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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시절, 삼성 뛰쳐나와 해외이민 선택한 사연

캐나다 사는 해외동포 최기창씨 이야기, 들어보시겠습니까

등록 2020.12.21 17:41수정 2020.12.21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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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창, 고등학교 졸업사진 ⓒ 최기창

 
최기창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황해도 연백군, 모친은 평안도 의주 출신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월남하신 부모님을 통해 이산가족의 아픔을 수시로 느꼈다. 특히 그의 부친은 북한에서 8남매의 막내로 1951년 1.4 후퇴 때 혈혈단신 월남했다. 평소 부친은 북한에 두고 온 부모님이 그리워, 매해 명절 때만 되면 부모님 사진 앞에 소주 한 잔을 올려놓고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지금도 그는 그런 부친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삼형제 중 막내아들인 그는 재수를 하고 지난 1982년 장학생으로 한양공대에 입학했다. 그와 동갑내기 한영현(1962-1983)도 그보다 1년 먼저인 1981년 장학생으로 한양공대에 입학했다. 1983년 4월 2일, 그의 과 선배 한영현은 대학 3학년 때 이른바 '녹화사업'으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징집 되었다. 그리고 입대 후 불과 석 달 만인 그해 7월 2일, 한영현은 군대에서 의문사한다(관련 기사: '형의 머리를 저주한다'... 참혹한 21살의 죽음).

캠퍼스마다 '사복 입은 경찰' 숨어있던 시절... 용기내어 쓴 "살려내라" 대자보

과 선배인 한영현의 군대 내 의문사는 젊은 최기창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1980년대 초반 강제징집 돼 사망한 무수한 대학생 중에 같은 대학, 같은 학과 선배 한영현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최기창은 몸을 가눌 수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한양대 캠퍼스에 "한영현을 살려내라!"라고 쓴 대자보를 붙였다. 그의 부모는 혹시 애지중지하는 막내아들도, 한영현처럼 강제징집을 당해 큰 변고를 당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잠을 못 이루었다.

그의 학과 친구들은 당시 대학 캠퍼스별로 잠복해 있던 사복경찰이 그가 쓴 대자보의 필체를 조사해 누가 썼는지를 알아내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며 걱정했다. 그에게 '한영현을 살려내라'고 쓴 대자보를 빨리 떼어내라고 충고했다. 그래서 친구들의 충고를 듣고 마지못해 자신이 쓴 대자보를 스스로 내렸던 아픈 추억은, 지금도 그의 마음에 잊을 수 없는 부끄러움과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1980년대는 대학생이 캠퍼스에서 시위를 하면 대학에 잠복해 있던 사복전투경찰 '백골단'이 순식간에 나타나 학생들을 막무가내로 구타하며 잡아가던 암울한 시대였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다가 소리소문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던 학생들도 많았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더구나 대학가는 데모, 화염병, 최루탄 가스가 범벅이되 캠퍼스의 공기는 오염되고 찌들어 있었다.

1984년, 대학 3학년이 된 최기창은 정밀기계공학과 과 대표에 선출되었다, 그는 나라가 어려울 때 '공부가 전부는 아니'라는 나름의 사명으로 학우들을 모아서 MT(단합대회, membership training)도 갔다. 또한 학우 간 팀워크를 증진한다며 학생들을 데리고 축구 경기를 보러 가며 교수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수업을 임의로 휴강시키기도 했다. 그런 '객기' 때문에 교수실에 불려가 한 시간 넘게 뜨거운 훈시를 들은 적도 있다.
  

