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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5거래 하며 쓴 돈만 백만 원... 나는 '당근 폐인'이었다

시작은 8천 원짜리 주기 세트였는데... 브레이크 없는 탕진 끝에 '탈당근' 합니다

등록 2020.12.24 07:16수정 2020.12.24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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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거래 사이트 '당근마켓'이 여러 모로 '핫'하다. 물론 그만큼 논란도 있다. 얼마 전 당근마켓에 '아기를 판다'는 글이 올라왔다는 보도는 여러 사람들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다.


비슷한 수준은 아니지만, 이밖에도 당근마켓에 올라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글들은 매번 화제가 되고 있다. 개중에는 그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장난삼아 갑자기 툭 튀어나온 글이라고 치부하기 힘든 글들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힘든 현실을 반영하는 '맥락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씁쓸하지만 주목할 만하다.

당근마켓의 다운로드 수는 1000만 회를 넘은 지 오래다. 짐작이지만, 일일 거래 건수도 수백 만건을 상회하지 않을까싶다. 당근마켓은 누군가에게는 '간소한 삶'을 실현하는 장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맞춤 거래를 통한 소소한 기쁨의 원천이 된다.

또 누군가에게는 거래 성공이라는 성취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일상을 방해하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이 되기도 한다. 이쯤되면 당근마켓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가 나와줘야 할 시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당근 활동배지 당근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열개의 활동배지를 획득했는데 그중의 한개는 황금배지다. ⓒ 변영숙

 
나 역시 중독에 가까울 정도로 당근마켓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호기심에 '당근마켓' 앱을 깐 이후, 하루도 빠짐 없이 몇 시간씩 '당근'을 했다. 한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당근마켓을 방문한 이에게 주어지는 '당근 홀릭' 배지와 황금 배지를 획득했고 거래 온도(거래 매너 등을 평가하는 지표)도 쑥쑥 올라갔다.

당근마켓의 시스템은 이렇다. '당신의 근처'라는 줄임말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사는 동네에서 직거래를 원칙으로 한다. 가전제품부터 캠핑, 미용, 의류, 액세서리, 화초, 가구 등 팔 수 있는 모든 유형의 물건들이 거래되고, 쓰다 남은 향수나 로션, 스크래치가 나거나 금박 도금이 다 벗겨진 접시처럼 평소라면 버려질 물건들까지도 사고 판다. 그래서 당근마켓은 분명 내게 '신세계'였다.
 
'당근' 맛에 빠지다

  

행남자기에서 나온 주기세트 첫번째 당근 거래품, 나를 당근홀릭이 되게 만든 30년도 더 된 태백주기 ⓒ 변영숙

 
나의 당근마켓 첫 구매 제품은 30년도 더 된 행남사의 주기세트였다. 딱히 전통주 잔이 필요했던 것도 아닌데, 빨갛게 익은 홍시가 그려진 도자기 주전자와 술잔이 단돈 8000원이라는 사실에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약속을 잡고 물건을 받아왔다.

거래는 판매자의 집 근처에서, 채 오 분도 걸리지 않고 진행됐다. 어차피 중고고 값도 싸서 '검수' 과정도 없이 돈을 주고 물건을 받아오니 순식간에 거래가 완료되었다. 다행히 물건 상태도 좋았다. 거래는 완전 대만족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당근'은 두 번째 세 번째 거래로 이어졌고 내가 사들인 행남사 주기세트만 다섯 세트가 넘었다. 작은 도자기 잔에 그려진 학과 공작, 꽃 등 한국의 전통적인 문양들이 촌스러우면서도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겨서 구매를 멈출 수가 없었다.

같은 물건도 상태에 따라, 또 주인의 성향에 따라 차이가 났다. 운이 좋으면 미사용에 포장박스까지 있는 제품이 아주 저렴하게 나오는 경우도 있어 눈에 불을 켜고 7인치 모니터 속에서 빠져 나오질 못했다.

어느새 주기세트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도자기 그릇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들였다. 금액으로 따지면 100만 원이 넘는 돈을 중고 그릇 구매에 '탕진'했다. 지금 생각하면 거의 미친 짓이었는데도 당시에는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했다.

'당근'으로 알게 된 사실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도자기 회사들의 대략적인 역사가 꿰어지더라는 것이다. '행남자기', '밀양자기', '한국도자기' 등 우리나라 대표적인 도자기 회사들이 일제 강점기인 1940년대에 세워졌으며,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은 놀라움에 가까웠다.

왕실에 도자기를 납품하는 200~300년 전통을 지닌 외국의 도자기 회사에 비하면 일천한 역사이지만 80년 역사 역시 무시할 수 없는 업력이 아닌가. 우리나라에도 이런 기업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 자부심을 느꼈다.

1960~80년대 우리 어머니 세대가 쓰던 접시들은 일명 '밀크 글라스' 접시로 불리며 앤틱 애호가들 사이에 귀한 몸으로 거래되며, 미국의 파이렉스사나 앵커호킹사의 밀크 글라스 제품은 최고의 VIP 대접을 받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내 어머니의 앤틱 그릇들을 그렇게 허망하게 고물장수에게 내준 데 대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미국 파이렉스사에서 나온 블루밴드 접시 지금은 단종된 60년대 미국에서 출시된 파이렉스 블루밴드 접시. 장당 3만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 변영숙

     
거래 트렌드를 보면 요즘 주부들은 무거운 도자기 그릇보다는 가벼우면서도 견고한 강화유리나 내열유리 제품을 선호하는 듯하다. 또 미국 코닝사의 코렐 그릇은 꾸준히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가격도 좀처럼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물건들은 나오자마자 팔려나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명 귀한 앤틱 그릇은 투자 대상이며 전문 거래꾼도 있다는 사실도. 식당을 정리하면서 일괄로 내놓은 식기들은 우울한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었다.

'당근'으로 잃은 것과 얻은 것

당시 나의 모습은 '당근 폐인'에 가까웠다.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당근앱을 켰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챗을 통해 다음 거래 약속을 잡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검색에 한두 시간은 기본이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이 나오면 바로 '거래하고 싶습니다', '거래 희망합니다', '어디서 만날까요', '내일 거래할 수 있을까요?'라는 챗을 날려 득달같이 판매자에게 달려가 물건을 받아왔다.

하루에 다섯 건의 거래를 한 적도 있었다. 나는 분명 당근을 통해 간소한 삶을 실현하거나 판매를 통한 소소한 기쁨을 누리는 이용자는 아니었다. 반대로 '무모한 소비'와 '가산 탕진'이라는, 당근마켓의 기본 취지에 반하는 이용자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귀한 몸이 된 옛날 접시들 한때 당근에 팔려 정신없이 사들인 옛날 중고그릇들. 지금은 처치곤란으로 방바닥에 수북히 쌓여 있다. ⓒ 변영숙

 
당근마켓 덕에 올가을은 오래된 그릇들을 '줍줍' 하느라 통째로 도로에서 허비하고 돈도 낭비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아주 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우수성을 새삼 알게 되었다는 것은 가장 큰 성과다. 기회가 되면 백자와 청자 달항아리로 이어지는 한국도자기의 역사를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지금도 가끔 '요즘도 당근 해?'라는 질문을 받는다. 대답은 '당근 아니요'다. 내게는 한번 경험으로 족하다. 나의 당근마켓 이용에 대한 총평이다.
#당근마켓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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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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