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 금주산 금룡사, 더 이상 불교 사찰이 아니다

몇 년 전 경매에 넘겨져 구천 미륵회에 매각돼

등록 2020.12.24 13:43수정 2020.12.2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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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금룡사 포천 금주산 깎아지른 절벽위에 세워진 금룡사는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지담대사가 창건한 암자가 시초다. ⓒ 변영숙


종교 건축물이 애초의 건립 목적과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일은 그렇게 드물지 않다. 4세기에 건립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자 비잔틴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아야 소피아성당'이 동로마의 지배 하에서는 그리스 정교 사원이었으나 터키의 지배 하에서는 이슬람 사원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소비에트 정권 하에서 러시아 제국이나 연방 공화국에서 그리스 정교사원이 수영장이나 병원, 군대 막사 같은 시설로 사용되다가 다시 정교사원으로 복원된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종교 건축물의 용도 변경이 외국이나 과거에만 일어났던 일도 아니다. 최근 방문했던 포천의 한 사찰에서 그러한 '용도 변경'의 현장을 목격했다. 절을 사고파는 일이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지만 전혀 다른 단체에게 사찰이 넘어가는 것을 보니 새삼 세상에 영속적은 것은 없다는 생각에 착잡해진다.


깎아지른 암벽에 세워진 포천 '금룡사'

포천 영중면 금주산에는 예부터 '금 아홉 덩이가 묻혀 있는데 아들 아홉을 둔 사람이라야 그 금을 캘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실제로 금광이 있어 얼마 전까지도 금을 캤다는 금주산 중턱에는 '금룡사'라는 오래된 사찰이 있다.
  

포천 금룡사 깎아지른 절벽에 세워진 포천 금주산 금룡사 ⓒ 변영숙

 
의정부시에서 37번 국도를 달리다 금주산 입구로 향하는 임도를 5분여 정도 달리면 주차장과 오래전부터 사용하지 않는 듯 보이는 '지장전'과 요사채 건물이 서 있다. 아니다 다를까. 철거 예정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두 건물에서는 인기척조차 나지 않는다.

금룡사는 그곳에서 한참을 더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마른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산중의 적막감을 깨웠다. 잠시 후에 앙상한 겨울 나무 사이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지은 건물과 거대한 순백의 미륵대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멋있다', '아름답다'가 아니라 '이건 뭐지?'였다. 그 정도로 절의 모습은 낯설었다. 한국에 이런 절이 있었나 하고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비슷한 절집도 떠오르지 않았다. 절이 아니라 중국 무협지에 등장하는 무예수련장이나 무림고수들의 은신처 같았다.

금룡사는 편편한 평지라고는 없는 산등성이에 철근을 박아 전각과 미륵대불을 세우고, 암벽을 거치대 삼아 가파른 계단을 오르내리게끔 지어져 있었다. 어느 정도 계단을 올랐을까. 처음에 호기롭게 하나, 둘 세기 시작한 계단 수도 잊어버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니 다리가 후들거리고 오금이 저렸다. 나도 모르게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 정도로 난간 위에 달린 밧줄을 꽉 잡았다.


미륵의 세계를 구현했던 금룡사

금룡사의 주 전각은 대웅전이 아닌 미륵전이다. 미륵전 앞에 베란다처럼 공간을 만들고 석등 두 개를 세우고 보호난간을 둘렀다. 석등조차 온전한 모습으로 사진에 닮을 수 없을 정도의 비좁은 난간에 서니 산자락은 치맛자락을 여민 듯 곱게 포개져 있고 그 앞쪽으로 물결치는 연봉과 도로며 집이며 전답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더 멀리로는 제법 큰 물줄기가 흐르는 것까지 보였다. 불과 해발 200~300m도 안되는 높이에서 이런 탁트인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니 금룡사가 기가 막힌 터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포천금룡사 금룡사 미륵전에서 바라본 포천 일대 ⓒ 변영숙