1982년 대학교때 (가운데) 친구들과 MT가서 ⓒ 최기창

 
그 어렵던 시절에도 아들 셋을 반듯하게 키우기 위해 그의 부친은 묵묵히 직장생활을 했고 모친은 자식들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었다. 지금은 갑부들이 산다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대학, 대학원 졸업 때까지 강가 바람을 맞으며 살았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 나오듯이 당시 청담동은 신흥개발지구로 논밭이 많은 서울 외곽 지역이었다. 당시 논 개구리가 그의 집안으로 수시로 들어오고 비 오는 날에는 '개굴개굴 개구리'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이었다.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시국에 속이 타 술을 아주 가까이했다. 그 덕에 모친은 그에게 "대학 가서 술만 배웠느냐"라고 수시로 야단을 치셨다. 친구들에 '미쳐서' 집에도 가끔만 들어오고, 그래서 한집에 사는 부모님의 얼굴도 어쩌다 한 번 꼴로 뵐 수 있었다. 그래도 그 덕에 전국 각지에서 서울로 어렵게 유학(?) 온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면서 '인간'을 느끼는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그는 회고한다.

안치환(1965~)의 운동권 노래를 방에서 몰래 듣다가 큰형에게 혼나기도 했다. 또 학과공부보다는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지정한 이른바 '불온서적'을 사려고 그를 판매하는 책방들을 뒤지며 다녔다. 공대생이었지만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모교 신문방송학과 리영희 교수(1927~2010)의 금서들을 몰래 찾아 밤을 새우며 읽었다. 지금도 리영희 교수는 그의 평생 스승으로 남아있다.

1984년, 그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공부를 다시 시작해 군대를 천천히 해결(?)하겠다는 마음으로 대학원 진학을 결심하고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1986년 그는 마침내 한양공대 대학원에 합격했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서도 그의 시위는 멈추지 않았다. 무지막지한 폭력을 휘두르며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체포하러 캠퍼스로 진입한 전경들에게 돌을 던지며 그는 두려움 없이 맨몸으로 맞섰다. 온몸이 뜨겁게 끓는 피로 가득 찼던 시절이었다.

그가 대학원 2학년 때인 1987년. 한양대 무기재료(공학)과 86학번인 전국대학생협의회 의장 임종석(1966~)이 신출귀몰한 리더십을 보였다. 하지만 임종석은 결국 최장기 도피 중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러면서도 후배 임종석이 체포 당시 웃음을 잃지 않았던 기개와 모습에 그는 큰 감동을 받았다. 아무것도 없었지만, 뜨거운 젊은 혈기 하나로 전두환 정권의 불의에 저항했던 광풍과도 같은 80년대를 그는 그렇게 살았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1988년 6월, 그는 삼성전자에 합격했다. 삼성에서 6개월 근무 뒤 1988년 12월 그는 휴직계를 내고 나이 많은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다. 그 탓에 그는 군대에서 10년 아래 선임병에게 뺨을 맞는 설움을 겪기도 했다. 당시 25명인 그의 대학원 동기 중 사병으로 입대한 이는 그가 유일했다.

당시 석사장교 제도가 있었고 영어와 국사시험만 합격하면 6개월 만에 군 복무를 마칠 수 있었다. 그때 시험원서에 "군에 아는 인맥을 적어놓으라"는 항목에, 그는 시험과 무관할 것이라고 믿고 일부러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시험에 떨어지고 나서 나중에야 그는 석사장교 제도가 전두환, 노태우 아들들을 정식 군대에 안 보내게 하려는 제도였다는 것을 알았고 이에 분노했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진 뒤였다.

'초일류'라던 삼성, 아침마다 이건희 연설 듣다가 뛰쳐나왔다

군 전역 뒤 삼성에 다니면서 1996년 그는 결혼했다. 결혼 1년 만인 1997년 IMF 사태로 그는 삼성전자에서 삼성전기로 이직 후 근무하다 2001년, 40세도 안 된 나이에 삼성에서 명예퇴직했다. 당시 IMF 외환위기 탓에 삼성전자 2만 5천 명 중 1만 명이 잘려 나갔다. 그중에 '탈락 1등'은 그와 같은 연구원들 신분이었다. 결국 그는 삼성전자에서 10년, 삼성전기에서 3년 넘게 근무한 뒤 그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기업과 결국 결별을 선택한 것이다.

