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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전태일의 '불쌍한 여공'이 아니다

<열세 살 여공의 삶>의 '여공' 신순애를 통해 본 싸우는 여성 노동자의 삶

등록 2021.01.10 19:47수정 2021.01.10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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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경 중부시장에서 시다로 일할 때의 전태일(가운데). 20살이 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해설책을 찾아 읽기 시작한다. ⓒ 전태일의 집

    
'전태일'을 호명하면 절로 수굿해진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놓은 영웅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전태일이 주머니를 탈탈 털은 돈으로 산 풀빵을 소녀 여공에게 건네는 장면이다. 가난한 풀빵을 받으며 화들짝 기뻐하던 소녀의 배고픈 눈망울이 참혹하게 슬펐다. 문득 궁금하다. 그때 그 소녀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전태일 하면, 그에게서 풀빵을 건네받던 파리한 얼굴의 불쌍한 '시다' 소녀들이 겹쳐진다. 전태일이 가장 연민했다는 시다 여공들은 이렇게 불쌍하고 약한 소녀들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불쌍한 전태일의 누이들로 표상된 이미지와 달리, 당시 "많은 여성 노동자는 남자 형제로부터 부양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독립적 주체일 뿐 아니라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이었다." 

한국 노동사가 이들을 '불쌍한 여공'으로 그리는 것과 달리, 이들은 "1960-70년대의 민주노조 운동의 적극적 주체들로 성장했다." 노동사 주류 담론에서 소외시킨 여성들의 노동사를 자전적 서술로 복원한 기록이 있다.

평화시장의 수많은 시다 중 하나였던 신순애는 그들이 "무엇을 경험했고,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노동자로 성장했는지"를 책 <열세 살 여공의 삶>에 생생히 담아냈다.

1번 여공이 신순애라는 이름을 얻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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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살 여공의 삶 - 한 여성 노동자의 자기역사 쓰기> 표지 ⓒ 한겨레출판




"1966년, 나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을 시작했다."

신순애의 아홉 식구는 고향에서 상경한 후 단칸방에서 살아야 했다. 빈한한 살림에 학교는 언감생심이었고, 열세 살이 되자 더는 놀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지금이면 인권침해라 여겨질 일이지만, 1960년대의 열세 살은 제 입을 해결해야 하는 나이였다. 그렇게 시작한 평화시장 '시다' 일은 어린 신순애에게 고달픈 노동이었지만, 불평할 수 없었다. 그는 16시간 이상을 일하고도 먹고 싶은 빵 하나 사 먹을 수 없게,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의 월급을 받았다."

신순애가 일했던 평화시장 노동자 대부분이 여자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신순애처럼 미성년이었다. 어린 노동자가 종일 다락방에서 무릎을 꿇은 채 일하고 받은 일당은 고작 220원, 당시 커피 한 잔 값이었다. 믿어지지 않지만 현실이었다. "평화시장에서 3년만 일하면 고물이 된다"는 풍설은 이들이 얼마나 고된 노동에 시달렸는가를 말해준다.

신순애 역시 늘 잠이 모자라 피곤에 절어 있었고, 영양상태는 엉망이었다. 평화시장에서의 그의 노동 일대기는 '7번 시다, 3번 미싱사, 1번 오야'로 압축되는데, 그야말로 미싱을 돌리며 잔뼈가 굵은 삶이다. 다림사에서 '1번 오야'로 지내던 1975년, 그는 삶의 일대 전환을 맞는다. 전태일을 만났기 때문이다.

'중등 수업 무료'라는 전단을 보게 된 신순애는 눈이 번쩍 뜨인다. 초등학교 때 월사금을 내지 못해 수모를 당하고, 더 이상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그는 늘 공부에 목말랐다. 끼니를 걱정하는 집안 형편에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했던 순애에게, '중등 수업 무료'라는 여섯 글자는 단박에 미싱으로 박은 듯이 가슴에 새겨졌다. 그날로 청계노조에 꾸려진 노동교실을 찾은 순애는 처음으로 '1번'이 아닌 '순애'로 호명되었다.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는 사람이 되었다, 노동자가 되었다.

