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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마을 미황사 금강 스님과 '몸뚱어리'

20년 주지 소임 마치고 떠난다는 소식 듣고 생각난 10여년 전 인연

등록 2020.12.29 11:26수정 2020.12.29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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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금강스님과의 인연
    

미황사 오색 떡국 2011년 두번째로 찾은 미황사. 절 마당에 두 분의 스님이 보인다. 의도하지 않게 카메라에 잡힌 사진 귀퉁이 속 스님이 금강스님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 변영숙

   
얼마 전 신문보도를 통해 미황사 금강 스님 소식을 알게 되었다. 이 스님이 20년간의 주지 소임을 마치고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해남군 지역민들이 '달마산에 미황사가 있어 산이 아름답듯이 미황사는 금강스님이 있어야 아름다운 절'이라며 임기 연장을 호소하고 있다는 거였다.
   
'임기를 마친 주지스님을 지역민들이 못가게 잡는다'라는 한 마디가 지난 20년 간 금강 스님의 삶을 모두 설명해주고 있었다. 반면, 내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니 참으로 보잘 것 없게 생각되었다. 개인적으로도 의미있는 성과를 이루지 못했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선량한 삶도 아니었다. 주어진 시간을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허둥대기만 했다.


금강 스님 얘기를 하면서 급도 안 되는 내 얘기를 끼워 넣은 것은 금강 스님과의 인연이라면 인연때문이다.

내가 금강 스님을 뵌 것은 2006년 가을 즈음이었다. 그때 나는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 문제에 허우적대다 결국 다 팽개치고 무작정 미황사로 내달렸다. 불교신자도 아니었고 절을 은신처나 안식처로 생각할 만큼 각별하게 여기지도 않았을 때다. 템플스테이가 대중화되기도 훨씬 전이었다. 미황사가 어떤 절인지도 몰랐다. 누군가 미황사가 좋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고 서울에서 멀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해남 땅끝마을이 그렇게 먼 곳인지도 몰랐다. 머리로 아는 땅끝마을과 직접 차를 몰고 찾아가는 땅끝마을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컸다. 서울에서 오후 3시가 넘어 출발해서 아홉시가 훌쩍 넘어 도착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단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절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미황사 오색 떡국 20011년 6월 두번째로 찾은 미황사에서 먹었던 오색 떡국. 참 정갈하고 정성이 가득한 떡국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절집 주인과 많이 닮았다고. 지금도 이 떡국을 팔고 있을지 궁금하다. ⓒ 변영숙

 
깜깜한 밤 구불구불 시커먼 산고개를 넘을 때는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골이 송연하다'는 말을 그때 처음 실감했다. 차를 달리는 중에도 누군가 차 유리창을 깨고 들어올 것만 같고 유리창에 어른거리는 내 그림자에 간담이 서늘해진 것이 수십 번이었다. 겨우 절에 도착해 작은 나무 책상 하나 있는 텅 빈 방에 들어섰는데 어찌나 낯설고 심란하던지.

다음날 점심 공양이 끝났을 즈음, 외출에서 막 돌아오신 금강 스님이 마을 초등학교 운동회에 다녀오시는 길이라며 차 한 잔을 권하셨다. 스님의 모습은 무척 소탈하고 친근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풍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안내된 방에는 책이 상당히 많았던 것 같은데, 그 방이 지금의 미황사 세심당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을 데우고 차를 우려내는 그 시간이 견딜 수 없이 어색했고 긴장되었다. 그때 스님이 하신 다른 말씀은 다 잊어버렸는데 이상하게도 선문답처럼 탄식하듯 읆조린 '몸뚱어리'라는 단어는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스님은 세속의 욕심, 탐심, 미움, 집착 등 모든 번뇌의 근원을 '몸뚱어리'라고 표현하셨던 것 같은데 살면서 문득문득 그 단어가 생각났다. 쓸데없는 욕심과 집착이 숨통을 틀어 막을 때면 그 단어가 송곳이 되어 막히 숨통을 뚫어 주는 것 같았다.

