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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의 잭 니콜슨이 내게 알려 준 것

[마흔이 서글퍼지지 않도록] 답답하기만 하던 '제자리걸음'의 진짜 의미

등록 2020.12.31 09:03수정 2021.01.12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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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마흔을 위해 글을 씁니다. 제 나름의 씩씩함이 다른 이들의 씩씩함까지 낳게 하면 좋겠습니다.[편집자말]
가슴이 뛰고 숨이 차서 열심히 뛰고 있는 줄 알았다. 그리고 그만큼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힘이 들어 잠시 멈춰 선 어느 날, 돌아보니 제자리 뛰기, 아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착각이었다. 초조함과 불안감이 전력질주와 똑같은 효과를 낼지 누가 알았겠나. 그렇게 40대에 들어선 나는 우두커니 멈춰 섰다.


20대 땐, 30대가 되면 뜻하는 바를 이루었으리라 생각했고, 초조했던 30대의 끝자락에선 더 나은 40대를 기대하며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멈춰서 보니, 막연한 희망은 50대쯤으로 보내고 막막함을 마주해야 할 판이다. 현실이라는 막막함이 얼마나 큰지 작은 희망은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백세 시대라니 몸을 사리면서 살면 언젠간 그 작은 희망에 닿을 거라 믿는다. 속상한 것은 이렇게 아쉬워하며 멈춰 서 버린 내 모습이다. 그렇게 긴 시간에도 여전히 충분히 여물지 못해, 지난 시간과 노력을 부질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참 못나 보인다. 마음 추스르고 다시 발을 떼면 될 것을, 그 마음 추스름이 쉽지가 않다. 40이 되면 조금은 더 어른스러워지고 싶었는데, 역시 큰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기운이 필요할 땐 옛날 영화

이런 우울한 기분엔 역시 영화다. 요즘은 새로운 영화보다 봤던 영화, 오래된 영화를 찾아본다. <굿 윌 헌팅>, <버킷 리스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리틀 포레스트> 등. 다시 봐도 좋은 영화들은 볼 때마다 잊었던 무언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이전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만든다.
 

좋아하는 옛 영화 잭 니콜슨을 그냥 좋아하게 된 영화들. ⓒ 남희한



아내가 보지 못했다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보며 자연스레 손을 잡았고, <굿 윌 헌팅>은 각자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지금의 행복을 일깨우게 했다. 낯간지러운 말로 적긴 했지만,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영화 탓이다. 좋은 영화는 그런 감성을 일으키는 힘이 있다.


연말 분위기에 편승해 일주일에 영화 한 편씩을 보던 우리는 <버킷 리스트>를 시작으로 잭 니콜슨 주연의 영화를 연달아 보게 됐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모두 명작이다. 비록 오래되어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그 예스러운 분위기가 영화 감상에 걸림돌이 되진 않았다. 오히려 감성을 더 자극했다. 마치 지직거리는 LP판으로 음악을 듣는 듯한 멋스러움이 있었다.

영화에서 잭 니콜슨은 성공한 작가나 사업가로 등장한다. 부유하면서 괴팍한 이미지가 뭔가 외모와 딱 들어맞는다. 그의 대사 하나 행동 하나가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그러다 보니 극중 인물이 마치 한 인물인양 생각되어 다른 영화를 보고 있음에도 시리즈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세 영화에는 남자 주인공이 같다는 것 외에도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고집스러우리만치 요지부동이던 주인공이 자신의 세계를 어렵게 변화시켜 간다는 스토리가 그것이다. 돈과 쾌락만 추구하던 기업가가 사람과 의미란 범주에 발을 디디고, 심한 강박증을 가진 안하무인 작가는 타인과 얽혀버린 삶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

관객의 눈에는 변화에 혼란스러워하며 조금씩 변해가는 주인공이 보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 변화를 애써 무시하거나 눈치 채지 못한다. 우리에겐 미소 짓게 만드는 미묘한 변화들이 주인공에겐 영 거북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껄끄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변화를 스스로 만끽하는 순간, 어느새 영화는 훈훈하게 마무리 된다. 그리고 그 훈훈함은 잘 정돈되어 내 마음에 자리한다.

영화의 따뜻한 위로
 

제자리걸음의 진짜 의미 서서히 일어날 변화를 위해 단단히 다지고 있는 중이랍니다. ⓒ 남희한



영화를 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좋은 영화의 파워 오브 감성 덕이기도 하지만, 변화라는 것이 그리 쉽게 단기간에 이뤄지는 게 아님을 다시금 떠올려서다. 그리고 정작 본인은 그 변화를 눈치 채기 쉽지 않음을, 그럼에도 분명히 변하고 있음을 영화를 보며 곱씹었다.

나 역시 조금씩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모르고 있을 테다. 분명하다. 나도 내 삶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아마도 비슷한 증상일 거다. 그래서 바라건대, 내게도 영화에서처럼 변한 내 모습을 알아채고 한껏 미소 짓는 날이 오길 바란다. 아무래도 한 편의 삶도 해피엔딩이면 좋잖아요.(웃음) 언제나 내 발 밑엔 작은 밭이 있음을 이제는 잊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나의 잦은 제자리걸음이 서서히 움틀 작은 변화를 위한 바닥 다지기라는 것도.    
영화를 보고나서, 나도 멋지게 변하고 싶다는 말에 아내가 한마디 한다.

"오빠, 많이 변했어! 표정도 예전보다 훨~~씬 온화해지고 말도 많~~이 예뻐졌고."

에이~ 내가 뭐... 하며 얼굴을 붉히려는 순간, 아내가 말을 이어간다.

"예전엔 얼~~마나 못됐었다고..."

붉히던 얼굴이 시뻘게진다. 아, 이것은 칭찬인가 타박인가. 그래도 차마 지금의 훈훈함을 잃고 싶지 않아 어금니를 꽉 깨물고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일명 살인미소! 순간 조커로 열연할 때의 잭 니콜슨의 미소를 재현해 버렸다. 본의 아니게 달콤 말랑 울컥의 마지막에 다른 의미의 울컥을 추가해 버렸지만, 뭐... 어쨌든 정말로 변하고 있긴 한가 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그림에세이 #마흔 #영화감상 #잭니콜슨 #제자리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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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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