 
1865년 조선 고종 2년 이순신 장군의 후손인 지담스님이 작은 암자를 짓고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드린 것이 금주사(금룡사의 이전 이름)의 출발점이 되었다. 지담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도 주석한 바 있는데, 후에 독립운동가가 되는 홍범도가 지담스님의 상좌승으로 수도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이때 지담대사를 통해 이순신 장군과 서산대사, 사명대사 등의 활약상을 접한 것이 홍범도가 의병운동을 벌이고 독립운동가가 되는 데 크든 작든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금룡사는 오랫동안 암자 형태로 명맥을 유지해 오다 1970년대 들어 지해스님의 중창 불사를 통해 대웅전과 미륵대불을 세우고 암벽을 파내고 만든 감실에 천불상을 봉안하는 등 현재의 면모를 갖췄다.
  

포천 금룡사 금룡사 출입문에 새겨진 사군자 문양 ⓒ 변영숙

 
주 전각인 미륵전에서는 제법 세월의 흔적이 묻어났는데 출입문 가득 장식하고 있는 사군자 문양이나 연화 무늬가 새겨진 기둥들이 미륵전에 멋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법당에는 화려한 닫집 아래 사모관대 모양의 보관을 쓴 미륵불 세 기가 봉안되어 있고 천장에는 달마 대사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금주산 금룡사 미륵대불 1970년과 2005년 금룡사에는 현란한 하얀옷을 입은 미륵불이 현신하였다고 전한다. ⓒ 변영숙

 
미륵전 뒤편에는 하얀색 대형 미륵대불이 세워져 있는데 특이하게 입술이 선홍색이다. 그 아래에는 '1970년 음력 7월 8일 밤 9시에서 9시 30분까지 백금색 관세음보살과 남순동자가 출현하신 곳이다. 관세음보살의 크기는 하늘과 땅 사이에 꽉 찼다고 기억되며, 의상이 너무 호화찬란한 백금색이어서 1초도 지켜보기 힘들었다. 그때 친견자가 8명이 된다. 기록자 금용사 주지 지해 합장'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또 다른 안내판에는 '2005년 같은 날 또 한 번 미륵이 현신했는데 당시 미륵불상 뒤에서 하얀 불기둥이 치솟아 주민들이 금룡사에 불이 난 줄 알고 소방서에 신고를 하고 실제로 소방관들이 출동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포천 금룡사 암벽 감실에 모셔진 금룡사 천불상 ⓒ 변영숙

 
미륵대불에서 계단을 내려오다보면 암벽 감실안에 모셔진 천불상 때문에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저마다 모습이 다르고 조성된 시기도 다른 작은 부처상들은 놀라움을 넘어 기이함까지 느껴진다.

금룡사의 새로운 주인은 '구천 미륵회' 

2007년 스님이 입적하신 후 금룡사의 운명은 완전히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절은 경매로 넘어갔고, 사단법인 구천 미륵회가 이를 인수하게 된다. 구천 미륵회는 대순진리회 분파의 하나로 전국에 수천 명의 회원을 두고 있으며, 포천 '금룡사'를 비롯해 포천 '미륵박물관'과 연천 영농법인 하늘마당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천 금룡사 주전각인 미륵전과 암벽감실의 천불상 ⓒ 변영숙

 
나에게 차를 대접한 금룡사 관리인 여성은 '미륵이 이미 현신하였으며 이 세상은 이미 불국이며, 우리 모두는 형제자매다. 이곳은 구천미륵회 법회와 교리공부를 하는 곳'이라며 미륵박물관도 꼭 들러보라고 한다. 말의 내용이 어딘지 현실성도 없고 허황돼 보여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절을 보고 느꼈던 감흥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궁예의 흔적이 어른거리는 금룡사  

금주산에는 궁예와 관련된 일화가 전한다. 태봉국 도성에서 왕건에게 쫒겨나 이곳으로 숨어든 궁예는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생계를 위하여 닥나무를 심고 한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금룡사의 원래 이름은 금주사였으나 인근에 작은 암자가 들어서서 금주사라 하자 금룡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포천소식에도 실렸습니다.
#포천 금룡사 #금주산 금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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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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