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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과 약물투여가 같다? 법원 판례에 우는 보험소비자

뒤늦게 대법원 판례 앞세운 흥국화재... 오른쪽은 되고 왼쪽은 안되는 이상한 상황

등록 2021.01.14 12:04수정 2021.01.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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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보험금 문제로 기나긴 싸움을 벌여오던 한 소비자와 보험회사 사이에서 2013년 대법원은 끝내 보험사의 손을 들어줬다. 해당 소비자가 가입한 보험약관에는 외과적 수술 등 '의료처치'로 신체에 상해가 발생할 경우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법원은 약물 투여 역시 수술과 동일한 성격의 의료처치라고 판단해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이런 판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약물 투여는 보험금 지급 면책 조항에 해당하지 않았다.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에서는 지난 2012년과 2013년 "스테로이드 (약물) 치료는 보험약관상 면책조항인 '외과적 수술, 그 밖의 의료처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일관적으로 판단해왔다. 이에 따라 약물 투여 등으로 상해를 입은 보험 가입자는 보험금을 온전히 지급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2013년 약물 투여 역시 수술과 동일한 의료처치라고 판단한 대법원 판례가 나온 후 상황이 달라졌다. 보험사들은 이 판례를 앞세워 보험금 지급을 피하고 있다. 고관절 괴사로 후유증을 겪는 이아무개(39)씨도 그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사건은 지난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씨는 2015년 5월 대학병원에서 재생불량성 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씨는 골수이식 수술을 받았다. 골수이식에 따른 신체 거부 반응을 줄이기 위해 스테로이드 약물 처방도 함께 받았다. 

그런데 지난 2016년 3월, 스테로이드 약물 부작용으로 이씨의 오른쪽 고관절이 괴사되면서 인공 고관절 수술을 받아야 했다. 지난 2007년 흥국화재 상해 보험에 가입한 그는 수술 뒤 별 다른 문제 없이 보험금을 지급받았다. 

이후 2017년 5월 왼쪽 고관절에서도 괴사가 발생해 이씨는 또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이번에도 보험금을 청구했지만 보험금 지급을 미루던 흥국화재는 2018년 1월 돌연 이씨를 상대로 보험금 지급을 하지 않겠다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금감원에 민원을 제기할 수 있다는 사실도 통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씨는 금융당국을 통한 분쟁조정 절차를 밟을 기회도 잃었다.

똑같은 약물치료인데 왜?
 

지난 2013년 대법원은 보험약관 면책사항 중 '의료처치'의 범위와 관련해 "의료인이 질병 치료를 위해 환자에게 약물을 투약하는 행위도 포함된다"고 판결했다. 당시 대법원 재판장은 박병대·고영한 대법관 등이었다. ⓒ 대법원

 
소송 과정에서 흥국화재는 보험금 지급 거절 사유로 "보험자의 임신, 출산(제왕절개 포함), 유산 또는 외과적 수술, 그 밖의 의료처치에 해당하는 경우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는 면책조항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씨가 스테로이드 처방을 받은 것은 '의료처치'이기 때문에 보험금을 줄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이씨가 첫 번째 보험금을 청구할 때는 언급하지 않았던 내용이었다. 

이씨는 "똑같은 약물치료에 따라 동일한 상해를 입었는데 왜 결과가 달라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라며 "한 치 앞의 인생을 모르기 때문에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라도 살아가기 위해 드는 것이 보험인데, 보험사는 지급을 거절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1심과 2심 재판부도 흥국화재의 손을 들어줬다. 스테로이드 처방이 보험사가 명시한 면책조항 중 '의료처치' 행위에 포함된다고 봤다. 지난 2013년 대법원이 의료처치의 범위에 질병 치료를 위한 약물 투약을 포함시킨 것이 결정적 근거가 됐다. 

이씨 측은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씨의 배우자 정아무개(44)씨는 "당시 스테로이드 투여가 유일한 치료였다"며 "스테로이드에 대한 전문 지식 없이 의사의 권유대로 처방 받은 것인데, 병원에서도 별다른 고지가 없었기 때문에 약물 부작용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상고심을 준비 중이다. 

상고심을 준비하는 이씨 측 변호인은 "원심 판단과 일련의 대법원 판결은 이 사건 면책조항을 과다하게 넓게 해석한 것으로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또 금감원에선 의료처치를 수술에 준하는 처치로 한정해 해석했음을 강조하면서 "(대법원 판례의 경우) 소비자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조항으로, 약관규제법상 무효사유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박기억 변호사의 보험클리닉'을 운영하고 있는 박기억 변호사는 "보험계약 당시 보험사가 소비자에게 약물치료로 인한 상해의 경우 보험금 지급이 안 된다는 내용을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대법원 판례가 있다"며 "해당 면책조항이 설명의무 대상이 된다는 것만으로도 소비자에게는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도 대법원 판례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김헌수 순천향대 교수는 <오마이뉴스>와 통화에서 "면책조항 중 의료처치의 정의에 약물 투여가 포함된다는 대법원 판례에 대해선 다시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신의성실의 원칙 측면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외과적 수술과 약물치료를 같은 선상에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면책조항 과다하게 해석, 부당하다"  

시각장애를 가진 자녀를 둔 이씨의 가정은 2년이 넘는 소송전으로 더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 변호사 수임료 등으로 1000만원 가까운 빚도 생겼다. 

이씨는 "경기도에 살고 있는데, 인공관절 수술 이후에는 서울맹학교에 다니는 딸의 통학을 돕는 것이 더 힘에 부치는 상황"이라며 "변호사 수임료 등으로 이미 1000만원 정도 빚을 졌는데, 3심까지 패소하게 되면 보험사 쪽 비용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흥국화재에서 소송 이전에 저에게 금감원 민원 제기도 가능하다고 안내하지 않았던 것이 가장 억울하다"고 했다. 불편한 몸, 경제적 어려움, 향후 패소에 대한 두려움 등은 이씨의 삶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저는 평범하지 않아요. 남들처럼 달릴 수도 없고, 일어서는 것조차 두 손으로 짚어야만 가능합니다.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고, 저희 가정은 점점 몰락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너무 길게 남은 여생을 어떻게 버텨내며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해 흥국화재 쪽 입장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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