전태일의 희생을 밑거름 삼아 청계노조가 세워졌고, 이곳엔 그의 뜻을 기리고 실천하는 사람들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늘 함께하고 있었다. 그는 청계노조 조합원으로 등록하고 노동교실의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1번 여공'이 아니라 '노동자 신순애'가 되자, 새로운 세상이 길을 내주었다.

신순애로 다시 태어난 그는 "밥을 굶더라도 노동 교실에는 꼭" 갈 정도로 열성적인 조합원이 되었다. 노동교실 교사가 은행 통장을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내주자, 그는 버스비를 모아둔 125원을 들고 은행을 찾는다. 신순애라는 이름 석 자가 새겨진 통장을 난생처음 손에 쥔 순간, 그는 "새로운 세상과 만나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근면과 성장을 기치로 내걸고 사용자들이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하도록 방조했다. 당시 '한강의 기적'이라 미화된 경제발전은 남성 노동자의 피땀으로 전유되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 경제 성장은 커피 한 잔 값을 하루 일당으로 받고 뼈가 부서져라 일한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빼고 성립할 수 없다.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고 끊임없는 주문을 걸어 노동자를 미혹했지만, 이 미혹은 개인의 행복이나 성공이 독자적인 노력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지배하고 착취하는 구조 속에서 주조된다는 것을 깨우치는 순간, 박살 난다. 산산이 조각난 꿈의 파편에 맞은 순애는 슬프다. 하지만 슬픔에 빠져 자조하는 대신, 그는 이 구조를 바꾸는 데 힘을 보태기로 한다.

"전태일은 목숨도 끊었는데"라고 되뇌는 순애는, 비로소 전태일이 분신이라는 극단적 죽음으로 남기고 간 가치, '너는 나다'를 선명히 아로새긴다.

'공순이'라 함부로 부르지 마라, 나는 '노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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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살 여공의 삶 - 한 여성 노동자의 자기역사 쓰기> 중에서 ⓒ 한겨레출판

 
노동 교실은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문고리를 용감하게 잡아당기고 열어젖히자,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죽을 것처럼 힘들고 억울했던 노동에 한마디도 할 수 없었던 굴종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박탈된 권리임을 알게 된다.

시커멓게 먼지가 내려앉은 밥, 허리를 펼 수 없는 다락방에서 굽은 등과 목, 가위질로 두꺼워진 엄지손가락의 단추 구멍만한 굳은살, 일회용 생리대를 살 수 없는 궁핍과 면 생리대조차 제때 갈 수 없어 겪은 고통, 덮치는 수마와 싸워야만 했던 수많은 날의 침탈이, 비로소 노동자의 언어로 되살아났다.

너무 오랜 시간 일 시키지 말라고, 일한 만큼 월급을 달라고, 밥 먹고 물 먹고 화장실 갈 시간을 달라고, 요구하게 된 것이다. 이 당연한 요구를 당연하다 여기지 못했던 '공순이'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노예가 노예임을 자각하는 순간, 혁명은 필연이다.

단합된 노동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다. 시간을 쪼개서라도 연대 시위에 참가해 '퇴직금을 지급하라'고 외친 싸움은, "수동적 '공순이'를 자존감 넘치는 노동자로 만든 사건"이 된다. 노동자 정체성을 탑재한 이들은 '6시 미싱 끄기 운동'을 점화시켜 '노동시간 단축 농성'으로 불길을 돋운다. 싸우는 여자들이 된 노동자에게 투쟁의 장은 억눌려 온 인간성을 발현하는 축제의 장이기도 했다.

