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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문 대통령에 찬물을 끼얹었나, 민주당이다

[주장] 산재사망률 절반으로 줄이겠다던 대통령... 중대재해법 알맹이 뺀 집권여당

등록 2021.01.11 13:12수정 2021.01.11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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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이 가결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중대재해법)이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 법안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청원의 취지를 담은 원안인 강은미 정의당 의원의 법안을 비롯해 노동계로부터 비판받던 정부안보다도 한참 후퇴했다.

처벌수위가 낮아지고(하한 3년→1년), 5인 미만 사업장은 아예 적용이 제외됐다. 중대재해를 야기한 사업장에 인허가권을 행사한 기관의 장이나 상급자인 공무원이 직무를 게을리했을 경우 처벌하는 조항을 빼놓고, 총칙에선 공무원 처벌규정을 삭제하지도 않은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서도 3년 유예조항을 둬 말 그대로 '누더기'가 됐다.

중대재해법은 어쩌다 누더기가 됐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장면이다. 저임금 해소를 위해 최저임금을 현실화했다가 기업의 요구에 굴복해 산입범위를 확대하면서 누더기가 된 최저임금 입법이 그랬다. 공공부문에서 적어도 모범사용자로서 비정규직을 차별 않겠다며 필수 업무에 대해 정규직으로 전환한다고 해놓고 자회사에 욱여넣어 정규직-비정규직 갈등을 조장했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화 정책도 마찬가지다.

정책·입법 추진과정에서 이해관계자 의견을 수렴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처럼 원칙 없이 정책·법안의 본질을 훼손한다면 무능력한 거다.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중대재해법은 노동존중 사회를 표방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이 20대 대선에서 공약한 사항이다. 법 제정과 정책 추진 과정에서의 원칙은 기업의 비용보다 노동자의 죽음을 방지하고 산업재해율을 낮추는 '생명'과 '안전'에 방점이 찍혔어야 했다.

이번에도 여당은 기업활동이 위축된다며 처벌수위를 낮추자는 경제단체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한 영세사업장의 안전관리역량이 취약하다며 5인 미만 사업 적용제외를 주장한 중소벤처기업부의 의견을 앞세워 윤호중 법사위원장 이름으로 '대안' 법률안을 만들어 본회의에 상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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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단식에도... 눈물 쏟은 김용균 어머니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된 후 고(故)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관 앞 중대재해기업처벌법제정운동본부 해단식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왼쪽은 고(故)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씨. ⓒ 공동취재사진

 
중대재해법 제정의 계기가 된 고 김용균씨의 어머니 김미숙씨를 비롯해 10만 명의 소망이 담긴 '안전한 일터와 사회를 위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에 관한 청원'은 본회의에 올리지 않기로 결정됐다. '대안' 법률안에 김씨 등의 청원의 취지가 달성됐기 때문이란다. 청원인들은 "우리의 의견을 들어 달라"면서 아니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본회의에서 중대재해법이 통과된 순간 법 제정을 청원한 시민 10만여 명 중 한 사람인 김미숙씨는 절망의 눈물을 흘렸다.

사업주가 안전조치를 위반해 근로자가 숨지면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최정학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지난 2007~2017 산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개인(1만1547건)과 법인(5571건) 중 재판에 넘겨진 건 개인 613건, 법인 265건으로 평균 5%가 채 안 됐다. 그중에서 징역형이 선고된 것은 60여 건, 형량은 평균 10.9개월에 불과했다. 137건이 집행유예 됐고 478건이 벌금을 냈는데 개인 벌금은 평균 421만 원, 법인 벌금은 평균 448만 원이었다. 이마저도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아닌 중간관리자나 일선 노동자에게 책임이 떠넘겨졌다.


이처럼 느슨한 산안법으로는 기업이 제도적으로 철저히 안전관리에 나설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중대재해를 '기업범죄'로 취급해 산재를 예방하자는 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의 취지였다. 사람이 죽었을 때 부담해야 할 비용이 예방을 위한 투자비용을 압도하도록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유해·위험방지 의무를 위반해 중대재해를 발생시킨 사업주와 경영책임자가 최소 3년 이상의 징역으로 하한을 두도록 대폭 형량을 올린 것은 이 때문이다. 적어도 그 정도는 돼야 기업과 경영책임자가 안전을 비용으로 치부하는 태도를 벗어나 산재예방에 나설 것이다. 

