인은 박영효와 김옥균이 여비로 준 2촌 남짓의 순금 막내 4자루를 보여주며 일본행을 엔신과 상담했다. 일본 총영사관과 협의하여 일본에 가기로 했다.

이는 한국 개혁당이 일본에 건너가는 처음 시도였다. 그러나 엔신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간 사람은 이동인 이외에 김철규, 전라도 위봉사(威鳳寺) 승려 문정(文定), 무불(無不) 스님 등이 있었다. 무불(無不, ?~1884)은 속명이 탁정식(卓挺埴)으로 백담사 출신으로 법명은 각지(覺地)였다. 그는 서울 동대문 밖 화계사에 머물며 개화파 인사와 친분을 쌓으며 개화운동에 합류하였다. 김옥균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간 개화승 이동인

1879년 9월 상순경 이동인은 일본 교토에 갔다. 1880년 4월 상순까지 7개월 동안 서경(西京, 교토)의 본원사(本願寺) 종제(從弟)로 있으면서 이름을 아사노 도진[朝野東仁]으로 개칭하고, 교법과 국정, 어학 등을 익혔다.

4월 5일 득도식을 하여 일본 정토진종의 승려가 되었다. 다음날 엔진과 이동인은 신호(神戶)에서 승선하여 동경으로 출발했다. 그 후 일본에 올 때도 상의하였던 부산 총영사가 된 마에다 겐키치[前田獻吉]와 향후의 일을 상담하고 아사쿠사 [淺草]별원에 머물었다. 5월 이동인을 돕기 위해 무불[탁정식]스님이 장기(長崎)를 거쳐 동경으로 왔다가 6월 25일 귀한하여 경성으로 갔다. 이동인은 당시 유명 조야인사들과 의미있는 만남을 통하여 한국의 국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일본의 근대화 결과를 한국에 이식시키는 데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했다.

또 이동인은 5월 12일과 15일 주일영국공사관 2등서기관 사토(Ernest M.Satow, 1843~1929)와 만나 조선 정치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두 번째 동행에서는 강원도 백담사 승려 탁정식(무불스님)도 있었다. 당시 조선인의 일본행이 소수였지만 있었다. 대부분 일본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신문물에 목마른 시대에 비공식적 밀항이 있었다. 물론 일본의 호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사토는 일본 근무를 마치면 조선으로 건너가려고 했던 모양으로 조선말을 가르쳐 줄 개인교사를 찾고 있었던 중에 이동인을 만난 것이다.

당시 이동인은 아사노[朝野]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사토에게 이동인은 아사노는 '조선야만(朝鮮野蠻, Korean Savage)'의 뜻으로 세계를 돌아보고 제 나라 사람들을 개화시키려고 비밀리에 일본에 왔노라고 밝혔다. 야만의 조선을 개화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경을 그는 성씨를 아사노[朝野]로 한 것이다. 이동인은 몇 개의 일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조야계윤(朝野繼允)', '조야각지(朝野覺遲)', '조야동인(朝野東仁)', '조야학인(朝野學人)'이 그것이다. '계윤(繼允)'은 '진실로 (조선의 개화를) 잇겠다.', '각지(覺遲)'는 '늦게 깨달았다', '학인(學人)'은 '배우는 사람'의 뜻이다. 이를 종합하면, 야만의 조선을 깨우기에 늦었지만 배우는 사람이 되어 조선의 개화를 이루겠다는 것이다. 아사노 도진(淺野東仁)이란 일본 이름은 조야(朝野)의 일본어 독음을 살려 거기에 자기 이름 동인을 붙인 것다.

5월 20일 사토와 함께 요코하마의 자딘 마티슨 회사를 방문하고 회사 지배인과 대담하고 시계 등 외국 문물을 샀다. 친밀해진 사토와 7월 18일부터 8월10일까지 거의 매일 만났다. 사토의 일기에 따르면, 이동인은 사토에게 "조선이 몇 년 내로 외국과 관계를 맺을 것이지만, 그 전에 반드시 현재 정부를 일소할 필요가 있음을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또 "그처럼 생각하는 청년의 수는 날마다 늘고 있다"라고 하였다. 당시 개화는 필요하고 조선 정부는 걸림돌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개화당은 혁명을 꿈꾸고 있었다.

