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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갱년기 얼리어답터'입니다

어느 날 찾아온 갱년기... 완경은 절망이 아닌 새로운 시작

등록 2021.01.04 09:59수정 2021.01.04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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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경 용품들. ⓒ pixabay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매달 그 유혈 낭자한 전쟁에 한 번쯤 이런 생각 안 해본 여자가 있을까. 생리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중학교 때 생리대 수업 날이었다. 그때 선생님의 눈동자는 창피해하고 있었다. 남자 선생님이 행여 볼까 불안하여 호기심 많은 여중생들의 피드백 따위는 무시하고 얼른 수업을 끝냈던 걸로 기억한다. 사회가 생리에게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그때 들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포유류라면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폐경. 나는 전부터 폐경을 일찍이 바랐다. 나에겐 필요 없는 임신. 지속적 생리는 꽤나 비효율적이다. 여성으로서 끝났다는 심리적 상실감 따위는 나에게 없다. 호르몬에게 애쓰지 말라고 귀띔한 지 오래. 내가 진작 말했잖아, 난 됐다고. 여하튼, 그동안 고생했다. 이제 35년간 피 튀기는 전장이었던 내 몸을 아기처럼 보살펴야겠다. 이제부터 치를 '늙음'이라는 새로운 잔치를 위해서라도.

사거리 한복판에서 '당당한 생리대'를 퍼포먼스 하는 여고생들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래 맞아. 저거지'. 그 선생님이 비교되어 떠오르면서 동시에 드는 생각은 '아이고, 난 이제 다 끝났지롱~'이었다. 허리 수술 날이 하필 딱 생리 날이었다. 상관은 없다. 상관없을 줄 알았다. 수술의 고통이 그야말로 대단해서일까 그날 이후로 내 생리는 없었다. 폐경인 것이다. 시험날, OT날, 수련회, 물놀이, 여행, 데이트 날들이 그것과 겹치기를 용케 잘 피해왔더니만 결국 수술 날과 겹치며 대장정의 막을 내릴 줄이야.

모성은 본능? 글쎄, 난 모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본능이라기보다 진화의 산물이라고까지 생각하는 한 사람이다. 여성 몸의 일생 역시 마치 호르몬이라는 극작가가 잘 짜 놓은 생애 주기 시나리오 대본 같다고나 할까. 이런 몸을 배제한 내 자아가 가능할까? 세계와 경험들을 해석하는 데는 나의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몸도 그 기능을 한다. 그 도구로서의 사회적 몸은 결국 생물적인 몸의 프레임에 기반을 둔다. 

사춘기부터 나를 지배한 호르몬은 탄력 있는 피부와 봉긋한 젖가슴을 장착해주었다. 교교한 눈웃음과 아이가 예뻐 보이는 성스러운 착각까지도 내 인식이라기보다 이 호르몬의 농단이지 싶다. 이 이기적 호르몬에게는 번식이라는 위대한 사명이 있다. 1%의 임신 가능성만 있어도 몸 구석구석 다양한 지원 사격을 해야 하겠지. 임신을 향한 호르몬의 입장이 있겠지.

어느 날 그 입장을 철회한 것이렸다. 여성들은 안다. 호르몬의 화력이 점점 불규칙해지고 약해지고 있다는 것을. 번식의 불씨는 꺼져가고 이제 서식지를 포기하고 있다. 전쟁은 끝났고 피부도 젖가슴도 눈웃음도 서서히 전의 것이 아니게 된다. 호르몬은 안다. 이제 저 입장에서는 쓸모없는 몸이라는 것을. 내 몸이 비로소 호르몬의 지배에서 벗어나 만신창이가 되어 나에게로 왔다.


안 겪은 사람들은 모르는 냉탕과 열탕

폐경을 예감하긴 했었다. 갱년기 증상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부지런도 하지. 시작은 꼭 감기처럼 으슬으슬했다. 내과만 드나들며 감기약을 주야장천 복용했다. 워낙에 평소 약골에 감기를 달고 사니 그러려니 했다. 갱년기는 남 일이었으니까.

이게 갱년기구나 한 것은, 갑자기 땀이 줄줄 흐르고 후끈거리고 더워서 열났다가 추워서 벌벌 떨다가를 경험하고부터였다. 바로 알 수가 있었다. 상체는 불이 나고 얼음물 속에 담그고 있는 것처럼 하체는 늘 시리다. 한여름에도 양말을 벗을 수가 없었다. 체온 조절 기능은 상실했고 온 몸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 냉탕과 열탕 사이를 안 겪은 사람은 진짜 모른다.