그러나 통과된 중대재해법에선 기존 3년의 이상으로 정한 하한선이 1년 이상의 징역으로 낮춰졌다. 경제단체와 국민의힘은 '과실범에 대해 너무 가혹하다'며 격렬하게 반대했고 민주당은 이를 너무나도 쉽게 수용했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어린이 안전에 유의해 운전해야 할 의무를 정하고, 이를 위반해 어린이를 사망케 하는 경우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따라 3년에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한 '민식이법'이나 음주운전으로 자동차를 운전해 사람을 사망케 한 경우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음주운전치사죄로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하한을 두고 상한을 두지 않은 것과 비교하면 같은 성격의 중대재해 예방 의무 위반에 대해 하한을 1년으로 낮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의 '산재사망자 축소 방침'에 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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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와 김태년 원내대표 등 지도부가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문재인 대통령의 2021년 신년사를 시청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더욱 큰 문제는 이번에 통과된 중대재해법 처벌규정에서 5인 미만 사업장이 아예 제외되고 50인 미만 사업장에도 3년간 적용을 유예했다는 점이다. 5인 미만을 포함 50인 미만 사업장은 전체의 98.8.%를 차지하며 전체 산업재해중 76.6%가 이곳에서 발생한다. 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5인 미만 사업장은 중대재해 예방의 '범위가 넓은 사각지대'로 남는다. 고용노동부의 '사업장 규모별 산업재해 사고 사망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5인 미만 사업장 산재사망자는 전체 9529명 중 3022명으로 약 31.7%의 비중을 차지한다.

지금도 하루에 7명, 연간 약 2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일터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이 수치는 누그러질 기세가 안 보인다. 그런데 법 공포 후 시행까지 1년을 포함해 4년을 기다렸다가 법 적용을 한단다. 결국 국회가 통과시킨 이 법은 4년간 지금과 같은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자는 뜻과 다르지 않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산업안전 정책과도 배치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에 교통안전, 자살예방과 함께 산업안전을 3대 과제로 설정하고 '국민생명지키기 프로젝트'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이를 통해 2022년까지 산재사망률을 반으로 줄이겠다 호기롭게 선언했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1개월 한 차례 점검회의까지 개최하며 열의를 올리고 있는데, 여당이 전체 산업재해의 약 76%가 일어나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중대재해법 적용을 미뤄놨으니 2022년까지 산재사망률 절반 목표 달성은 이미 물 건너 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기업의 입장만 대변하는 정부 각료와 여당이 대통령의 정책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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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안전 때문에 눈물 짓는 국민 단 한명도 없게 만들겠다' 2017년 4월 13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유가족, 가습기살균제피해자 가족, 삼성전자 반도체 피해자 가족 등이 주최하는 ‘생명 존중 안전사회를 위한 대국민 약속식’에 참석해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인 한혜경 씨 모녀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 유성호

 
2017년 벚꽃 흩날리던 봄 우리 국민들은 왜 문재인 정부에 압도적 지지를 보냈나. 세월호 참사로 스러져간 학생들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겠다던 문 대통령의 진심을 믿어서다. 2017년 4월 광화문 광장에서 대선일정으로 분주한 가운데도 삼성전자에서 백혈병으로 딸을 잃은 유족의 손을 잡고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 다짐했던 문 대통령을 기억한다.

그라면 자신이 공약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통해 기업의 탐욕 때문에 시민과 노동자가 위험해지지 않는 '사람이 먼저'인 나라를 만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기업과 유착하는 경향성을 보이던 박근혜 정부와는 다를 것이라고 믿었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외치며 비정규직을 남발하던 과거 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여전히 문재인 정부에도 노동자의 죽음은 그치지 않는다. 구의역에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이천의 냉동창고에서 기업의 탐욕으로 꿈도 펼치지 못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들이 산재로 스러졌다. 2018년에 태안화력발전소 컨베이어 벨트에서 산재사고로 사망한 비정규 노동자 김용균씨 사건을 계기로 하청노동자를 보호하겠다며 산안법을 개정했지만, 정작 산재가 많이 발생하는 조선업과 화력발전은 규제하지 않아 '김용균 없는 김용균법'이라는 오명을 썼다. 외주화로 하도급을 할 경우 고용노동부 승인을 받도록 정한 업종에서 조선과 화력발전, 철도에서의 위험 업무 등을 제외했기 때문이었다.

청와대에 '산재현황판'을 만들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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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재해 피해자 유가족 등이 2020년 12월 3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일하다 죽은 2400명을 상징물 세우고 제대로 된 중대재해법 제정, 해고금지, 김진숙 복직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열고 있는 모습. ⓒ 이희훈

 
지금이라도 문재인 대통령이 중대재해법에 대해 법안의 취지가 왜곡된 법 제정 과정을 돌아보고 국회에 이를 바로잡을 것을 제안하기 바란다. 그리고 추상적 숫자로 가득한 청와대 일자리 상황판 대신 구체적 슬픔과 고통의 수치인 산재사고 사망자 현황판을 당장 설치할 것을 권한다.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지시해 산재로 다치고 죽는 이들을 파악해 보고하고, 그들이 왜 다치고 죽었는지 등 산재발생의 경로를 파악해 실시간으로 산재보험 가입자들에게 재난 알림으로 전하게끔 지시하길 제안한다.

또한 구인구직 사이트에는 산재다발 사업장에 대한 정보를 공시해 구직자들이 채용지원 과정에서 일터 안전을 채용지원 여부에 판단 기준으로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산재다발 사업장은 '후진 회사'라는 사회적 낙인을 찍어야 한다.

본 취지를 잃어버린 법으로 만족할 때가 아니다. 산재공화국에 경종을 울려야 할 때다.
덧붙이는 글 이동철 기자는 한국노총 조직확대본부 부천상담소에서 노동상담을 하고 있습니다.
#중대재해법 #산재 #문재인 대통령 #산재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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