'공순이'로 무시당하던 그들이 권리를 자각하고 이를 요구하면서 키워나간 노동자 자의식은 투쟁하는 운동가의 주체성으로 확립된다. 각성한 노동자는 더 나은 노동 환경을 위한 요구를 더 이상 강자의 선의에 기댄 시혜의 형태로 용납하지 않는다. 평화시장 광진복장의 '퇴직금을 지급하라'는 시위에 연대해 이를 쟁취하고, 이어 노동시간 단축 운동을 대성공으로 이끌면서, 여성 노동자들은 자존감 넘치는 노동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러나 들불처럼 번진 여성 노동자 투쟁은 1981년 전두환 정부의 노동조합 강제 해산으로 고사의 위기에 처한다.

노조에 철퇴를 내리기로 작정한 전두환 정권의 탄압은 극악했다. 분단의 상황을 정권 유지에 활용한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들이대 노조 노동자를 '빨갱이'로 몰아 감옥에 보냈다. 있지도 않은 '빨갱이'를 가공하며 벌인 인권침해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게다가 취조 과정에서 "국가 권력은 70년대 여성 노동 운동가들을 '성고문'을 옭아매고 있었다."

1986년 성고문 피해자인 허명숙 (부천 성신 주식회사)은 경찰 조사 중 성고문을 당했다고 폭로했지만, 심대한 인권침해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반면 같은 해 서울대생이었던 권인숙이 성고문 피해 사실을 폭로하자, 이는 대대적인 사건으로 공론화되어 진상이 파헤쳐진다. 같은 '성고문' 사건에도 다른 취급을 당하며 차별당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신산한 처지가 애달프다.

결국 '빨갱이'가 된 신순애는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된다. 이곳에서의 생활 기록은 여성 노동자들이 얼마나 고단한 삶을 살았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자유가 박탈됐을지언정 먹고 입고 자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매일은, 소녀 가장 노릇하며 가난과 폭력에 시달렸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휴가와도 같은 시간이 된다. 평생을 통틀어 내일 걱정 없이 먹고 자본 유일한 시간들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는 '웃픈' 아이러니가 벌어진 것이다. 신순애는 감옥에서 난생처음 우엉과 연근을 먹어보았다.

감옥에서의 역설은 원풍노조 장남수의 수감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 구치소 생활을 하면서 우리 노동자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살아왔는지를 재삼 확인했습니다... 수감된 사람들이 먹는 음식보다 더 못한 음식을 먹으며 방세 걱정, 연탄 걱정으로 쪼들리며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해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의 고백은 그들이 무엇을 빼앗기며 살았는가를 보이는 동시에, 그럼에도 그들이 삶에 무릎 꿇지 않았음을, 그리고 마침내 투쟁의 장에서 결코 자신의 목소리는 빼앗기지 않겠다고 사자후를 토해내게 한 결기를 증거한다. 노예성을 탈각하고 분연히 일어선 여성 노동자들의 정의감과 분노가 사무친다. 이렇게 치열하게 싸워온 여성 노동자들을 누가 '불쌍한 여공'이라 부르는가.

출소 후라고 신순애의 삶이 꽃길일 리 없지만,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키우며 엄마가 되어서도 전진하는 삶은 멈추지 않았다. 초등 중퇴였던 그가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하더니 마침내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치게 된다. 과제로 <전태일 평전>의 독후감을 쓰다, 그는 주류 노동 담론에서 여공들의 역사가 철저히 지워졌음을 통감한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싸웠는지는 노동사 기록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여공의 노동 인생을 적기로 한다. 석사 논문을 생애사 서술 형태로 쓴 신순애의 여성 노동사가 바로 <열세 살 어린 여공의 삶>으로 거듭났다. 책을 읽으며 독자는 여공 신순애에 이입되어 같이 울고 분노하는 '나'를 보게 된다.

'나'(신순애/여공)는 결코 전태일의 불쌍한 여공이 아니었다. 이들은 끈질기게 싸웠고, 이들이 남긴 투쟁 역사의 계보는 지금의 싸우는 여성 노동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2021년에도 멈추지 않을 이들의 싸움에 경의를 담아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에도 게시됩니다.
#여성 노동자 #<열세 살 여공의 삶> #신순애 #여성 노동 투쟁 #청계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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