자다가 아파트에 불이 났다 싶어 깨고는 한다. 웃옷을 벗어젖히기를 하루에 골백번을 한다. 흐르는 땀과 그 열과 불쾌감에 샤워나 할 수 있을까. 샤워가 잦을수록 감기 증상은 더 심해졌고 시도 때도 없이 땀이 또 시작하니 하나마나한 샤워가 됐다. 체력 소모에 불쾌감이 반복됐다. 혼자라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이 짜증을 다 받아줄 가족은 무슨 죄란 말인가.

지금은 그렇게 안 한다. 한해 겪고 나니 다스리는 요령을 터득하였다. 우선 그 전조 증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열이 확 달아오르는가 싶을 때에는 하던 것을 다 멈추고 명상하듯이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냥 나를 바라보는 것이고 흐르는 땀과 열을 그냥 느낀다. 그래 너도 힘들겠다. 나에게 인지 호르몬에게 인지 잘 모르겠는 말을 속으로 하며 기다려준다. 불쾌하지 않다.

닥치니 공부가 필요했다. 실제 도움되는 정보가 많이 없어 아쉬웠다. 복사 붙이기 글과 약 광고글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갱년기 약은 복용하지 않았다. 휴식과 독서와 취미로 마음 관리에 애쓴 편이었다. 반드시 에너지를 다 쓰지 않는다. 아침에 눈뜨면 가만히 누워서 몸을 스캔하며 그날의 활동량을 조정한다. 항상 몸에 집중하고 상태를 살피고 아낀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만고의 진리, 유쾌한 생각, 잘 먹고 꾸준한 운동밖에 없다.

그때 회사를 그만둔 일은 내 인생에 정말 잘한 것 중 하나이다. 출근하고 빠르면 한두 시, 늦어도 두세 시면 어김없이 피로감과 무기력감이 찾아온다. 몸이 지하로 지하로 떨어지는 느낌. 눕고만 싶어서 미칠 지경이다. 표시도 안 난다. 출근은 공포스럽고 일을 줄일 방법, 퇴근을 서두를 방법이 없다. 여름에는 에어컨과 싸우려면 꽁공 싸매는 전투복이어야 했으니 직원들의 시선이나 고립감에서 오는 우울까지는 돌볼 여유가 없었다.
 

오늘 오히려 제일 젊은 오늘, 좀 더 체력 있을 때 찾아와 준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 황승희

 
갱년기는 늙음의 시작이 아니다

축하받을 일은 아니더라도 나는 오히려 제일 젊은 오늘, 좀 더 체력 있을 때 찾아와 준 것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벌써 갱년기면 어떻게 해?"라는 지인들의 반응은 어떻게 몸을 관리했길래 그러냐는 듯한 뉘앙스로 들리기까지 한다. 뭔가 큰일 난 거 같은 의미까지 담아서 말이다. 내가 삶을 통째로 잘못 살은 기분까지 들게 한다. 내 앞에 절벽만 있을 것처럼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절벽 아니다. 일거리 먹거리 놀거리 등 전반적인 전환과 성숙을 가져오게 되었다. 인간과 삶을 관조하게 되었다. 갱년기의 본질은 누적된 신체의 스트레스인 것이지 늙음의 시작도 아니고 여성성의 상실은 더더욱 아니다. 자연스러운 시기인 것이다. 그동안 너무 지나쳤으니 나를 한 번쯤 돌아보고 이제 제2의 인생을 새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오히려 갱년기와 그 시기 퇴사야 말로 새로운 제2인생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래서 완경이라고 하지 않나.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아팠지만 좋은 점도 있다. 갱년기 얼리어답터로서 친구들에게 선지식을 나름 전도할 수 있었다.

"친구야. 나처럼 아무 준비 없다가 갱년기를 맞이 하지 말고 나를 보며 너도 지금부터 몸을 살피렴. 너에게 집중하고 너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인생 2막 시나리오를 써보렴. 잘 먹고 꾸준히 운동 잊지 말고."

인생은 언제나 꽃이 아닌 때가 없다. 또 다른 꽃을 피우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갱년기 #폐경 #호르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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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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