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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철살인 노회찬 "정치인 민생투어? 민생이 남일이란 뜻"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⑤-3 : 마들연구소, 지역명품특강

등록 2020.12.21 08:38수정 2020.12.2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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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을 선보인다.[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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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총선 당시 노회찬 통합진보당 후보가 유권자를 만나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모습. ⓒ 노회찬

 
[지난 기사] 신영복, 박중훈, 김제동, 김미화의 공통점 에서 이어집니다.

나눔과 돌봄

노회찬은 '나눔과 돌봄'에 있어서도 정성을 다했다. 소외된 이웃에게 연탄과 도시락 배달, 김장 담가 나누기 등, 그것은 보여주기식 민생'투어'가 아니라 노회찬의 진심이 담긴 나눔과 돌봄의 실천이었다. 17대 총선 선거운동의 기록을 정리한 노회찬의 <선대본 일기>(2004.3.27.)는 '민생투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민생투어'가 계속되고 열우당은 이를 표절이라 비판하는 3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투어'의 사전적 정의는 여행, 관광 혹은 견학이다. 그러니 '민생투어'는 민생현장을 여행하고 관광하거나 혹은 견학한다는 뜻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생투어'를 하지 않는다. 왜냐면 민주노동당에게 민생현장은 바로 고향이고 또 삶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자기 고향을 '여행'하고, 자기 마을을 '관광'하며, 자기 집을 '견학'하는 사람은 없다.

'민생투어'를 한다는 것은 '민생현장'이 바로 남의 고향이고, 다른 사람들의 마을이며 남의 집안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민생투어'는 백인들의 '아프리카 투어'이고 부자들의 '소말리아 방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먼저 했느니 싸우고 있다. 식민지를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 싸우다 망한 17세기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노회찬이 상대적으로 손쉽게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민생투어'가 아니라 꾸준한 그리고 참신한, 지역주민의 삶과 마음에 스며드는 활동의 결과였다. 이준석이 들었다는 '노회찬 같이만 하면 된다'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회찬은 2008년 이래 4년간의 노원구 상계동 삶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멍도 들었다."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2008년 18대 총선 낙선과 마들연구소 창립, 2010년 서울시장 출마, 진보신당 탈당, 통합연대 결성 등에 이르기까지 '정치백수' 노회찬은 숨가쁘게 달려왔다. 오전에는 마들연구소 일을, 오후에는 주로 진보정당 통합과 관련된 일을, 밤에는 전국 각지의 강연과 집회를 돌아다녔다(<시사IN>, 222호, 2011.12.21.).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 노원구 상계동(노원병)에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대한민국' '노원이 바뀝니다. 대한민국이 바뀝니다'를 앞세우며 출마한 노회찬은 5만2270표, 57.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당히 당선된다. 허준영 새누리당 후보는 3만6201표(39.6%)를, 국민생각 주준희 후보는 2889표를 득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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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병 후보 당시 노회찬의 선거공보물. ⓒ 노회찬재단


'당의 명령'으로, 정든 '마들'을 떠나다

"저는 오늘 대법원의 판결로 10개월 만에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다시 광야에 서게 됐습니다.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도 뜨거운 지지로 당선시켜주신 노원구 상계동 유권자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 권력의 비리에 맞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2013.2.14. 국회의원직 박탈 직후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


2013년 2월 '삼성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뒤 "노원구 상계동 유권자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인 노회찬은 2014년 동작을 재보선 출마와 2016년 창원 성산 출마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노원은 그만큼 그에게 그리고 그 주변의 활동을 함께 해온 사람들에게 굉장히 소중한 기억과 값진 실천이 깃든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들었던 시간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철새정치' 등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당의 결정이고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2016년 2월 24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창원 출마를 놓고 고민이 컸다"며 노회찬은 이렇게 문답한다(한겨레, 2016.3.5.).
 
- 당의 요청이라 해도 매번 다른 지역구에 출마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도 매우 힘들다. 어찌 보면 불행한 일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사를 다니는 사람은 이사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나. 여행이라면 낯선 곳에 가는 게 좋을지 몰라도 선거는 익숙한 곳에서 하는 게 더 낫다. '선거를 앞두고 여기에 왜 왔느냐'는 상황에 다시 봉착할까봐 걱정했다."

- 서울(노원병)에서 출마해 이긴다면 그것도 당에 큰 의미가 될 텐데.
"당에서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시 노원으로 가자는 의견, 광주로 오라는 광주시당의 요구, 창원으로 오라는 경남도당의 요구가 있었다. 광주 선거는 야권의 어느 정파가 호남의 주도권을 가져가느냐의 문제다. 노원병 선거는 내가 당선되지 않으면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이 당선될 수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창원 성산구에서 이기면 정의당의 의석 하나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새누리당 의석 하나를 뺏어오는 의미가 있다. 정의당에 성산구는 전략적 가치가 전국 3위 안에 드는 중요한 곳이다. 당의 전략적 요충지라면 승리 가능성이 높은, 당의 에이스를 보내는 게 당연하다."

2016년 철새정치 공세에 대한 노회찬의 반박은 이어졌다(<연합뉴스>, 2016.4.3.).

"당명이 여러 차례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당이 합치고 나뉘는 과정이 있었을 뿐 당을 옮기지 않고 오로지 진보정치를 지켰다."
"흥부전에서 박씨를 물어다 주는 제비도 철새다. 그런 좋은 철새까지 방지해서는 안 된다."


한창민 정의당 대변인도 노회찬에게 힘을 보탰다(<헤럴드경제>, 2016.4.6.).

"봄을 몰고 오는 제비처럼 노회찬 후보는 민의를 받들고 왔다. 창원성산에 민생의 봄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왔다. 봄을 부르는 철새는 민생의 알곡만 탐내는 지역 텃새보다 백배천배 유익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정의당 후보로 창원성산에 출마한 노회찬은, 진보후보단일화 투표, 야권후보단일화 투표 등 두 번의 예선 관문을 거쳐 본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누르고 3선 국회의원이 된다. 당선 후 몇 분이 노원의 '명사초청특강'과 같은 마들연구소의 프로그램을 창원 지역에서 진행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해왔지만, 몇 차례 논의만 하고 결국 추진하지는 못했다. 돌아보면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창원에 출마하면서 노회찬이 남긴, 그의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노동자 서민의 땀과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 그곳이 저 노회찬의 고향입니다." 그의 말을 전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창원 성산 출마기자회견, 20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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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0대 총선에서 창원성산에 출마를 선언한 노회찬. 사진은 2016년 2월 1일 출마기자회견 당시 모습. ⓒ 노회찬재단

  
"오늘 새벽 첫 열차를 타고 창원으로 향해오면서 온갖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의 생애 첫 직업은 전기용접사였습니다. 산업용보일러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당 5000원을 받는 용접공으로 사회에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노동법이 무시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이 강요되던 현실을 고쳐보려고 전기용접 2급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한 것입니다.

그 대가는 3년에 가까운 옥중 생활이었지만 한 번도 이를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 후 10년에 걸친 천신만고 끝에 진보정당을 만든 것도, 두 차례나 국회의원이 된 것도, 국회의원직 박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삼성X파일을 공개한 것도, 평생 한 우물만 판 것도 모두 한 가지 목표,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노동자 서민의 땀과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입니다.'"

기록연재 |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노회찬하면 떠오르는 것, 여덟 장면: 기록으로 톺아보기 ⑥]으로 이어집니다(12월 24일). 
#노회찬 #마들연구소 #노회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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