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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밤, 비닐 챙겨 집 나서는 노인들

[책줍일기] 재활용 수집 노인의 생애를 좇아서, 책 '가난의 문법'

등록 2021.01.15 07:39수정 2021.01.15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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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책더미 속에서 사심을 담아 알리고 싶은 책, 그냥 지나치긴 아까운 책을 오마이뉴스 라이프플러스 에디터가 골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눈이 내리면 밤새 잠 못 이루는 노인들이 있다. 그런 밤이면, 이들은 큰 비닐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선다. 찬바람과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조금 게으름을 피우면 치열하게 경쟁하며 모은 하루 치 노동의 결과를 모두 날려버릴 수도 있다.

눈이나 비를 맞아 축축해진 종이 상자와 폐지는 고물상에서 제값을 쳐주지 않는다. 낮 동안 모아둔 폐지가 축축한 쓰레기로 전락하기 전에, 비닐로 꼼꼼히 덮어둬야 한다. 그래서 노인들은 온몸으로 눈을 맞을지언정 다시 거리로 나온다.


흔히 '폐지 줍는 노인'이라고 칭해지는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이 이렇게 바지런히 일해 버는 돈은 한 달에 약 57만 원 정도(한국노인인력개발원, 2018년 평균 소득 추정치). 올해 1인 법정 최저생계비 약 109만 원에 절반가량 되는 금액이다.

생활비로 쓰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이지만, 이마저 없으면 버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들이 매일 손수레나 유모차를 끌고 도시 골목골목을 누비는 고된 노동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다.  

45년생 윤영자의 생애 

45년생 윤영자도 그들 중 한 명이다. 올해로 77세가 된 그녀가 처음부터 폐품을 팔아 생활했던 건 아니었다. 오십 대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동네 복덕방 서무와 화장품 방문 판매원, 그리고 옷가게 운영까지. 삶의 곡절을 따라 여러 직업을 전전하긴 했지만, 택시 운전을 하는 남편과 함께 악착 같이 돈을 모아 육남매 중 넷을 대학에 보내고 서울 북아현동에 단독주택까지 샀던 그였다. 

이 소박한 성취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건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부터였다. 다 자라 각자의 가정을 꾸려 떠난 자식들이 도로 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퇴직을 당해 사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자금이 부족하다고, 이혼을 하고 홀로 아이를 건사해야 한다고 손을 벌렸다. 못본 척 할 수 없어 돈을 마련해주다, 끝내 하나 있던 집까지 팔았다. 


엎친 데 덮친 격, 개인 택시를 팔고 경비 일을 하던 남편은 일을 그만 둔 후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두 사람밖에 남지 않았던 가족이 다시 한번 쪼개졌다. 막내딸이 아버지를 간병한다며 데려갔고, 윤씨는 아현동 전셋집에 홀로 남았다. 그는 부부 몫으로 나오는 기초연금의 절반인 16만 원과 가끔 참여하는 노인일자리사업 수당, 그리고 폐품 판매 비용으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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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가난의 문법> ⓒ 푸른숲


윤영자는 어디에나 있지만 좀처럼 가시화되지 않는 '재활용품 수집 노인', 그 중에서도 여성노인을 대변하는 하나의 얼굴이다. 도시사회학 연구자 소준철은 책 <가난의 문법>에서 이 '윤영자'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삶을 조명했다. <가난의 문법>은 윤영자씨의 일상을 시간 단위로 쪼개 설명하는 가상의 시나리오, 그리고 재활용품 수집 노인의 생애와 노동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을 교차하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저자가 이 책에서 재활용품 수집 노인, 그 중에서도 여성노인을 내세워 이야기를 풀어낸 건 이들이 단순히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 아니다. 저자는 "가난한 여성노인은 이전의 한국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여성 생애의 목표를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의 양육으로 삼게 하고, 따라서 교육을 받고 직업을 가질 기회를 갖지 못하게 했던 결과"라는 설명이다.  

즉, 여성노인들이 가난해진 원인을 단순히 개인의 의지와 노력, 능력 등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저자는 한 개인이 재활용품 수집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게 되는, "우연적이지만 필연적이었던 구조들"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이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북아현동과 충현동에서 만났던 노인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아 '윤영자'라는 한 명의 보편적인 인물을 만들었다.
 
윤영자의 삶은 다름 아닌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 나서며 살아왔던 이 시대 노인들의 보통 모습이다. (p.131)

제도의 바깥으로 밀려난 '윤영자들'

책 속에서 윤영자는 주택도, 개인연금도, 전문 기술도, 직업도 없지만, 부양이 필요한 가족, 그 중에서도 큰돈이 들어가는 질병을 앓고 있는 남편이 있는 인물이다. 윤영자에게는 육 남매나 되는 '부양의무자'들이 있지만, 이들에겐 부모까지 경제적으로 건사할 '부양 능력'이 없다. 하지만 이들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윤영자는 한때 기초노령연금을 받지 못하기도 했다. 