이동인은 사토와 정치 이야기와 함께 조선 소설, 풍량전과 항운전을 읽으며 조선어를 가르쳐주었다. 이런 관계 속에 이동인은 영국에게 국내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이동인은 영국의 정보가 필요했다. 서구 각국의 정보를 얻기 위한 방책의 하나였다. 이동인은 일본의 부산 영사가 된 외무성의 하나부사 요시모토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 모두가 정보 수집의 일환이었다. 당시는 친일과 친영을 통해 그들의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이동인의 교류는 정보 수집과 제공이었다. 주고받는 가운데 조선 개화와 근대화의 방안을 찾았다. 개화와 근대화는 국제적 정보 없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정보 교류를 다른 각도로 읽으면 비밀첩보원, 밀정이 된다.

이동인, 수신사 김홍집을 만나다

1880년 8월 11일 도쿄에 도착한 당시 조선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아사쿠사별원에 머물게 되었다. 당시 하나[花房]공사가 인천개항을 건의했으나 거부하여 일본인으로 변장한 이동인이 "일본에 와서 국은(國恩)에 보답하고 불은(佛恩)에 보답하고자 결심하여 나라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김홍집과 만났다. 조선어를 말하는 일본인 같은 이동인을 만난 김홍집은 "이런 기인 남아가 있어 국은에 보답하는구나!" 하고 감탄하였다. 이동인은 자신의 일본에서 얻은 정보를 김홍집에게 말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는 다른 뜻이 없고 단지 조선을 개명(開明)으로 이끌고자 하는 뜻뿐이라"고 하였다. 당시 이동인은 일본이 가진 침략 야욕을 알지 못했고 우호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만남은 이동인의 생애를 반전하였다. 즉, 국정의 중심에 들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수신사 일행이 귀국한 이후, 9월 28일 이동인은 타고노우라마루호를 타고 원산에 귀국하였다. 엔신과 만나 그간의 일을 자초지종 일본어로 대화할 정도로 능숙했다.

엔신은 당분간 원산별원에 있었다. 이동인이 떠난 원산별원에 10월 4일 오쿠무라 엔신을 방문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유대치(劉大致/劉大癡, 1831~1884?)였다. 그는 박규수·오경석과 더불어 초기 개화파의 스승이며 지도자였다. 조선의 자주개화정책을 추구하였다. 개화파를 이끌던 박규수가 1877년 2월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오경석마저 1879년 사망하자 백의정승으로 불린 유대치가 갑신정변 직전까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을 지도하였다. 유대치는 엔신과 10여 차례 만났는데 개화파의 도일과 관련한 일을 전담하였다. 유대치는 개화파의 도일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엔신에게 자금을 차입하고 일본과 사무역(私貿易)을 하였다.

엔신은 당시 조선의 조야 인사들과 일본 정부를 이어주는 창구 역할을 적극적으로 주도하였을 뿐 아니라. 때때로 일본으로의 도항과 관련한 정치자금의 대여 등 직접적인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이동인에게 1천 엔을 빌려줄 것을 본산에 상신하거나, 원산 설교장으로부터 3백 엔을 대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엔신은 이동인과 달리 한국어를 배우지 않았다. 그는 1881년 1월까지 한국어를 못해 필담을 주로 하였다. 1880년 10월 24일 "동인을 동반하여 총영사를 만나 조선 정부의 사정을 보고하였다"는 기록을 볼 때, 한국의 승려와 일반인, 관료, 지식인, 개화파 등한테서 들은 정보를 일본 정부나 관료에게 전달하는 정보 수집원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동인과 엔신의 편지(1879.11.08.) 이 편지를 보관한 분은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이었다. 이동인은 통도사 스님임에 분명하다. ⓒ 삼소굴 일지(경봉스님)

