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농사꾼의 이장님 찾아 삼만리

보물 찾기처럼 설레는 시골 마을의 골목길

등록 2020.12.16 10:24수정 2020.12.16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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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 모종 직불금, 배추 모종, 퇴비등 시기별로 다양한 혜택이 있다. ⓒ 황승희


이건 중요하다. 땅을 사서 뭐라도 심었으면 그게 자장율사의 지팡이일지라도 물 주기 말고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농지원부 작성, 농업경영인 등록, 농협 조합원 가입. 이 세 가지를 다 마쳐야 비로소 진정한 농업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직불금, 배추 모종, 퇴비 등 시기별로 다양한 혜택이 있다. 나에게는 또 하나의 신세계였다. 어떤 것은 관련 기관에서 알아서 문자를 보내주기도 하는데 본인이 직접 챙기는 것이 좋다.


그래서 나는 영농일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첫해를 일단 잘 기록하고 다음 해부터 업데이트를 하면 굉장히 편하고 도움이 크니까. 농경문화가 그렇지 않나. 유목과 다르게 그 시기에 꼭 해야 하는 동일한 작업을 얼마나 착착 잘 따르느냐가 한 해 농사 성패를 좌우할 수도 있다. 모든 게 처음이라고 혼자만 다르게 하면 못쓴다.

각각 관련 기관, 자격 조건, 절차와 필요서류가 다르다. 더 자세한 혜택과 설명은 검색하면 잘 나와 있다. 그럼에도 애매했던 정보, 헷갈려서 실수한 경험이 있었다. 혹시 나처럼 초보 경작인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첫째, 서류가 많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하므로 효율적인 동선을 미리 계획해야 한다. 서류를 가지러 한 번, 제출하러 또 한 번인 것도 있다. 주민센터나 동사무소를 방문해야 할 때는 경작자 주소 관할인지 경작지 주소 관할인지 꼭 확인해야 한다. 나는 시내 아파트에 거주하고 경작지는 20분 거리 시외 면단위라 서로 관할이 달랐다. 확인했음에도 막상 당일에는 반대로 방문하여 동선이 꼬이는 실수를 했다.

둘째, 직불금에 대한 것이다. 직불금이란 농가의 농업활동을 위해 정부에서 농업인들에게 직접 소득을 보조하여 주는 금액이다. 직불금 신청기간은 연초이고 지급기간은 연말쯤이다. 신청자격은 경작 1년 이상부터이다. 나는 직불금 신청기간으로부터 1년 전에 토지를 구매하여 바로 경작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격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토지매입 날짜로 착각한 것이었다.

헛걸음을 하고서야 정확히 알았다. 토지매입 날짜나 실제 경작 날짜와는 상관없고 농업경영인 등록 날짜부터인 것이었다. 토지매입 후 바로 농업인 등록을 했어야 하는 건데 차일피일 두어 달을 미룬 것이 생각났다.


그 실수로 한해 경작을 하고도 서류상 기간이 부족하여 아쉽지만 한해 직불금은 포기해야 했다. 토지가 크지 않아서 받을 금액이 얼마 안 됐겠지만 백수 농사꾼으로서 적은 돈이란 없다. 부지런함이 돈이 되는 게 농경생활이라는 걸 깨달았다.

셋째, 사실 관공서 서류보다 조금 더 난감한 것은 농작물 경영 확인 사인을 받아오기 위해 이장님을 만나는 것이다. 직장 옆 자리하고도 말 잘 안 하고 내 자리에서만 일하는 전문직 내근만 오래 해서일까. 낯선 남자 어르신 만나는 일은 괜히 어렵고 긴장이 되는 일이다..

"그건 개인정보라서 안 알려주는데요."
"사인 받아오라면서 이장님 연락처를 안 알려주면 저는 어떻게......"
"아무래도 그 동네로 가셔서......"


오호! 윌리를 찾아라? 일단 토지매매계약서에 전 주인 할머니 전화번호가 있다. 이장님을 모른다는 답변이 왔다. 그럴 수 있다. 다 이장을 알고 살진 않으니까. 그 다음에는 내비게이션을 찍고 동네 마을회관을 찾아갔다.

나를 반긴 것은 코로나로 인한 잠정 폐쇄 안내문이었다. 이제는 무작정 동네분에게 물어보자. 차를 세워놓고 동네를 걸었다. 문 열린 집을 기웃거렸더니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마당에서 말을 먼저 걸어 주었다. 
 

