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14

안중근, 일제의 심장인 이토를 쏘다

등록 2021.01.14 13:38수정 2021.01.1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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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주의자 안중근, 이토를 처단하다

융희 황제가 귀경한 후인 1909년 1월 11일 박재혁의 집안에 경사가 벌어졌다. 늦둥이인 여동생인 박명진(1911~1987)이 태어난 것이다. 모친 이치수(1873~1949) 여사 36살 때였다. 박재혁과는 14살 차이였다. 갑자기 늘어난 식구로 인해 집안은 바빴다. 재혁이도 집안일을 도와야 했다. 모친은 삯바느질로 집안 경제에 보태었다. 없던 식구가 한 명 불어났지만 어린 명진의 말똥말똥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듯했다.

세상은 점차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학교 공부를 하랴, 집안 도우랴 재혁이도 바빴다. 일제는 서점에서 판매하는 『월남망국사』와 『동국사략』, 『유년필독(幼年必讀)』 등의 책을 팔지 못 하게 했다. 『월남망국사』는 월남의 판보이쩌우(반패주)와 중국의 량치차오(양계초)가 1905년 일본의 요코하마에서 나눈 대담을 상하이 광지서국(廣智書局)에서 펴낸 책이었다. 월남과 중국의 망명객이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일본에서 나눈 대담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던 조선에 곧바로 알려졌다.

『월남망국사』의 일부 내용은 1905년에 조선의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되었고, 1906년에는 『황성신문』이 본문을 국한문으로 번역하여 「독월남망국사(讀越南亡國史)」라는 제목으로 연재하였다. 국한문본(현채)과 국문본(주시경)이 나왔고, 아예 순국문조차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낭독에 적합한 구연본(이상익)까지 나왔다. 『월남망국사』의 내용은 당시 대부분의 사립학교에서 사용한 교과서인 『유년필독(幼年必讀)』에 실렸다. 이는 보통학교 학생들 대부분이 이 책을 간접적으로 읽었음을 의미한다.

책의 서문은 "세계에 공평한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오직 강권뿐이."로 시작한다. 약육강식의 진화론적 사회관에 입각하여 '현명하고 강한 인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인종은 도태된다.'라고 주장했다. 식민지적 상황으로 내몰리는 한국인에게 반면교사가 되는 책이었다. 우리도 힘을 길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월남망국사를 조선망국사로 사람들은 읽었다. 하지만 1909년 새롭게 제정된 <출판법>에 의거, '사회의 안녕질서와 풍속을 저해한다'라는 이유로 '금서'가 되었다. 하지만 금서일수록 더 큰 관심이 되는 법이다.

'망국(亡國)'의 시간을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약육강식과 우승열패의 제국주의적 논리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계몽적 자강에 대한 반론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토의 '동양평화론'에 대한 의구심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개화 지식인들이 주장한 실력양성론에 대한 비판이 대두되었다. 정공단 아이들도 그랬다. 최천택은 "어느 세월에 실력을 쌓아서 독립하겠는가? 실력이 부족하다 하여 남의 나라 지배를 받아야 하는 법은 없다. 실력이 없다고 독립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식민지 지배의 명분에 불과할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자강론에 대한 부분적 회의를 드러냈다.


김영주는 "나라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인민을 계몽하여야 한다. 그다음에 상공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경제적 발전이 없이는 부국강병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박재혁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나라가 독립하기 위해서는 먼저 직접적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 진짜 실력은 계몽이 아니라 무장투쟁 능력이다. 일본의 문명은 군사력으로 표출된 현실에서 실력은 무력일 수밖에 없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토가 주장하는 동양 평화가 진정한 동양 평화일까?" 의심했다.

당시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다툼으로 사회진화론이 현실화하는 시절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주장하는 동양평화론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국인들은 청일전쟁은 전근대와 근대의 전쟁이고, 러일전쟁은 서양과 동양의 대리전쟁으로 인식했었다. 그리하여 반청과 반러적인 처지에 있었던 많은 개화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암묵적으로 일본이 승리하기를 기대했고 현실은 그렇게 되었다. 동양의 새 강국 일본을 중심으로 뭉쳐 동양의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데에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다. 일본의 강대국화로 그 혜택을 고스란히 중국과 한국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반청, 반러적인 입장은 결국 친일 경향으로 경도되었고 자연스레 일본 중심의 동양 재편을 인정한 꼴이 되었다.