욕심과 미움을 경계하라는 일종의 주문처럼 그 단어가 무시로 생각나기도 했다. 모든 것이 눈, 코, 입, 몸뚱어리가 만들어내는 헛된 망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금강 스님이 기억할 리 만무인, 그러나 내게는 매우 '인상적이었던 사건' 이후 미황사와 금강 스님의 소식이 전해질 때면 가까운 지인의 소식처럼 반가웠다.

매순간 최선을 다했던 금강 스님 
 

미황사 대웅전 해남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와 달마산. ⓒ 변영숙

 
여러 기사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지난 20년간 스님은 참 많은 일을 하셨다. 직접 지게를 지고 흙과 돌을 나르면서 지역민들과 함께 미황사를 가꾸셨다. 그 결과, 해남 땅끝마을의 보잘 것 없던 미황사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 미황사로 만들어 놓으신 모양이다.  

전교생이 다섯 명에 불과해 폐교에 직면했던 서정분교를 60여 명의 학생 수를 둔 어엿한 학교로 되살려 놓았다고도 한다(15년 전 다녀오신 운동회가 서정분교 운동회였는가보다). 폐교가 되는 것을 막자고 교육청과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주민들의 재능기부로 운영되는 방과 후 프로그램을 만들고 본인도 탁본하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읍내 학생들의 통학을 돕기 위해 음악회를 열어 통학버스도 마련했단다. 2007년도에 5000여권의 책을 기증받아 개관한 작은도서관에는 금강 스님의 주선으로 신영복 선생이 쓰신 '꿈을 담는 도서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해마다 4천~5천명의 희망자가 몰릴 만큼 내실있는 수련프로그램과 외국인을 위한 템플스테이도 정착시켰다 한다. 스님의 손길을 거친 미황사 산사음악회와 괘불탱화제는 가을이면 수 천명이 찾아오는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로 자리잡았다.

신문에 난 금강 스님의 얼굴은 강가의 조약돌처럼 모난 곳 없이 둥글둥글하고 윤이 났다. 그 얼굴에서 스님이 살아오신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사람들 곁'을 지키는 불교를 꿈꾸고 실천한 종교인의 얼굴이었다.
  

미황사 부도전 미황사 뒷편 부도전, 스님과 마을 주민들이 중장비 하나 없이 맨손으로 일군 '달마고도'로 이어진다. 뒷편의 달마산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같다. ⓒ 변영숙

 
이제 금강 스님은 미황사를 떠나 승가 교육이라는 새로운 길을 가신다고 한다. 스님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매순간 정성스럽게 살았기에 아쉬움없이 떠난다.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을 사랑하고 가꾸고,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그러면 더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말을 남겼다.

지역민들에게 미황사라는 아름다운 절과 따뜻한 마음을 남기고 떠나는 스님의 뒷모습이 달마산에서 바라보는 남해의 낙조처럼 아름답다. 떠나야 할 때 떠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추한지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금강 스님의 모습이다.

15년 전 스님이 좋아하는 길이라며 내게도 걸어보라고 권하셨던 절 뒷편 달마산으로 난 산책로는 스님과 주민들이 중장비 하나 없이 맨손으로 가꾼 명품 숲길 '달마고도' 길이 되었다는 소식이다.

내년 2월이 되면 스님은 완전히 미황사를 떠나신다. 그 전에 스님도 한 번 더 뵙고 예쁘게 변신한 미황사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은 바빠지는데 코로나19가 발목을 붙잡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에 실린 사진은 모두 2011년도에 촬영하였습니다.
#미황사 #미황사 금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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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한국여행작가협회정회원, NGPA회원 저서: 조지아 인문여행서 <소울풀조지아>, 포토 에세이 <사할린의 한인들>, 번역서<후디니솔루션>, <마이크로메세징> - 맥그로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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