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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가 받는 소외와 차별을 모르는 척할 수 없어요"

[인터뷰] 전신 마비 장애인, 봉사활동가, 사회운동가 왕태윤 스파인2000 대표

등록 2020.12.23 17:01수정 2020.12.23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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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서울 모래내시장에는 입으로만 장을 보는 사람이 있었다. "바나나랑 포도 한 상자씩 주세요." 그와 상인의 대화가 끝나자 옆에 서 있던 사람이 과일값을 건네고 상자를 받아 든다. 휠체어에 앉아 장을 보는 그는 전신마비의 중증장애인 왕태윤(52)씨다.


왕태윤씨는 그 대신 손과 발이 되어주는 장애인활동보조인 배덕한(55)씨, ㈔스파인2000 팀장 정일범(41)씨와 함께 다닌다. 도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지만, 무엇이든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다며 가능한 한 밖에 나선다. 과일값을 보내준 사람들의 마음, 과일을 받으며 웃음 지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복지시설 방문을 위해 버스로 이동하는 왕태윤씨와 활동보조인 배덕한씨 ⓒ 서유덕


"소중한 마음 덕분에 나누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스파인2000'의 대표를 맡으며 20년 동안 장애인 등 소외계층을 도왔다. ㈔스파인2000은 척수 장애인 모임으로 출발한, 민간 자원봉사단체다.

왕태윤씨는 스파인 활동 등을 통해 최근 4년 간 장애인복지시설 134곳에 3800만 원 상당의 후원 물품을 지원했고, 장애인 7027명에게 문화 활동의 기회를 제공했다. 63차례 장애인 차별 철폐 운동과 인식개선 교육에 나서기도 했다. '나눔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매년 저소득층 아동·청소년, 독거노인, 북한 이탈 주민, 탈성매매여성, 외국인 노동자 3000여 명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건네고 있다.

후원금 전부를 나눔에 사용하겠다는 그의 열정 덕분에, 스파인2000은 후원자 4000여 명, 자원봉사자 6000여 명과 함께 봉사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시장 아주머니께서 김치 담가주시고, 정육점 아저씨께서 고기 기부해주셔서 가능한 일들"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스파인2000이 20년 동안 소외계층을 도운 건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고자 하는 따뜻한 마음이 모인 덕분"이라고 말했다.

스파인2000과 함께하는 사람들 중에는 대기업·공공기관과 법조인·의사·교수도 있지만, 시장 상인·식당 종업원, 중·고등학생, 그리고 장애인도 있다.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는 없죠"
 

몸이 약한 그는 병원 신세를 자주 진다 ⓒ ㈔스파인2000


그는 삶의 기본적인 일조차 쉽게 해결할 수 없다. 스스로 가래를 뱉을 수 없어 흡입기로 빼줘야 하고, 음식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먹을 수 있으며, 배꼽의 소변줄로 배뇨를 해야 한다. 면역력도 약하다.

2002년 가을, 인천으로 김장 봉사를 하러 갔다가 폐렴에 걸리고 패혈증까지 도져 중환자실에 2주간 입원했던 적도 있었다. 골수 결핵에 걸려 갈비뼈를 7개 떼어 냈고, 욕창에 2년을 병상에서 지내기도 했다. 지난 8일에는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장폐색 때문에 4일 간 입원했다.

그럼에도 그는 지지와 응원 덕분에 봉사활동에 나선다. "왕태윤 대표님이 내 아빠"라는 뇌병변 장애인 고한민(32)씨, "저희 편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던 이름 모를 학생, "왕태윤씨가 자식들보다 낫다"는 어르신을 잊을 수가 없단다. 나눔과 봉사 덕분에 사람들이 힘을 내는 모습을 보면 뿌듯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약자가 법과 제도로부터 소외당하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2002년 장애인의 대중교통 이용환경 개선을 요구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성폭력특례법 항거불능 조항 개정 서명운동,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 장애인 최저임금적용 제외법률 폐지 투쟁 등에 나섰다. 또 부양의무제 폐지, 진료비 바로알기 등 사회적 약자와 시민 모두를 위한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저도 따뜻한 마음 덕분에 좌절을 극복했습니다"