  
이동인, 근대 문물로 고종을 만나다

귀국한 이동인은 개화당과 만나 그가 가져온 서적과 서양 문물을 보여주어 그들의 생각을 개화하도록 했다. 그는 1879년 전후 봉은사 삼성암에 머물며 유대치, 오경석,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개화파들과 교류했던 개화승이었다. 서재필에 따르면, 어느 해 봄날 우연히 개화파 일행이 봉은사에 산책하러 갔다가 이동인을 만났다. 그는 서양의 사진과 서양 각 나라의 내용을 기술한 <만국사기(萬國史記)>를 보여주자 개화파들은 그를 달리 보았다. 이동인은 개화파들과 자주 만났다. 김옥균과 박영효는 불교 신앙인이기도 했다. 이때 이동인과 개화파를 연결한 사람이 무불(無不, 탁정식)스님이다. 당시는 스님의 도성 출입이 금지된 시기였지만 이동인에게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개화파들은 이동인이 가져온 서적을 통하여 세계의 대세를 거의 알 수 있게 되었고 조선도 타국과 같이 민중의 권리를 수립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서재필은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를 이끌어 주었고 우리는 그러한 책들을 읽고 그 사상을 몸에 익혔으니 봉원사가 우리 개화파의 온상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이후 이동인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력한 정치인, 지식인과 교류하고 세계의 사정과 개화 문물을 받아들이고 서울 봉원사에 있으면서 개화파들에게 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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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이들은 친일 의존적인 급진적 개화 운동을 펼쳤다. 이들은 이동인의 사상적 제자였다. ⓒ 이병길

 
서울에 올라간 이동인은 김홍집을 만났다. 김홍집은 민비의 조카이자 당대의 세도가인 민영익(1860~1914)에게 이동인을 추천하였다. 당시 그는 개화를 옹호하였다. 자신이 수집한 괘종시계와 태엽시계를 선물로 주어 조정 대신들이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도록 했고 램프, 잡화, 성냥 등을 구입해 들어와 왕실과 세도가들에게 선물했는데 이것이 서양과 일본문물의 첫 상륙이었다. 민영익은 이동인의 범상한 자질과 해박한 국제정세 등을 확인하고 고종에게 소개하였다. 고종 역시 이동인을 통해 일본과 서양의 소식을 들었으리라 짐작된다. 1895년(고종 32) 3월 29일 승려들이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단속하는 금령(禁令)을 해제하기 전에 고종은 이동인을 만났다. 이는 획기적인 사건이나 공식 역사에는 기록된 것이 없어 어떤 내용의 대화를 하였는지 알 수 없다. 고종은 이동인이 머리 기른 스님이기에 만났을 것이고, 조선의 개화 역시 왕의 관심사였다.

고종은 조선과 미국의 조약 체결을 위하여 중국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동인을 청국의 일본주재 하여장(何如璋) 공사를 만날 밀사로 임명하였다. 고종은 밀서와 친필 서명 여행허가서를 주며 일본에 갈 것을 명령하였다.

1880년 10월 15일 이동인은 원산에서 머물며 엔신과 마에다 겐키치 일본 총영사 그리고 유대치와 함께 만나 정국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밀사가 와서 조선 정부의 논의를 이동인에게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유대치는 일본 총영사에게 알리고 유대치와 논의하였다. 나중에는 탁정식(무불스님)도 합류한다. 정부의 기밀을 일본에 알려준 그의 행위는 매국일까? 아니면 정보 공유일까? 자국의 이익을 위한 협조일까?

이동인, 아시아의 연대를 옹호하다

11월 5일 일본 군함 천성함을 타고 이동인과 탁정식(무불)은 원산에서 일본으로 갔다. 열흘 후인 15일 도쿄에서 사토를 만나 영국 공사관에 머물렀다. 이동인은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하였으니 영국 병력이 조선에 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일까? 훗날 1885년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다. 아무튼 사토는 이동인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주고받은 편지도 그런 내용이었다. 언어는 다른 나라를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7월 19일 사토는 이동인에게 영국과 조선의 외교 진행을 연결해주는 대리인(agent) 역할을 해주기 기대하는 편지를 보냈다. 단순한 한국어 선생이 아닌 외교관 역할 수행을 바란 것이다. 그만큼 이동인의 능력을 신뢰한 것이리라.