같은 황인종끼리 뭉쳐 서양 세력을 몰아내는 평화의 나라를 만들자는 이토의 주장은 실상 일본이 중심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삼국이 평등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양 삼국의 평화화는 허구일 뿐이다. 약육강식은 동양과 서양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에도 적용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오히려 삼국 개개 인종 국가의 개별적 특성을 중시하는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대등한 평화를 생각해야 했다.

그런데 이토는 끊임없이 대한제국에 속삭였다. '한국의 독립과 영토를 보장한다. 황실의 안녕을 보장한다.'라는 것이다. 황제도 속았다. 심지어 이토의 양딸로 광무 황제의 침실까지 드나들었던 배정자 역시 이를 믿고 이토에게 헌신했었다. 이토는 무력파가 아닌 문치파였다. 매파가 아닌 비둘기파였고, 급진론자가 아닌 점진론자였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적 입장에서 만주와 한반도를 점령하는 데 최선봉, 최핵심의 역할을 했다.

동양 평화론, 대동아공영론은 강한 군사력을 갖고 주변국을 침략해 일본의 세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일본을 위한 평화였고 공영이었다. 그의 동양 평화는 삼국의 평화공존과 공영이 아닌 일본이 주체요 중심인 동양 평화였다.

울려퍼진 총성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 무렵 하얼빈역에서 일곱 발의 총성이 울렸다. 안중근 의사(1879~1910)가 일본 초대 내각 총리이자, 한국통감부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그는 한국뿐만 아니라 동양의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오히려 동양의 평화를 해친 인물이었다. 안중근은 '꼬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치고 러시아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장면을 담은 이탈리아 잡지 '라 트리부나 일루스트라타' 1909년 11월 7일 자 1면 삽화. ⓒ 이병길

 
그는 침략의 원흉 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동지 11명과 3월에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하였다. 피의 명세를 실천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민족의 처단이었다.

정공단 아이들에게도 이토의 죽음이 전해졌다. 마치 나라가 독립한 듯한 쾌보를 듣고 환희작약하였다. 하지만 이토 죽음이 몰고 올 파장이 어떻게 다가올지 두렵기도 했다.
  

대한의사 안중근공 혈서 - ‘대한민국(大韓民國)’ 혈서는 단지동맹 때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안중근 기념관


안중근, 동양평화론을 쓰다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이 일본 천엔 지폐(1963~1984)에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일본의 영웅이다. 천황 아래의 직위인 일본 총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본 총리를 4번이나 역임했다. 그는 메이지 헌법(1889)의 초안 작성과 양원제(兩院制) 의회의 확립(1890)에 이바지한 점 등을 들어 일본에서는 근대화를 이끈 인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침략과 조선 식민지화를 주도한 원흉이었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메이지 천황은 '왕정복고, 유신 공헌, 헌법 초창, 조선 지도 등 공헌'의 결과로 이토를 충정군(忠貞君)으로 추봉하고, 백작에서 공작으로 추증했다.

2021년은 안중근 의사가 중국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지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 지폐에 등장하는 이토에 비해 안중근은 한국의 지폐에 그 얼굴이 없다. '흉한(兇漢)' 안중근은 '살인자'요, '테러리스트'로 일본은 보았다. 그리고 천주교인 도마(토마스) 안중근이 이토를 살해하였을 때 한국천주교회의 누구도 그것은 민족운동으로, 천주교신앙과 민족운동을 조화시킨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인식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한 개인이 아닌, '대한제국 의병 참모 중장'의 자격으로 결행하였다. '독립 전쟁'을 수행하다가 '적군의 전쟁 포로'가 된 것이다. 중국 톈진의 『대공보(大公報)』는 1910년 2월 1일 "이토는 권총에 맞아 죽었으니 이것은 한국 독립 전쟁의 서막이라 하겠다."라고 보도하였다. 안중근은 이토가 대한의 독립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 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그는 일본 법이 아닌 만국공법에 따라 재판받기를 원했다. "조국의 독립을 지키고 그 존립을 유지코자 자위를 위하여 하는 전쟁은 국제법상 정당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사건 장소는 청국이었고, 체포는 러시아 관헌이 하였기에 재판 관할이 다툼의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을사늑약 제1조 "일본국의 외교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한다."에 따라 재판은 일본법에 의해 일본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진행되었다.

