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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네 인생도 참 쉽지 않았지?

스물여섯 딸을 보며 떠올린 나의 스물여섯... 어떤 일이 있어도 너를 응원해

등록 2020.12.31 17:23수정 2020.12.31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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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대로 할 것이지.


크리스마스였던 그날 너는 평상시에 잘 입지도 않던 원피스를 입고 굽이 낮은 부츠를 신고 나갔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 아르바이트생인 너는 다가오는 생일 다음 날은 휴가를 냈다며 크리스마스 근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듯했다.

평소와 다르게 멋을 내고 나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며 특별한 날이니 기분 전환이 필요했거니 생각했다. 그렇게 출근했던 네가 두 시간쯤 지나 다리를 절뚝이며 들어왔다.

"버스 타려고 뛰다가 발목을 삐끗했는데 발목에서 뚜두둑 소리가 났어."

조퇴를 하고 왔다는 너의 오른쪽 발목 복숭아뼈 부근이 약간 부어 있었다. 병원에 가보자고 했지만 너는 참을 만하니 좀 있어 보자고 했다.

다음날인 26일은 너의 스물여섯 살 생일이었다. 생일날 아침 미역국을 먹고 병원에 갔던 너는 인대 일부가 파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스물여섯 생일에 축하 선물이 아닌 부상을 선물 받다니.
 

유학 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간의 생활비라도 벌어야 한다며 시작한 카페 알바. ⓒ envato elements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이 쉽지 않았다. 공부를 좀더 하고 싶다던 너는 고민 끝에 학기 중 교환학생으로 갔던 독일 대학으로 유학을 결정했다. 유학 생활을 하기 위해 얼마간의 생활비라도 벌어야 한다며 일 년간의 유예기간을 두었고, 바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한 것이 지금 일하는 카페였다.


일을 하면서도 너는 혹시 필요할지 모른다며 한국어강사 자격증 공부를 시작했다. 얼마 후면 한국어 강사 자격증이 발급될 것이고 넌 계획대로 앞으로 100일 정도만 더 일하면 그만두고 본격적인 유학 준비를 할 예정이었다. 

집안의 맏이로 태어나 기대와 사랑을 넘치도록 받던 너였다. 그런 네가 커피숍 서비스직으로 일하며 온갖 진상 손님과 갑질 손님을 응대하다 몇 번씩 울고 들어오는 날도 있었다. 나는 그런 네 잔에 맥주를 부어주는 것밖에 아무런 도움이 못 되는 엄마였다. 그러고 보니 너의 스물여섯도 참 다사다난 했구나.

난 스물여섯 이때에 너를 낳았다.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 밤에 아빠 친구네 집에서 집들이를 겸해서 연말파티를 열었다. 밤새 놀다가 다음날 집에 왔는데 양수가 터졌다. 스물여섯, 스물여덟 생각해보면 그때 우린 둘 다 경험도 없고 철도 없는 부모였다.

그렇게 입원해 하루를 꼬박 지나고 28시간 만에 2.5킬로그램의 너를 낳았다. 그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고 예정일보다 3주나 빠른 조산이었다. 반쯤은 죽었다 깨서 모성이 뭔지 차마 알아챌 겨를도 없이 그렇게 나는 어미가 되었다.

난 그렇게 네 나이에 너를 낳으면서 어른이 되었는데, 넌 왜 그렇게 내겐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고 네 앞가림을 하며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마음에는 넌 그저 내게 첫정을 준 그 작은 아기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제는 동생들과 나눠 가지는 사랑 말고 온전히 너 혼자 차지할 수 있는 사랑도 하고 독립된 인간으로 살라고 주문 하지만 실제로 그런 날이 오면 난 어떻게 너를 보낼까. 목표일까지 100일쯤 남았다고 했지만 이번 부상을 겪으며 나는 이쯤에서 카페 일을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아빠의 사업이 예전처럼 정상적으로 운영이 됐다면 너는 아르바이트 없이 이미 독일에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아빠의 한숨이 길고 깊었다. 그런 널 보는 아빠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이었을 거라 짐작한다.

그럼에도 그런 너를 응원해.
 

스물여섯. 무엇을 도전해도, 무얼 해도 늦지 않은 나이. 그 자체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나이. ⓒ envato elements

 
스물여섯. 무엇을 도전해도, 무얼 해도 늦지 않은 나이. 그 자체로 반짝반짝 빛이 나는 나이. 내가 스물여섯에 너를 낳은 기적같은 일을 해냈듯이 너 역시 너만의 기적을 이루어낼 거라 믿어.

아니, 그것이 꼭 기적같은 일이 아니어도 좋아. 오늘을 사는 네 자신 존재 자체만으로도 너는 이미 나에게 기적이니까.
#스물여섯을 응원해 #커피숍 아르바이트생 #취준생을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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