1880년 11월 16일 동경에서 열린 흥아회(興亞會) 월례회에 참석하였다. 흥아회는 서양 세력의 위압과 그들이 가하는 모욕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중·일 동양 삼국이 연대하자는 취지로 2월 13일 결성된 민간인 단체였다. 흥아회 창립 직후인 <흥아회보고』>제4집(1880년 5월)에는 이동인이 흥아회 회장 앞으로 보낸 '흥아회참(興亞會參)'이 실렸다. 이동인은 월회비 1엔이었던 당시 학자금 30금(金)을 출연하며 "대세를 한번 바로잡아 억만이 사는 우리 아시아를 이 시대의 종주(宗洲)로 만든다면 보탬이 되는" 역할을 하고자 하였다. 또 그는 "아시아가 쇠미하여 서양인들에게 굴욕을 당하는 것은 변통할 때 변통하지 못하기 때문"이기에 아시아인들이 연대하여 변통하여 실익을 구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아시아 연대를 통하여 서양 제국주의 세력과 맞서 동양의 위기를 극복하자는 흥아회의 취지에 동조하는 처지였다.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이 동참했다.

이동인은 흥아회 회원이었다. 1880년에 일본에 가게 된 김홍집 일행은 흥아회의 초청을 받았는데 9월 5일 모임에 참가한 인물은 이조연, 윤웅렬, 강위 등이다. 그때 처음 이동인은 흥아회 모임에 참가하고 두 번째는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에 갔을 때인 1880년 11월 18일이었다. 흥아회의 모임에 1881년 6월 23일 조사시찰단원이었던 홍영식, 어윤중 등이, 1881년 12월 12일 3차 수신사 수행원 현석운, 고영희 등이, 그리고 1882년 6월 21일 흥아회 모임에 김옥균, 서광범, 강위, 유길준 등 개화파가 참석하였다. 흥아회는 조선의 관료나 지식인, 개화파에게 아시아연대론을 전파하였다. 당시 조선은 아시아 연대를 부국강병을 위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분위기였다. "아시아 연대는 인종과 문물의 차이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같은 인종끼리 힘을 합쳐서 서양과 같은 근대화를 추진하여 서양 제국주의의 침투를 막아 주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880년대는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침략이 노골화되었던 시기였고, 특히 부동항을 확보하려는 러시아는 동아시아의 위협 대상이었다.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이 노골화되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였다. 연대의 중심 국가는 일본이었다. 아시아 공동 발전을 중시한 아시아연대론은 훗날 동양 평화론, 삼국 공영론, 대동아공영권 등의 주장으로 이어져 서양 열강에 대한 근대국가 일본의 국권 확립과 팽창을 위한 패권의 정치적 수사였음이 훗날 드러났다.

흥아회와 관련했던 조야신문(朝野新聞)의 스에히로 시게야스[末廣重慕]는 이동인을 "그 나라의 정체, 풍속을 물으니 언어가 명량(明亮)하고 조금도 응체함(막힘)이 없으며, 조선의 폐정을 상세히 나열하여 굳이 감추지 않으며, 구주 제국의 형세로부터 일본의 사정에도 환하게 아는 호걸"이라고 평가하였다. 1년 만에 일본어 숙달됨에 놀랐으며 키는 작고 안색이 기추(奇醜)하며 눈매가 괴이하다고 보았다.

1880년 11월 19일과 20일 이동인은 유대치와 함께 청국 공사 하여장(何如璋)을 만나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며,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중국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무불(탁정식) 역시 한 달(12월 21일) 뒤 하여장을 만나 같은 요청을 하였다. 당시 이동인은 조미수호조약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조선책략>의 저자인 황준현을 만났다. "조선의 땅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에 자리를 잡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바가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극동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친중국) 일본과 맺고(결일본), 미국과 연결함으로써(연미국)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조선책략>은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국제법 서적인 <만국공법>과 함께 일본에서 들여온 책이다. 이 책은 조선의 개화 정책 추진 과정의 필독서였다.

12월 1일 사토를 만나고 이동인은 12월 18일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그때 무불은 일본 신호(神戶)에서 영국 영사인 아스톤(W.G.Aston)의 한국어 교사 역할을 하다가 동경에서 사토를 만나 한국어를 가르치고 서양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외국인과 교류를 하였다. 이동인이 일본에 있을 때 대원군은 이 사실을 알고 격노했고, 귀국하면 주살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일본의 우편선인 천세환(千歲丸)을 타고 이동인은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왕의 특사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은 동래부사에게 잡혀 투옥되었다. 유대치의 도움으로 1주일 만에 방면되어 12월 27일 서울로 출발하여 서울에 도착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그동안의 일을 보고하였다.