안중근은 재판정에서 증언했다.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는 자가 있는 데도 수수방관한다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1910년 2월 14일 판사는 "개인적인 원한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했지만, 살인죄에 적용하여 사형 선고를 하였다. 3월 26일 오전 10시 안중근은 사형 집행을 받았다. "동양평화를 위해 만세 삼창을 하고 싶다."라는 그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삼 년 동안을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도달치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 자매는 각각 스스로 학문을 힘쓰고 사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는 자 유한이 없겠노라."
 

안중근은 <동포들에게 고함> 이란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두 동생에게 "우리나라가 독립되기 이전에는 나의 시체를 본국으로 옮기지 말고 하얼빈 공원 부근에 매장하여 세계의 망국 인종으로 하여금 각성케하라."라고 하였다.

나라가 독립이 되고, 순국 110주년이 다가오는 현재까지 그의 무덤은 고국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효창공원의 안중근 의사 묘는 1946년 김구 선생이 마련한 가묘이다. 그의 가묘처럼 그의 남동생들의 두덤도 현재 고국에는 없다.

안중근은 144일 동안 뤼순 감옥에 있는 동안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와 『동양 평화론(미완)』을 집필하였다. "이토의 일본 중심과 달리 한·중·일 3국이 서로를 대등한 국가로 인정하고, 이웃 나라에 대한 침략을 시도하지 않으며, 공존공영을 추구한다. 3국이 참여하는 동양 평화회의를 조직하여 뤼순에 그 장소를 둔다. 3국 국민이 회비 1원씩 모금하여 공동의 은행을 설립해 공용화폐를 발행하면 금융과 산업이 발전해서 재정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또 서구 열강의 침략을 막기 위해 3국이 힘을 모아 평화유지군을 창설한다."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박은식은 "대개 안중근의 역사를 들어 논하면서 자기 몸을 희생하여 나라를 구한 '지사(志士)'라거나 '한국을 위하여 원수를 갚은 '열협(烈俠)'일 뿐이라고 말하곤 한다. 나는 이러한 말로 안중근의 면묘를 제데로 다 드러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안중근은 세계를 보는 안목을 갖추고 '평화의 대표'를 자임한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동양의 평화공존을 꿈꾸며 침략의 조선 식민지를 도모했던 이토를 처단한 안중근의 소식은 이내 정공단 아이들에게도 들려왔다. 아이들은 절로 '만세! 대한독립 만세!'의 소리가 나왔다. 사람들은 감히 통쾌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어깨가 들썩 올라가고 기쁨에 얼굴이 환했다. 안중근은 구국 영웅이었다. 반일 투쟁의 상징으로 중국에서도 신봉했다. 그는 동양의 평화를 바란 진정한 의인이었다.

안중근 가족의 불행은 민족의 민낯이다
 

일제에 타격을 준 항일 유족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안중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안중근은 부인 김아려(김마리아, 1878∼1946) 여사 사이에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중근의 의거 이후 가족들은 죽음을 넘나드는 위험에 처했고, 가난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안중근 가족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연해주 꼬르지포에 10여 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 목릉 팔면통으로 이주해 살았다. 그런데 1911년 여름 7살 맏아들 안문생(분도)이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죽었다. 가족들은 일제가 저지른 일이라고 생각했다.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 가족 - 이버지는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가족은 살인자의 후손으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 이병길

 
러시아 혁명으로 불안해져 임시정부가 세워져 1919년 10월 안중근 가족은 상해 프랑스 조계로 이주했다. 안창호와 김구의 도움이 있었다. 동학농민전쟁 때 김구는 농민군 접주였고, 안중근의 부친 안태훈은 농민군 토벌 갑오의려 대장이었다. 김구는 한때 안태훈에 의탁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김구와 안중근은 농민군과 토벌군이었지만 상대방의 인품을 높이 사 서로 배려했다고 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안중근의 의거로 김구가 황해도 해주의 유치장에 한 달 동안 갇혔다가 불구속 기소로 풀려난 적이 있다. 임정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의 차녀 안미생과 백범 김구의 장남 김인이 연애 결혼함으로 두 가문은 사돈이 되었다. 하지만 김구 사망 이후 미국으로 간 후 소식을 알 수 없다.

