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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의 아들로 만주에서 태어나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2회] 간도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이유

등록 2021.01.08 16:58수정 2021.01.08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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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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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바이지역, 우리말로 장백지역이고 백두산이 있다. 이곳에서 발원하는 강이 압록강을 비롯 두만강과 송화강이 있는데 송화강의 지류가 토문강이다. ⓒ 김학록

 
최운산은 1885년 11월 17일 중국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아버지 최우삼(崔友三)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장남의 이름은 최진동(崔振東), 삼남은 최치홍(崔治興), 4남은 최명철(崔明鐵). 장녀는 최명순(崔明順)이다. 차녀는 요절한 것인지 이름이 확인되지 않는다. 

최우삼은 조선말기 만주 연길에서 연변 도태(道台)를 지낸 관리였다. 도태는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나 군수와 같은 한 지역의 행정을 책임맡는 관리를 일컫는다. 부인 전주 이씨는 왕족 출신으로 품격과 위세가 당당했다고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된 최운산 장군 북만주 제1의 대지주이자 거부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 부어 무기구입, 군복 제작, 군량미 조달 등 독립군 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에 혼신을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1977년 뒤늦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최진동 장군과 함께 <봉오동 전투>의 실질적 주역이다. ⓒ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제공

 
최운산의 아버지는 민족의식이 강한 한말의 관리였다. 청국이 간도를 차지하고자 한족(漢族)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자 이 지역이 고유한 조선의 영토임을 들어 설명했으나 실효가 없자 무력으로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연변 도태(道台) 최우삼은 중국의 간도 정책에 맞서 간도 지역이 엄연한 조선의 땅임을 밝히며 청나라 사람들을 연변지역에서 쫓아내고 청나라군과 무력으로 충돌했다. 당시 조선인의 자주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최우삼이 일으킨 무력충돌을 '도태의 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최우삼의 '도태의 난'은 군사적 열세로 청나라 군에 패하고 만다.

전통무술 고단자인 지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최우삼은 명록과 명길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 피신하였다. 

그러자 청나라군이 최우삼과 아들들의 목숨을 걸고 방을 붙이고, 최우삼의 모친인 한씨 부인을 잡아갔다. 그런데 청나라군에 붙잡힌 고조할머니 한씨 부인은 조금도 의기를 굽히지 않고 간도가 조선의 땅이며, 당신의 아들이 조선의 땅을 찾는 일의 마땅함을 밝히며 곧은 자세로 호통을 치셨다. 

그러자 한씨 부인의 기개에 감탄한 청나라 관헌들은 감옥에 가서 매일 문안 인사를 하는 등 고조할머니 한씨 부인에게 예를 갖춰 대하였다고 한다. (주석 1)
  
  

봉오동 전적지. 지금은 봉오동저수지로 물에 잠겨 있다. ⓒ 박도

 
최운산이 24세이던 1909년 가족이 길림성 왕청현 봉오동으로 이주하였다. 길림성의 연길현이나 왕청현은 현재 중국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그가 태어나던 때는 간도라 불리는 조선의 땅이었다. 

최운산과 그 형제 자매가 태어나고 활동한, 특히 봉오동전투를 주도하는 등의 활동 무대는 모두 간도였다. 간도의 역사에 관해 먼저 알아보는 것이 최운산의 생애를 살피는 데 중요할 것 같다. 

간도의 지명은 병자호란 뒤에 청나라 측이 이 지역을 봉금지역(封禁地域)으로 정하고 청국인이나 조선인 모두의 입주를 금지하는 공간지대로 남아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인 섬"이라는 데서 유래한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에 우리 농민들이 이 지역을 새로 개간한 땅이라는 뜻에서 '간도(墾島)'라고 적었고, 또 조선의 정북(正北)과 정동(正東) 사이에 위치한 방향인 간방(艮方)에 있는 땅이라 하여 '간도(艮島)'라고도 적었다. 

간도는 서간도와 북간도로 구분된다. 서간도는 압록강과 송화강의 상류 지방인 장백산 일대를 가리키며, 북간도는 훈춘, 왕청, 연길, 화룡의 네 현으로 나누어져 있는 두만강 북부의 만주 지역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간도라고 하면 북간도를 말한다. 즉 노야령 산맥과 흑산령 산맥 사이의 일대 분지와 혼동강과 목단령 산맥 사이의 분지를 아우르는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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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프랑스 파리의 소시에떼데미데미시용 에트랑제트가 발행한 <까똘리시즘 앙꼬레>에 게재하였던 지도로 바티칸 정청이 조선에 있어서의 교구 관할 영역을 표시하였다(간도와 연해주까지 우리나라 영토로 표시). ⓒ 교황청

 
간도는 원래 우리 땅이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부여, 읍루, 옥저, 고구려가 차지하다가 발해로 이어졌다. 발해가 망한 뒤에 한동안 거란과 여진족이 지배하였지만 조선 초기에 여진족은 이 지역에 흩어져 살면서 '번호(藩號)'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조공을 바치고 대신 생활물자를 교역해갔다. 역사적으로 한 번도 중국의 한족이 간도를 지배한 적은 없었다.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간도는 봉금지역으로 묶이게 되고 오랜 세월 동안 무인지대가 되었다. 여진족은 농업보다 유목과 수렵에 종사하였기에 이 비옥한 땅은 오랫동안 개척되지 못하였다. 

한국인들이 간도를 농경지로 개척하고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철종 말에서 고종 초기에 이르러 학정에 시달리던 함경도 지방의 농민들이 관권이 미치지 않는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게 되었다. 특히 1896년을 전후하여 함경도 지방의 대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이 대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간도지방에 들어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봉오동 전적지 들머리에 '봉오골 반일전적지' 기념비. ⓒ 박도

 
일제에 의한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병탄으로 국권을 빼앗기게 되면서 항일운동의 새로운 기지를 구축하고자 간도로 건너간 애국지사들도 많았다. 이들은 일제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간도에서 항일운동의 기지를 만들고자 하였다. 조선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하면서 농토를 빼앗긴 더 많은 서북지역 농민들이 간도로 이주하였다.

1910년 9월부터 1911년 12월까지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은 2만5000명이 넘었고, 1926년 간도지방에 거주한 한인의 호수는 5만 3000여 호인데 중국인은 1만여 호에 불과했다. 우리나라 사람이 훨씬 많을 만큼 간도지방은 한국인들의 생활터전이었다.

간도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한인사회가 형성되면서 인적 물적 자원의 공급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주석 
1> 최성주,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 87쪽, 필로소픽, 2020.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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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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