관료가 된 이동인, 그리고 행방불명

1881년 2월 25일 이동인은 사상의학(四象醫學)의 이제마(李濟馬, 1838~1900)와 함께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참모장(參謀長)으로 공식 임용된다. 승려 출신이 관료가 된 사실 자체가 혁명적인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공식적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소식은 일본 영사에게도 속속 보고되었다. 고종은 이동인에게 신식 군대 창설 이후 무기와 군함 도입을 위한 일을 맡겼다. 그는 일본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수시로 궁궐을 드나들며 국정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3월 9일 이원회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3월 15일 전후 민영익의 집을 나선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오늘날까지 그의 죽음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가장 활발히 개화와 근대의 꽃을 피울 시기에 그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의 죽음은 조선과 개화파, 불교계의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이동인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웠던 사토는 이동인의 불명 이후인 1881년 8월 23일 이동인이 살아있기를 바라며 "그는 매우 흥미 있는 사람이다.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자기 나라의 역사에 큰 자취를 남길 것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동인이 사라진 후 그의 역할은 탁정식이 맡았다. 1881년 5월 어윤중 일행의 시사유람단을 이끌고 일본으로 갔으며, 자신의 역할이 끝나자 동경외국어학교 교사로 취직하며 머물었다. 1882년 4월 김옥균이 처음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 실정을 매일 알려주었다. 그는 이동인의 행방을 알기 위해 영국 공사들의 금전적 도움까지 요청하기도 하였다. 탁정식은 1884년 신호(神戶)에서 급병으로 사망하였다. 김옥균이 장주(葬主)가 된 장례식장인 동경 아사쿠사(淺草)별원에 모인 사람이 영사를 비롯하여 200명이 넘었다.

개화는 중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문명화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 양무운동은 중국의 전통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융합하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바탕으로 추진했다. 중국은 청일전쟁의 패배로 양무운동은 실패했다. 김홍집이 추구한 온건한 개화파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과 같은 입장이었다. 조선은 청나라 양무운동과 같은 점진적 개화론자인 김홍집과 일본의 명치유신과 같은 급진적 개혁을 주장한 개화파인 김옥균 간의 갈등이 있었다. 고종은 이동인 실종의 배후에 대원군이 있다고 의심하였고, 김옥균은 김홍집 일파의 소행으로 짐작하였다. 김홍집과 김옥균 중에 누가 더 주체적 개화파였을까? 그것은 그들의 행적과 죽음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일본의 요구에 당당히 맞서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뒷수습을 한 사람은 친청파인 김홍집이었다. 10년 뒤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894년 갑오개혁의 적임자로 김홍집을 내세웠다. 조선 최후의 영의정이자 대한제국 초대 총리대신이 바로 김홍집이었다. 그 뒤 박영효가 총리대신 서리를 맡았으나 '민비 암살 음모혐의'로 체포의 위기가 오자, 1895년 7월 또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다시 김홍집이 총리대신으로 1895년 을미개혁을 수행하다가 1896년 2월 고종은 아관파천 후 김홍집 등 대신을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김홍집은 일본 공사로 도망을 가지 않고 담담히 죽음을 맞이한다. 어윤중, 정병하도 그때 죽었다. 충분히 일본의 도움을 통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김홍집은 그러지 않았다. "죽으면 죽었지 박영효와 같은 역적의 이름을 얻지 않겠다"라고 했다. 김홍집은 친일파였지만 박영효와 달리 주체적인 친일파였다. 한 나라의 왕이 대신을 때려잡아 죽이라는 것은 유교 국가에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신을 죽이는 왕에게 어떤 관료들이 그의 명령을 따르겠는가? 고종은 무책임한 정치인이었다.