안중근 유족은 상해 임정의 보호 아래 있을 때는 행복했었다. 하지만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사라지게 된 후 안중근 직계가족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 살해의 위협이 있었다.

1930년 초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1907~1952)은 정옥려(1905~1991)와 결혼을 한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30년이 지난 1939년 10월 16일. 그는 이토 사망 30주기를 맞아 이토의 둘째 아들 이토 분기치에게 이토를 기리는 박문사(博文寺)에서 사죄함으로 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준생은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비에 개자식)'가 되었다.

어머니 김아려는 아들에게 고생했다며 위로했다. 1945년 11월 귀국길에 안준생을 민족 반역자로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 부탁하기도 했다. 안준생은 아내 정옥려에게 "내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1941년엔 안중근의 외동딸인 안현생도 박문사를 찾아 이토에게 분향 배례한다.

아버지는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그 가족에게는 재앙이었다. 나라도 정부도 없기에 누구도 보호해주지 않았다. 본인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안준생은 미나미 지로 총독이 준 돈으로 상해에서 약국을 운영했다. 헤로인(아편)을 팔았다는 소문도 있었다. 일본은 영국인 세관장이 살던 고급 주택을 사주는 등 준생을 특별 관리했다. 안준생과 정옥려는 2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안준생은 1951년 한국전쟁 중 귀국하고, 부산에서 이듬해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안준생의 사망 후 부인 정옥려와 자녀들과 미국으로 갔고, 아들 안웅호(토니안)는 미국에서 의학박사가 되었다. 정옥려는 1987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1991년에 사망했다.

딸 안현생(1902~1960)은 황일청과 결혼하여 2명의 딸을 두었다. 현생은 프랑스 신부의 도움으로 불문학과 미술을 공부했다. 한국전쟁 당시 궁핍하게 살며, 전구 장사를 하고, 사기도 많이 당했다. 전쟁 후 대구 효성여대(대구가톨릭대 전신)에서 불문학 교수(1953.4.1~1956.3.31)를 지냈으며 57세 때 서울의 단칸방에서 고혈압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편 황일청은 1919년 무력투쟁을 강조한 구국모험단에 활동하다가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체포되어 평양에서 5년간 연금생활을 한후 일제가 임명한 상해 한교민단(韓僑民團) 단장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 12월에 광복군에게 암살되었다.

안중근의 두 남동생 안정근(1885~1949)과 안공근(1889~1940)은 독립운동 투신하였다. 안정근은 신한청년당 이사, 상해 대한적십자회 부회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과 1939년 6월 뇌병으로 인해 중국 각지를 이주하면서 은거 생활을 하다가 1949년 3월 상해에서 1949년 형과 동생의 유해를 가져오지 못한 채 상해에서 뇌병으로 사망하였다.

청산리 전투에 참여한 막내 동생 안공근은 안중근 의거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상해 한인교민단 단장을 지냈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우익과 좌익계열의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노력하였다. 2차 대전 중 1939년 충칭(重慶)에서 의문사하였다. 안중근의 유일한 여동생 안성녀(1881~1954)는 아들 딸린 어머니자 미망인으로 군복 수선이나 군자금 모금, 문서 전달과 같은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의 며느리가 김좌진 장군 밑에서 항일 투쟁을 했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오항선(1910~2006)이다. 안성녀는 부산에서 사망하여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묘지에 있다. 안중근과 두 남동생의 무덤 소재를 현재 알 수 없다. 민족의 영웅이지만 그 죽음 이후에 민족은 여전히 큰 빚을 지고 있다.

오택의 딸, 안중근 며느리를 만나다

박재혁의 친구 오택(오재영)의 장녀 오명자(1915~1998)가 10대에 상해로 가서 특파원 기자로 활동 중인 박거영과 연애 결혼을 하였다. 오택의 사위이자 오명자의 남편인 박거영(1916~1995)은 중국 상해국민대학을 졸업하고, 『삼천리』, 『대동아』 상해 특파원을 지내는 등 언론계에 투신하고 기자이자 시인으로 『대한일보(大韓日報)』를 발행하였다.