결국 윤영자는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데, 숙련된 기술이 없고 경력이 변변찮아 일자리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한국사회는 윤영자와 같은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일할 수 없는 존재' 혹은 '일하지 않는 존재'로 치부한다. 국가에서 진행하는 노인일자리사업이 있긴 하지만, '알바' 수준에 그치는 한시적이고 시혜적인 일자리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경쟁이 치열해 아무나 할 수 없다. 

결국, 늙어서도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린 윤영자'들'이 서게 되는 자리는 "제도의 바깥, 혹은 빈틈"이다.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은 환경미화원이나 쓰레기 수거 대행업체 직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 놓인 자잘한 폐품을 "낚아채", 그것을 고물상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노인들은 재활용품을 수집하고 있지만, 이들은 '청소부'가 아니다. 버려진 것들을 주워 돈을 벌지만, 그 돈은 쓰레기를 버린 이들이 주는 게 아니다. 노인들의 행위는 같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들은 청소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재활용 산업에서 발생하는 돈 일부를 스스로 취하고 있을 뿐이다. (p.207)

이들은 분명 자원순환 정책과 재활용 산업의 틈새를 채우고 있지만, 누구도 이 '변종 직업'을 책임지진 않는다. 손수레를 끌다 교통사고가 나거나 묻지마 폭행을 당해도, 고물상이 노동 시간과 노동 강도를 고려하지 않고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불러도 모든 건 개인이 감내해야 할 '불운'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주인 없는 재활용품을 둘러싼 외로운 노인들 간의 경쟁은 계속해서 심화되는 중이다." 

한 사람의 생애 역시 '역사'다 

그렇다면 이 기이한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우리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걸까? 저자는 이 속에도 일종의 '착취' 구조가 존재한다고 단언한다.   
 
이 생태계를 유지하는 건, 노인들의 일과 그 안의 경쟁뿐만은 아니다. 이 생태계는 보다 젊은 세대들 혹은 보다 부유한 계층의 책임을, 더 나아가 제품을 제조하는 업체의 의무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노인은 젊은 세대와 부유한 계층에 의해 착취당하고 있는 셈이다. (p.90~91)

뒤이어 저자는 "기술적 진보와 기업조직의 변화, (소비자의) 한 번 쓰고 버리는 물건을 사용하는 습관, (불완전한) 도시 당국의 쓰레기 수거 시스템, 그리고 생산자가 생산품의 처리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상황이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을 존재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저자는 이 같은 현실을 공적으로 풀어갈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다. '자원협동조합'과 같이 지자체 등이 재활용품 수집 노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시도했던 다양한 사업들을 공들여 소개하고, 현재 복지 제도의 빈틈을 메울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한다.

그러면서 궁극적으로는, '노인이 일하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고민은 도시의 노인이 잘 늙고, 잘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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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오후, 눈이 내린 서울 시내의 모습. 거리 한편에 놓인 재활용품 수집 리어카에도 하얗게 눈이 쌓였다. ⓒ 김예지


물론, 이 책은 재활용품 수집 노인을 위한 명확한 정책적 제안을 내놓고 있진 않다. 이들이 직면한 문제는 여러 갈래로 꼬인 삶의 경로만큼이나 복잡하다. 애초에 단순한 해결책이 나올 수가 없다. 저자가 윤영자라는 인물을 내세워 강조하는 건 단순히 "'가난'을 박멸할 수 있다는 정치적 선언"도, "'가난'을 무조건 긍정해야 한다는 낭만"도 아니다.

그는 책의 서두에서 "한 개인의 삶은 국가, 산업, 심지어는 같은 동네 주민인 우리들의 영향을 받아 이뤄지는 것임을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즈음이면, 위 문장이 새삼스레 다시 떠오른다. 해결의 주체는 국가뿐만이 아니다.  

하다 못해 누군가 아무렇게나 내버린 택배 상자 하나조차도, 오늘 윤영자의 노동에 영향을 미친다. 코로나로 인해 상상도 못할 양의 재활용 쓰레기가 쏟아지고 있는 요즘, 거리를 떠도는 윤영자의 발걸음은 어떨까. 동네 정자엔 노란색 '출입금지' 테이프가 빙 둘러 붙여지고, 경로당도 문을 닫았는데 그는 어디서 휴식을 취할까. 

이웃의 얼굴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질문을 던지는 게 시작이다. 윤영자의 생애는 나의 일상과 결코 동떨어질 수 없다. 노인의 가난이 하나의 '문법'처럼 고착화되어버린 시대, 우리가 윤영자'들'의 생애를 함께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가난하고 싶어 가난해진 사람은 없다. (중략) 거대한 격동의 시간만 다루는 한 국가의 정치사와 경제사도 물론 그렇지만, 국가 및 사회와 간접적 영향을 주고 받은 한 사람의 생애 역시 지금의 역사다. (p.127)

가난의 문법 - 2020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소준철 (지은이),
푸른숲, 2020


#가난의문법 #소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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