삼성에서의 근무 중 그의 기억에 남았던 일은 철저한 '일본식 근무환경', 또 매일 이건희 회장의 아침 연설을 경청하며 다짐해야 했던 살벌한 회사 분위기였다. 그는 삼성이 '도덕 경영'을 외치며 임직원들의 도덕성을 강조하면서도, 경영자는 그와 상관없다는 '내로남불'식의 도덕 불감증이 아니었으면 진정한 세계의 기업으로 다시 태어났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술회했다.

삼성을 나온 후 그는 벤처 업체에서 일하면서 '갑질'의 기업문화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그러던 중 캐나다에 있는 동서가 이민을 준비해 보라고 그에게 권유했다. 특히 지난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그는 아예 해외 이민을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2009년 3월, 그는 가족들과 인생 후반기를 캐나다에서 보내야겠다는 각오로 이민을 떠났다.

캐나다에 이민 온 지 3년 만인 지난 2011년, 그의 부친은 82세의 나이에 갑자기 뇌졸중으로 돌아가셨다. 그는 타향에 와서야 비로소 고향을 잃었던 실향민 아버지의 외로움과 아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때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8년전 모친이 캐나다에 오셨을 때 ⓒ 최기창

 
지금 그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자영업으로 할인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캐나다에서는 벤츠를 타고 다니든 자전거를 타고 다니든 서로가 위아래로 보지 않는 문화가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어떤 직업도 귀천이 없는 풍토에서 그와 가족은 자그마한 행복을 느낀다.

캐나다는 또 부자가 세금을 많이 내고, 가난하면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평등을 추구하는 나라다. 하지만 그래도 캐나다가 철저한 '자본주의의 나라'라는 것을 그는 요즘도 종종 실감한다. 그리고 이민자보다는 캐나다인들이 주요 요직에 많은 것을 피부로 느끼는 그에게 캐나다는 또한 그래서 '이민자들의 아픔이 서린 나라'이기도 하다.

그는 그래도 사랑하는 아내, 딸(23세) 그리고 아들(20세)과 교육 걱정, 장래 걱정 그리고 남과 피나는 경쟁하지 않고, 남의 눈치 보지 않고 그저 도란도란 작은 행복을 가꾸며 사는 것이 좋다.

다만 지난 5년 동안 캐나다에서의 바쁜 생활과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모국을 방문 못 한 것이 너무 아쉽다. 더구나 요즘에는 모친이 와병 중이시라 그의 마음이 아주 무겁다.

이명박-박근혜 정권기 그는 아예 한국에 대한 뉴스를 보지 않았다. 뉴스를 보면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 시절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을 접하며 그는 "가장 비겁한 사람은 침묵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즘은 SNS를 통해 현명한 진보개혁주의자들과 소통하며 살고 있다.

그는 지금 여당이나 진보정권이 최소한 몇 십 년은 더 집권해, 향후 평화적인 통일도 이루기를 기원한다. 또한 친일파와 적폐 청산, 검찰과 언론개혁의 사명을 문재인 정부가 완수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다.

* 추신: 그는 오랫동안 한국에서부터 30년 넘게 못 만난 사촌 여동생 고현정(1966년~)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 너무 궁금하다고 한다. 사촌 여동생은 어려서부터 할머니 손에 의해 외롭게 자랐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에는 사촌 여동생을 자주 만나 밥 한술, 차 한 잔을 함께하며 인생과 시국에 대한 고민을 나누며 가깝게 지냈다. 하지만 사촌 여동생이 23세 나이로 일찍 결혼한 뒤 아예 연락이 끊어졌다. 그 후 친척들에게도 사촌 여동생의 행방을 수소문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사촌 여동생이 어느 하늘 아래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까?' 그는 요즘 타향에서도 고향의 사촌 여동생 안부를 걱정한다. 
#최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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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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