당시 오명자는 상해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상해에서 살았는데 그때 안중근의 며느리 정옥려와 찍은 사진이 있다. 사진의 속의 여자가 안중근의 며느리인지는 확인이 더 필요하다. 정옥녀는 상해 호강(滬江)대학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호강대학에 유학을 했던 피천득에 따르면, 중국 대학 중에서 가장 먼저 공학을 시작한 대학으로 여학생이 많이 다녔는데, 중서여숙(中西女塾)이나 성(聖)마리아 학교를 거처온 부유한 가정의 여자들로서 그들이 너무 사치하기 때문에 호강대학이 귀족 대학이란 말을 듣기도 하였다. 영어 회화도 유창하고 머리가 좋고 근면하고 연구에 열중하였으며, 캠퍼스 기숙 생활이라 주말이면 파티를 즐겼다고 한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들 박윤수에 따르면, 모친인 오명자는 임시정부 아나운서와 번역 사무 일을 하였는데 러시아, 중국, 일본, 한국 문서들을 번역하여 각종 정보를 임시정부에 제공하였다고 한다. 임정의 라디오 방송은 1940년대 중국 충칭에서 하였다.
 

오택의 장녀 오명자 - 그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방송국의 아나운서를 하였다고 한다. - 사진제공 : 오택의 외손자 박윤수 ⓒ 이병길

 
한반도에서 직선거리로 2천여km 떨어진 충칭(중경, 重慶). 일제에 쫓기고 쫓기던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마지막으로 충칭에 자리 잡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도 창설된다.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곧바로 '방송 공작'을 시작하는데, 그 거점이 충칭방송국이었다.

단파 라디오를 이용한 선전전을 펼친 방송 실무는 한국독립당 선전부장과 한국광복군 선전과장을 지냈던 김의한(金毅漢, 1900~1964)이 맡았다. 방송은 한 번에 30분씩 진행됐으며 초기에는 주 1차례(목)만 진행하다 이후 3차례(월·수·금)로 확대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임시정부 산하에 있던 한국광복군에서도 직접 방송을 진행했다. 광복군 총사령부 심리전연구실 주도로 일본 점령 지역을 상대로 하는 이른바 대적방송(對敵放送)을 한 것이다. 여성 광복대원 지복영(池復榮)을 비롯한 방송 공작 요원들은 국내 동포를 위한 단파 라디오 방송을 송출했다. 이때 오택의 딸인 오명자가 아나운서로 활동한 듯하다. 방송은 한국어와 일본어로 각각 진행됐다. 동포들에게는 "일본에 굴하지 말고 힘내라."라고 하였고, 일본군 징집 청년에겐 "탈출해 광복군으로 오라."고 하였다.

방송을 통해 임시정부와 국제 정세 등에 관한 소식이 국내로 퍼지자 일제는 방송 청취를 엄격하게 단속했다. 하지만 임정 라디오를 몰래 듣는, 밀청(密聽)을 막을 수는 없었다. 라디오를 들은 사람들은 소리통 역할을 자임했다. '연합군이 곧 상륙할 것이다.' '솔로몬 군도에서 미군이 일본군을 대파했다.' '일본군의 물자 부족이 심각하다.'는 것과 같은 반가운 소식을 주변에 퍼뜨렸고, 결국 꼬리가 밟혀 일제 법원의 처벌을 받기도 했다.

당시 일본 법원이 적용한 죄목은 '군사(軍事)에 관한 조언비어(造言飛語)'. 즉 군과 관련된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방송을 들은 사람들은 해방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오택의 사위이자 오명자의 남편인 박거영(1916~1995)은 1936년 남정관, 최경숙과 함께 『원산시론(元山詩論)』 월간잡지를 발간하고, 1941년 7월 상해에서 「상해극예술연구회(上海劇藝術硏究會)」를 창립한다. 기쿠치 간(菊池寬)의 「아버지 돌아오다(父歸る)」, 유치진의 「흑룡강」, 현진건의 「무영탑」 등을 공연하였다.

