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라 쓰고 '성평등 공유지'라 읽는다

공존과 가능성의 세계, 여성가족친화마을

등록 2020.12.24 13:40수정 2020.12.24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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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늦둥이를 낳고 2년 동안 오롯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했다. 아이를 24시간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돌보는 일은 정말이지 고달팠다. 아이는 사랑스러웠지만, 육아 기간이 길어질수록 외롭고 두려웠다. '이대로 세상에서 밀려나는 건 아닐까, 다시 세상에 나갈 수 있을까'. 엄마라는 타이틀을 건 순간부터 자아와 모성이 분열하는 일상적 경험은 숙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즈음이었다.

그때 여성가족친화마을을 알게 됐다. 나처럼 다크서클과 번아웃을 장착한 여성들을 아파트 안에 있는 여성친화마을센터에서 만났다. 우리는 매주 아이들을 데리고 밥을 차려 먹고 뜨개질을 하고 수다를 떨고 육아용품 벼룩시장을 열었다. 동네 여성들과 성평등 강의를 열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동네 여성들이 정성스러운 상을 차려 여성친화마을센터에서 우리 아이의 돌잔치를 열어준 건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언니, 우울증이 이제 좀 사라진 것 같아요." 6개월 후 동네 동생은 수줍게 고백했다. "응. 나도." 우리는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우리는 마을에서 돌잔치를 하고 마을에서 스스로와 서로를 돌봤다 ⓒ 곽근영

  
돌아보면, 그 시간과 공간은 우리에게 숨통이었다. 아이와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곳이 가까이 있는 것, 그리고 힘든 처지를 하소연할 수 있는 이웃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주어져야 하지만 당연한 권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시의 물리적 공간과 그 공간을 구성하는 사회적 관계는 개인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사회적 자원을 가지지 못한 약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육아로 인한 자아 분열과 열패감을 개인의 능력과 책임으로 쉽게 전가하는 사회에서 개인이 자책하고 무기력에 빠지는 건 얼마나 익숙한 풍경인가. 빙의가 되어서만 "나는 그 누구의 무엇이 아닙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82년생 김지영'들은 서로 만날 수 있는 절대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인연이 되어 여성가족친화마을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여성친화도시를 공부하면서 나는 그때 내 경험을 해석하고 규정할 수 있는 언어를 찾게 되었다. 여성과 엄마가 동일시되는 사회에서 엄마는 돌봄 제공자로 동일시된다. 돌봄 수혜자와 돌봄 제공자가 확연히 분리된 불평등한 구조에서 '자기 돌봄'이라는 말은 말 자체로 치유력을 발휘한다. 여성가족친화마을 활동은 우리에게 자기 돌봄을 선사했고 상호 돌봄을 경험하게 한 계기였다. 여성 자조모임의 힘은 '자매애'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느 연애보다 설레고 애틋한 일이다.

내내 물음표였고 여전히 그렇다. 성평등한 마을은 무엇일까. 페미니스트들이 살아가는 마을일까. 페미니스트들을 양성하는 것일까. 페미니스트들이 살아가는 마을은 또 어떻게 다른 것일까. 젠더와 마을의 접점은 무엇일까. 여성가족친화마을을 통해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성평등은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개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텍스트라는 것이다. 마을이 중요한 이유는 성평등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삶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삶이 그렇듯,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에서의 활동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의 영역이며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뿐, 결론도 정답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 만난 남구 활동가는 올해 마을돌봄 활동을 하면서 발달장애아동을 처음 만났다고 했다. 그는 장애아동의 양육자가 몇 시간이라도 자기 돌봄을 할 수 있도록 장애아동을 안전하게 돌보는 마을을 꿈꾸게 됐다고 한다. 여성가족친화마을 '할배요리사' 프로그램을 통해 생애 처음으로 요리를 해본 남성 어르신들이 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여성들은 올해 마을김장에 '할배요리사' 남성 어르신들과 김장을 비비겠다며 즐거워했다. "예전엔 '엄마'로 끝이었는데, 여기 오면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는 여성은 매일 마을 도서관으로 출근한다. 남성 분야로 인식되었던 목공을 시작한 여성들은 목공 도구가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제작돼 있다는 것을 깨닫고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

여성 어르신들이 공병을 수거하고 판매한 돈으로 마을 아이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마을이 있다. 청년 여성들은 여성 노인들의 공병수거 자원활동을 마을 주민 모두의 공동 활동으로 확장하기 위해 100가구에 공병 분리수거함을 배포했다. 어느 여성가족친화마을 사업 홍보물에는 남녀노소뿐 아니라 고양이와 강아지, 그리고 나무가 나란히 그려져 있다. "나는 전문가가 아닌데.. 나는 집에 있는 사람인데.."라던 여성은 마을활동을 발표하기 위해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밤새 만들고 처음으로 발표를 했다.
 

마을에서 여성목공전문가를 양성하고 마을 일거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2019년 비아까망이 목공지도사 양성과정 ⓒ 비아까망이작은도서관

  
새로운 텍스트는 너무 많다. 그리고 백 사람에게 백 개의 스토리텔링이 있다. 자기 돌봄과 상호 돌봄, 자기 삶에 힘을 갖는 것,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 공평함과 정의, 경험의 확장과 지속가능성까지, 이 스토리에는 다양한 가치가 있다. 성평등이 성별이 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공존과 가능성의 세계와 접속하는 것이라면 마을은 그 가능성의 보고(寶庫)라고 말하고 싶다.


육아로 힘들어하던 나는 마을 활동을 하면서 결혼이주여성을 만날 수 있었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나는 여성은 '똑같지' 않음을 알게 됐다. 다양성은 머리로 깨우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 부딪치고 질문하고 낯설게 보고 깨지는 끝없는 성찰과 훈련의 과정에서 체득된다. 다양한 삶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사회는 가능성이 차단된 사회이다. 그래서 돈을 주고 이용할 수 있는 카페보다, 공짜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동네 공원과 벤치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용공간에서 다양하게 살아가는 동료시민을 만나는 경험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회적 자본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를 관통하면서 로컬의 재발견이 이뤄지고 있다. 성평등 없이 로컬 민주주의는 완성될 수 없다. 성평등이 위계에 도전하고 다양성을 체득해가는 실천 활동이라면 마을이야말로 '성평등 공유지'가 아닐까. 오늘도 나는 '성평등 공유지' 마을에서 산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곽근영씨는 광주여성가족재단에서 여성가족친화마을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광주여성가족재단 소식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성평등 #여성가족친화마을 #마을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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