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14 18:58최종 업데이트 21.01.14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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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노동자상(경남 창원) ⓒ 윤성효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인'만 차별한 게 아니다. '노동자' 역시 차별 대상이었다. 한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일본의 차별과 무시는 지금도 여전하다. 강제노역 노동자들에 대한 체불 임금을 여태까지도 해결해주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1인당 100억, 10억도 아니고 1억 원씩만 지급하라는 '매우 유리한 조건의' 배상 판결도 외면하고 있다.

그런 차별과 무시가 식민지배 막판의 강제노역 때만 있었던 것은 당연히 아니다. 식민지배 전 기간에 걸쳐 일상화 돼 있었다. 만 31세의 청년 이봉창이 수류탄을 집어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1932년 1월 8일에 이봉창 의사가 현 일왕의 할아버지인 히로히토에게 폭탄을 던지게 된 최초의 동기는 한국인 노동자 차별에 대한 분노였다. 3·1운동의 해인 1919년 8월에 용산역 시용부(試傭夫, 임시 노동자)로 취업했다가 이듬해 1월 16일 정식 역부(驛夫, 역무원)가 된 그가 느낀 것은 포근한 직장 분위기가 아니라 냉랭한 차별 분위기였다.

의거를 단행한 뒤 붙들려 도쿄 도요타마 형무소에 갇혀 있을 때 작성한 '상신서(上申書)' 명의의 자술서에서 그는 분노를 품게 된 최초의 사연을 털어놓았다. 홍인근 전 동아일보 기자의 <이봉창 평전>에 따르면, 이봉창은 상신서에 이렇게 적었다.
 
그 당시 일본인은 정말로 행운아였다. 1년 내지 1년 반 만에 용인(傭人)에서 용원(傭員)으로 쉽게 승급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해 조선인은 아무리 일을 잘하고 착실하게 근무해도 1년이나 1년 반 만에 도저히 전철수까지도 올라갈 수가 없었다. (중략)

몇 년 전 나보다 1년 또는 1년 반 뒤에 채용돼 내가 일을 가르쳤고 내 밑에서 일했던 일본인들이 지금은 전철수가 되고 조차계(操車係, 배차계) 견습이 되어 거꾸로 내가 그들 밑에서 일하는 처지가 됐다.
 
노동자 차별과 한국인 차별이라는 이중적 불합리에 분노해 훗날 항일투사로 변신한 이봉창 의사가 이 시대의 '별종'이 아니었다는 점은, 비슷한 시점에 '원산 총파업'을 일으킨 노동자들의 사례에서도 증명된다.

노동자 구타에서 시작

원산 총파업은 이봉창이 히로히토를 겨누기 3년 전인 1929년 1월 14일 개시됐다. 이 파업은 그해 4월까지 이어지며 한국 노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2000년 <노동사회> 제40권에 실린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교육실장의 논문 '원산총파업: 일제하 노동운동의 꽃'은 "최초의 발단은 1928년 9월 원산 교외 문평제유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에서 시작됩니다"라며 발생 경위를 이렇게 설명한다.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에 있었던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의 문평저유소는 영국인이 경영하던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지배인을 제외하고 모든 간부가 일본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인 노동자에게 심한 민족적 멸시와 차별대우를 하는 동시에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강요하며 조선인 노동자의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다마라는 일본인 감독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하는 일이 잦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28년 9월초 또다시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분개한 조선인 노동자 120여 명은 구타 사건의 주범인 고다마의 해임을 포함한 5가지 요구를 걸고 파업에 돌입합니다.
 
이 파업은 지역 노동자들의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가 그들의 편에 서서 사측과 협의를 시도했고, 지역의 운송 노동자들도 동맹파업을 응원해줬다. 이 회사 사무직원들도 사표를 던지며 동조했다.

회사는 일제 경찰을 움직여 노조 간부들을 검거하도록 하는 한편 일본인들로 구성된 대체인력을 투입했지만, 허사였다. 일본인 노동자들이 현장의 파업 분위기에 부담을 느끼고 모두 돌아갔기 때문이다. 결국 파업 20여 일 만에 회사는 백기를 들며 문제 해결을 약속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회사는 들었던 백기를 도로 내려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바꿨다. 취업규칙을 이전보다 개악해 노동자들을 우롱하기까지 했다.

전태일재단 이사를 역임하고 중앙노동위원장을 지낸 이원보의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은 "이에 원산노련은 긴급히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취업규칙의 개정 등 요구 조건을 제시했고, 문평제유노동조합과 문평운송조합이 원산노련의 결정에 따라 동맹파업을 단행"했다면서 "1929년 1월 14일 원산 부두 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이며 이 회사의 물품을 일체 취급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역사적인 원산 총파업이 개시된 이 시점부터, 대결 구도는 더는 문평제유 노측 대 사측이 아니었다. 원산 지역의 총노동 대 총자본의 대결이라는 구도로 상황이 발전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자본가들이 원산상업회의소(원산상의)에 권한을 위임하여, 원산상의의 간여 하에 부두 노동자 450명이 해고되는 일이 벌어졌다. 또 이 지역 노동자들이 원산노련에 권한을 위임하여, 원산노련의 주도로 두량노조·해륙노조·결복노조·운반노조·원반중사조합·원산제면노조 등이 파업에 가담하는 총력전 양상이 펼쳐졌다.