그리고 조선 영화를 상해로 수출하여 상해 교포에게 감상시키고, 조선 극단을 현지에 초빙할 것 등을 추진하였다. 해방 후 김구 선생 환영식에 참여하였으며, 1948년 양품점인 대지백화점을 명동에서 운영하고, 1949년 12월 『바다의 합창(合唱)』 등을 출판하는 등 활발한 문학 활동을 하였다.

1950년 1월 보도연맹에서 주최한 김기림, 정지용, 염상섭, 박태원, 박계주 등이 참가하는 제1회 국민예술제전에서 시낭송을 하였다. 대지백화점 2층은 박거영이 작가들에게 베푸는 술자리 혹은 작가들의 놀이터 역할을 했다. 때론 집필실 역할도 했는데, 드나든 사람은 최인규, 김영수, 최영수, 이용악, 서정주, 이병철, 박계주, 조지훈, 김동석, 김동리, 문둥이 시인 한하운 등이 출입하였다. 박거영은 「시인의 집」을 운영하며 시 낭독회와 연구회를 여러 번 개최하고 출판사 <인간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오택의 사위 박거영 - 상해극예술연구회장을 역임하며 기자로 활동한 박거영 시인, 그는 해방 후 경제활동과 함께 작가로서 발넓은 활동을 하였다. 사진제공 : 오택의 외손자 박윤수 ⓒ 이병길

 
현재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으려면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일제가 남긴 재판이나 수형 기록, 신문기사 등 문서와 신뢰가능성이 높은 증언과 같이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가 있어야 하고, 순국하지 않았을 경우 활동에 의심받을 사실이 없어야 한다. 항일운동가 중에서 독립운동을 드러내놓지 않고 자랑하지 않은 숨은 유공자들이 있다. 오명자나 안성녀도 그런 사람 중의 한 분으로 생각된다.

박재혁의 부친 사망하다

어느 날 최천택에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집에서 기르던 토종개 검둥이가 이웃 일본인의 개와 싸워 크게 이겼다. 화가 난 일본인은 몽둥이로 검둥개를 때려 죽였다. 천택은 가슴에 일본인에 대한 원한이 쌓였다. 몇일 뒤 독약을 바른 고기를 일본인 개에 먹여 죽였다. 작은 일이라도 불의를 보면 참을 수 없는 오기가 폭발했던 것이다. 이야기를 들었던 정공단 아이들은 잘했다고 고소해했다. 하지만 개에게 보복하는 것이 일본인에 대한 보복이 아님은 분명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일본에 대한 불만을 어떤 식으로 표출하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 '검둥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초량 정거장과 부산정거장 사이이의 영선산 착평 공사로 주변이 어수선하였다. 1909년이 저무는 12월 10일 박재혁의 부친 박희선이 사망하였다. 정공단 아이들은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듯이 같이 슬퍼했다. 박재혁의 아버지에 대해 알려진 것은 없다. 집안에서도 구체적 내용이 전해지지 않으며 확인 가능한 사실도 없다. 이름도 족보에는 경순(敬順)으로, 제적등본에는 희선(喜善)이다.

해방 후 최초로 보도된 이름은 광선(光善)이었다. 당시는 부인 이치수 여사가 생존했었다. 다른 이름으로 알려졌지만 수십 년 동안 정정되지 않다가 최근 제적등본의 확인으로 박희선으로 수정되었다.

1909년 12월 22일, 청년 이재명이 친일 매국노인 이완용을 처단하려 하였다. 이완용은 다량의 출혈로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50여 일 동안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1909년 침략자와 매국노를 처단하는 가운데, 망국의 기운이 스산하게 밀려왔다. 1909년 박재혁은 여동생을 얻는 기쁨과 함께 아버지를 잃은 슬픔의 시기였다. 부친의 사망으로 박재혁의 경제 형편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는 15세의 소년가장이 되었다.

물려받은 재산도 변변하지 않았고 아직 젖먹이인 박명진으로 모친 이희수의 경제 활동도 활발하지 못했다. 모친의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겨울이었다. 망국이 다가오는 시절, 박재혁의 가세도 급격히 기울어졌다. 마치 대한제국의 운명처럼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현재 울산민족작가회원, 울산민예총 감사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안중근 #박재혁 의사 #오택 #의열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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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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