자주적 근대화의 길은 어려운가

1880년대는 조선이 자주적 주체적 근대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부적으로 동학 농민운동을 통해 반봉건 반제국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일본은 아직 조선을 삼킬 힘이 없었고 청나라의 내정 간섭은 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떤 외국 군대도 조선에 주둔하지 않았다. 조선의 자주근대국가로의 길은 열려있던 시절이었다. 개화는 흥국이요 근대화, 문명화의 길이었다. 그 길을 먼저 갔던 나라가 누구였을까? 동양에서는 일본뿐이었다. "부정부패와 무능력으로 나태와 정체의 늪에 빠진 조선사회는 자율적 개혁이 불가능할 것으로 간주됐다. 조선사회의 개혁을 위해서는 외부 지도가 필수적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비숍・헐버트・해밀턴 등 대한제국 전후의 사회 변화를 높이 평가한 서양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 보호국화 의도가 드러나기 이전까지 대다수 서양인은 조선사회 개혁에서 일본의 개입과 간섭을 지지했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을사늑약 이전에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이 있었음도 인정하였다. 즉 조선이 주체적 역량에 의해 내재적 발전의 가능성 자체가 없었던 나라는 아니었다.

1895년 도성 출입이 해제되기 전까지 개항지역의 일본 불교 사찰은 승려와 일반인들이 일본 근대 문물을 접하고 정보를 획득하는 공간이었다. 부산의 일본 사찰에 통도사 스님인 이동인이 방문하였다. 일본어와 일본의 문물을 알게 됨으로 그는 조선의 개국과 개화와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는 지일파(知日派)인 동시에 친일파(親日派)가 된 당시의 일본 전문가였다. 개화를 위해 친일을 통해서 근대적 계몽과 부강을 꿈꾸었다. 그가 갈 수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에 있는 청국 공사관과 영국 공사관과 교류하며 국제적 안목을 길렀다. 이동인은 일본통인 동시에 국제통으로 그 당시에 가장 앞장선 인물이었다. 종교인으로 근대를 꿈꾸며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시대적 한계로 그는 일본의 조선 침략 야욕을 알지 못했던 한계가 있었다. 그는 일본을 형제국으로 인식하였다. 모든 사람은 그 시대의 사람이다.

서양의 세력이 점차 동양을 식민지로 지배하려는 시절. 개국의 준비가 되지 않은 조선은 고요한 아침을 맞아 잠이 들깬 상태였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마자 동양을 삼키려는 서양 제국주의자와 이제 막 기지개를 켜며 서양화의 대열에 들어가게 된 일본이 눈독을 들인 나라는 조선이었다. 조선은 서구와 일본의 개국 요구에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 철저히 나라의 대문을 막았지만, 그 문은 곧 열리고 말았다. 뒤늦게 자주적 근대화를 부르짖었지만, 준비가 덜 된 상태였다. 먼저 선진적인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다. 결국은 청나라와 일본뿐이었다. 하지만 청에 대한 사대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자주파는 일본의 근대 문물에 눈을 돌렸다. 그중에 가장 먼저 눈을 돌린 사람 중의 한 사람인 통도사 출신의 이동인 스님이었다. 일본을 왕래하며 가장 먼저 서양의 정보를 가장 먼저 수집하고 일본의 근대 문물을 수용하여 조선의 개화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는 아시아의 연대를 통해 개국과 근대화를 추구하고자 했던 사람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를 통해 한국 침략의 준비는 끝났다. 을사늑약을 통해 그 발을 깊숙이 들이밀었다. 일본은 서양열강보다 더 혹독하게 한국 침탈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들의 깨어있는 의식이었다. 그러기위해 근대를 배우고 또 배워야 했다. 이제 일본을 통해 배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박재혁과 그 친구들은 생각했다.

"대한제국 근대화의 칼자루를 일본이 아닌 한국이 잡고 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상대일수록 더 경계하고 살펴야 한다. 이제까지의 개혁은 정부가 중심이었다면 제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인민의 깨어있는 의식이다. 인민의 목소리는 국왕보다 더 위력적임을 만민공동회를 통해 대한제국의 전 지역으로 이미 퍼져있지 않은가? 왕의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대한제국의 시대는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것을 참고로 한다'라고 하였지만, 옛것은 이제 그 빛을 잃었다. 인민들은 개화의 물결 속에 파도를 치고 있었다. 황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인민이 근대의 주체임을 자각하는 시기였다. 을사늑약이 일어났지만, 아직도 일본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남아있었다.

**오마이뉴스, 폴리뉴스 동시 연재함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개화승 이동인 #의열단원 박재혁 #의열단 #본원사 부산별원 #오쿠무라 엔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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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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