그런데 총노동 대 총자본의 대결은 불공평했다. 제3자여야 할 식민지 정치권력이 후자를 일방적으로 응원하며 개입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개입은 흔히 경찰력 투입으로 나타나지만, 이 경우에는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대규모 경찰력은 기본이고, 심지어 군대까지 원산에 파견됐을 정도다.

위의 이원보 책은 "일본인 재향군인과 청년회·소방대원을 동원하여 시가지를 엄중하게 경계했고, 함흥보병대에서 3백여 명의 군인을 원산으로 데려와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고 서술한다. 군대까지 동원한 것은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원산 총파업을 노동문제뿐 아니라 민족문제로도 대했음을 느낄 수 있다.

군대와 경찰까지 가세해 노동자들을 구타하고 검거하는 상황에서, 원산 민중이 살아남는 길은 자신의 힘에 의지하는 것뿐이었다. 1만여 노동자와 가족들은 술과 담배를 끊고 하루에 두 끼만 먹으면서 투쟁기금을 만들었다. 그것으로 총독부와 원산 자본가들의 연합 공격에 저항했다.

이런 모습이 세상을 움직였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격려와 후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원산 노동자들의 피눈물 나는 투쟁에 전국 각지의 사회단체, 노동조합 등은 동정금·동정 편지·동정 연설 등의 열렬한 성원을 보냈고, 나아가 일본·중국·프랑스·소련의 노동자들도 격려와 후원을 보내왔"다고 위 책은 말한다.

이 시기에 해외동포들이 보내온 응원의 글들이 총독부 경무국이 발행한 <조선출판경찰월보>에 수록돼 있다. 식민지 한국에서 유통되는 '불법' 출판물까지도 소개한 이 월보에서 원산 총파업을 응원하는 전단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전단들을 분석한 배상미 선문대 연구원의 논문 '<조선출판경찰월보>에 수록된 원산 총파업 지지 삐라'(2019년, <개념과 소통> 제23호)에 따르면, 만주에 소재한 재만(在滿)농민동맹 중앙상무위원회는 "원수 일본제국주의에 모든 것을 강탈당하고 만주 황야에서 죽는 우리는 참담한 고국에서 불어오는 피비린내 나는 바람에서 친구들이 혈전하는 함성을 듣는다"며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하자!", "감금된 전위투사를 탈환하자!", "총독정치를 배격하자!", "조선독립 만세!" 등을 외치는 글을 보내왔다.

재일조선노동총동맹 도쿄조합도 응원을 보내왔다. "용전하는 원산의 동지들이여, 놈들의 폭압과 간책을 일축하고 필승을 기하여 용감하게 싸워라"라며 "공동의 적 ××제국주의를 타도하라"는 내용이었다. 전단을 베껴 쓰는 경무국 직원이 차마 옮겨 적을 수 없는 단어가 있어서 '××'로 표기한 듯하다. 전단에는 "조선민족 해방 만세!", "조선 노동자, 농민 해방 만세!"라는 구호도 적혀 있다.

원산 총파업은 그해 4월 6일 종결됐다. 원산노련의 직장복귀 결정에 따른 것이다. 식민지 한국의 노동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이 총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사의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것은 한국 노동자들이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연계하며 투쟁력을 강화하는 토양이 됐다.

이원보 책은 "이후에도 원산의 노동자들은 운동의 재건을 시도하여 1929년 12월 원산노련 집행부를 꾸리고 1930년 1월에는 원산 대파업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를 여는 등 여러 가지 활동을 벌였"으며 "1930년대 비합법적 노동운동 상황에서 노동해방과 민족해방을 위한 싸움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고 설명한다.

허구적인 식민지근대화론

원산 총파업이 광범위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일제의 노동착취가 한국인 차별과 맞물리며 세상 사람들의 분노를 한층 더 자아냈기 때문이다. 그런 부조리에 맞서 이 시대 한국인들은 이봉창처럼 단독 의거 형태로 맞서기도 하고 원산 노동자들처럼 집단 투쟁 형태로 대항하기도 했다.

이봉창이 별종이 아니었으며 이 시대에는 누구라도 '반일분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일제의 지배가 한국인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이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다시금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일본은 그때 일에서 별다른 교훈을 얻지 못했다. 인간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식민지 전 기간에 한국인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차별한 것도 모자라 수백만 한국인들을 강제노역을 시키기까지 했던 일본은 '1억 원씩만 지급하라'는 유리한 조건까지도 거부하며 2021년 현재도 여전히 파렴치함으로 일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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