1992년 11월, 군 전역 후 2개월 남짓 된 그는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했다. 37번의 수술 끝에 목숨은 건졌지만, 하루아침에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입원 중 아버지까지 여읜 그는 병원에 누워있는 수년 동안 절망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런 수년간의 좌절을 극복한 건 뭇 사람의 따뜻한 말 덕분이었다. 벌레 보듯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두려워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했지만, 휠체어를 타고 처음 갔던 병원 앞 식당에서 주인의 친절에 감동해 세상에 나설 용기를 얻었다. 그는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저 하나를 위해 식탁과 의자를 정리해줬어요. '맛있게 드시고, 다음에 또 오세요'라며 친절하게 절 대해줬죠. 한 시간 남짓한 호의였지만, 덕분에 제 삶이 달라졌습니다. 만약 그때 못된 식당 주인을 만났다면 지금까지 숨어 지냈을 거예요."
 

조금이나마 움직이는 오른쪽 어깨로 낚시하듯 자판을 눌렀다 ⓒ ㈔스파인2000

 
3년 만에 집에 온 그는 아버지 장례식 조의금으로 윈도우95 컴퓨터를 샀다. 사람과 소통하려는 간절함으로 키보드를 눌렀다는 그는 벤처 기업으로부터 취업 제의를 받을 만큼 컴퓨터 실력이 늘었다.

2000년부터는 국립재활원에서 장애인을 위한 컴퓨터 수업을 했고, 사회활동에 자신감이 붙은 그는 초등학교에서 장애인 인식개선 교육도 시작했다. 자신이 사용하는 장애인보장구로 체험교육을 진행하며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TV에서 우리나라 장애아동 4명을 입양한 미국인 부부의 모습을 봤다. '미국의 장애인·아동복지가 잘 되어있구나'라고 생각한 그는 장애인이 잘사는 우리나라를 만들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서야겠다고 다짐했다.

컴퓨터로 후원자를 모집하는 글을 써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렸고, 한 달 만에 후원금 300만 원과 자원봉사자 50여 명을 모았다. 2001년 11월 그는 국립재활원 동료, 자원봉사자와 함께 용산구의 중증장애인 거주시설 '가브리엘의 집'을 돕는 것으로 첫 자원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나눔과 봉사가 제게 행복을 주었지요"
 
 
그는 20년 동안의 봉사활동이 자신의 삶에도 활력을 주었다고 전했다. 뺑소니 교통사고로 전신 마비 장애인이 되고, 입원 중 아버지를 잃는 슬픔을 겪었지만 그럼에도 "고통이 없었다면 따뜻한 마음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약자를 위한 행동은 그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꿨다.

그는 "나눔은 다 내 기쁨으로 돌아와 삶의 원동력이 된다"며 "나눔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선행에는 차별이 없으며,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후원, 나눔, 봉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보편적인 활동이에요. 한 달 720시간 중에 몇 시간 정도만 써서 일손 돕는 것, 떠먹는 요구르트 몇 개 사서 복지시설에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됩니다.

종로구에 있는 중증장애아동 보호시설 '라파엘의 집' 같은 경우도 아이들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입히느라 항상 일손 부족에 시달려요. 장애아동은 밥을 일일이 다 떠먹여 줘야 하거든요. 매 격주 토요일, 한 달에 2시간씩 두 번만 시간을 내서 일손 돕고 오시는 건 어떨까요? 아이들이 진짜 좋아할 겁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봉사활동을 할 수 없는 지금, 그는 인터넷과 SNS로 자원봉사자·후원자와 소통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나눔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9월부터 매달 소외계층에게 마스크를 지원하며, 약자가 느끼는 아픔을 달래보고자 노력한다. 지난달에는 장애인, 어린이, 노인, 북한 이탈 주민, 여성 복지 시설 15곳에 마스크 6500개를 지원했다.
#봉사활동 #자원봉사 #나눔 #사회공헌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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