마을회관 잠정 폐쇄 나를 반긴 것은 코로나로 인한 잠정 폐쇄 안내문이었다 ⓒ 황승희

 
지붕 사이를 돌고 돌아 골목을 걷고 걸어 알려주신 파란 지붕 농가를 찾아냈다. "나 아닌데요. 이장 바뀌었는데요" 아이고, 문이 닫혀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더 다행인 일은 자신의 친구가 새 이장이라며 전화번호까지 주었다. 통화 후 이장님을 만났다. 드디어 성공했다. 복숭아 박스를 공손히 들고 90도 넙죽 인사가 저절로 굽혀졌다. 바로 서류와 볼펜을 복숭아 위에 얹어 쭉 들이밀었다.

"밭이 어딘지 가보세."

직접 경작을 확인하는 투철한 직업 정신. 그렇지. 선 확인 후 사인 맞다. 시골이라서인가 지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내심 생각했나 보다. 복숭아와 사인을 직거래하려 했던 내 손이 이렇게 민망할 데가 있나.

이장님은 우리 밭의 농작물을 둘러보았다. 마늘, 양파, 감자, 고구마, 콩. 지나가다 두 어르신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도 했다. 우리 엄마 아빠일 게다.

"네네, 이장님. 제가 진작에 찾아뵙고 인사드렸어야 했는데요......"

어색한 조아림이 나왔다. 확인도 했겠다, 나의 식상한 인사말에 사인으로 화답하실 줄 알았다.

"차에 타요. 아까 거기 우리 집으로 가세. 그리고 저 복숭아는 얼마짜리 사 온 거예요?"

헉. 예상치 못한 질문이다. 허를 찔린 건가? 마트에서 만 이천 원과 이만 원을 잠깐 고민했었다. 만 이천 원짜리를 싣고 왔다. 이만 원주고 샀다고 할까? 설마 너무 싼 것을 사 온 게 결정적일까. 그래, 첫 인사인데 내가 돈을 좀 쓸 걸. 잠깐 후회도 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다시 오라고 하면 그땐 그 옆에 삼사만 원짜리를 사겠어. 그래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혼자 생각하는 동안 이장님 집에 도착했다.
 

시골 마을 골목길 고불고불 골목길을 돌 때마다 국민학교 때 소풍에서 하던 보물 찾기의 설렘이 떠올랐다 ⓒ 황승희

 
아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복숭아 상자가 창고에 그득했다. 수확철이라 이장님은 마침 시세가 궁금하셨던 거였다. 이장님은 자신의 복숭아를 까주는 내내 본인의 복숭아 품종 자랑을 하셨다. 단단하고 엄청 달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게야.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다. 언제든 필요하면 도움을 청하라고 이장님 집을 알려준 것이었다. 동네분들이 어떤 갖가지 일들을 하는지 그래서 여러 방면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도 했다.

낯선 외지인에게는 그저 감사한 일이다. 부모님 지낼 집을 지을 거라고도 했더니 동네 사람한테 일 맡기면 안 속는다는 현실적인 조언도 해주셨다. 내 복숭아는 도로 싣고 왔다. 물론 이장님의 사인과 함께. 내게는 어떤 연예인의 그것보다 귀한 사인이었다.

또 하나, 이장님을 찾아 동네 골목골목을 걸어 다니다 보니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계획지구의 반듯한 바둑판 마을이 아니라 오래전 초가집 터 모양 고대로 해서 현대식 농가주택으로 변모한, 세월이 고스란히 묻은 마을이었다.

고불고불 골목길을 돌 때마다 국민학교 때 소풍에서 하던 보물 찾기의 설렘이 떠올랐다. 어느 나무에 보물 쪽지가 꽂혀 있을까. 내비게이션의 우회전 좌회전이 안 통하는 이 골목에 그때의 보물찾기 숲이 오버랩되는 환상을 잠시 느꼈다. 신기했다.

저 골목 귀퉁이쯤에 내가 서있었다. 내 것이었던 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오래된, 나에게도 있었나 싶은 잊고 있었던 나의 동심. 그때의 나를 만난다면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때 못 찾은 보물 말이야. 걱정 마. 항상 네가 보물이었어. 너 꽤 괜찮게 살았거든."
 

낯선 이장님을 찾아 돌아다닌 시골 마을 골목길이 나를 만나고 돌아오는 여행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골목길 #이장님 #농업인 #직불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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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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