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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민'의 죽음, '환향녀'의 고통... 코로나는 달라야 합니다

[주장] 거리두기로 손해 떠안은 소상공인 지원, 시민들이 과감하게 요구해야

등록 2021.01.17 17:53수정 2021.01.17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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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 5. 29. 서울. 중국군 춘계대공세로 서울시민들이 세 번째로 피란봇짐을 꾸려서 한강을 건너고자 몰려들고 있다. 피란민들이 한강철교의 단절로 부교로 남하하고 있다. ⓒ NARA

  
'6.25' 하면 무엇을 제일 먼저 떠올리십니까. 월남한 가정의 자녀이기 때문인지, 제가 제일 먼저 떠올리는 단어는 '피난'입니다.

지게에, 달구지에 가재도구와 아이들을 이고 지고 떠나는 불안한 표정의 남루한 사람들, 피난지 부산에서의 고난한 생활, 노래 '이별의 부산 정거장', 바람 찬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떠나는 매러디스 호를 가득 메운 사람들과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 같은 것들요.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피난을 떠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피난도 가지 못하고 오르내리는 전선(戰線)의 뒤에 남았다는 것을.

북한의 남침이 워낙 기습적이기도 했고, 남한의 대비가 워낙 허술하기도 했지만, 인민군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스란히 '인공 치하'에 남았습니다.

이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해방군이었겠지만, 이념에 따라 많은 이가 그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념과 무관한 대부분의 잔류시민에게 그들은 감당해내야 할 전쟁의 실체였을 겁니다. 많은 이들이 의용군이란 이름으로 징집되었고, 내핍과 공출과 노력 동원이 강요되었습니다.

모두가 다 아는 전황의 역전이 있었고, 서울은 다시 국군에 탈환되었습니다. 수개월 만에 다시 돌아온 대한민국 정부를 바라보는 이들의 마음엔 다행감과 반가움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돌아온 정부의 일성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점령지에 남은 이들은 북괴에 협력한 잠재적 부역자다, 그들의 죄상을 색출하라.'


그들이 피난을 가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대한민국 정부의 거짓 발표 때문입니다.  이미 대전으로 몸을 피한 이승만 대통령과 정부는 '국군이 괴뢰군을 잘 막고 있다'며 시민들의 피난을 막았습니다. 그들은 뒤늦게 피난에 나선 사람들로 가득한 한강 다리를 폭파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권력과 정보를 가지고 있던 소수는 이미 서울을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힘없는 대부분의 사람은 피난 와중에 한 번, 서울이 수복된 뒤에 또 한 번,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되어버립니다. 수복된 서울에서 부역자 색출에 앞장선 관료들은 대부분 피난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화냥년'이 된 조선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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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병자호란 당시 끌려갔다가 돌아온 환향녀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긴 홍제천. ⓒ 김종성


비슷한 일은 수백년 전에도 일어났었습니다. 삼전도의 치욕으로 병자호란이 끝나고 난 뒤, 귀환하는 청나라 군사들은 주전론을 주장한 강경파 관료들 외에도 조선의 많은 여자를 전리품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번에도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가장 '약한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이후 양국의 외교가 정상화되자, 조선의 조정은 끌려갔던 여자들을 송환 받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조선 국내에선 일대 소동이 일어납니다. 끌려간 여자들의 집안과 고향에서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그 여자들의 인수를 거부한 것입니다.
      
결국 왕이 나서서 어명을 내립니다. '서대문 밖 홍제천에서 목욕을 하고 한양으로 들어오면, 여자들의 포로 시기 정조를 문제 삼지 않는다.' 하지만 추상과도 같은 어명보다 더 강한 것은 '개인의 편견'이었습니다. 돌아온 여자들은 사람들의 멸시를 받으며 치욕 속에서 생을 마칩니다. 그 여자들은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이름의 '환향녀'라 불렸는데, 이 말은 이후 '화냥년'이라는 끔찍한 단어로 우리말에 남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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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코로나19 방역을 위한 동선 공개, 영업 제한, 집합 금지 등을 인권 침해라 비판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비민주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런 제한을 받아들이는 이유 중 하나는, 지금의 이 사태가 일종의 '전쟁 상황'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어지간한 전쟁보다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 나라도 많습니다.

'모자라다', '허술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어쨌거나 그 모든 제한과 그로 인한 극심한 희생을 감수한 덕에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확진자 수도, 사망자 수도 적습니다. 세 번이나 대유행이 밀어닥쳤지만, 그 세 번째 파도도 거의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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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갈아 넣어지고 있는' 공무원들과 의료진들의 노고도 큽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이겨내게 한 가장 큰 공로는, 손해를 감수하고도 정부의 영업 제한 조치를 감수하고 있는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에게 돌려야 합니다. 오늘도 방송에서, SNS에서, 각종 대화방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제 눈에 보이는 우리 동네 상가에서 참혹한 경영난에 시달리는 그들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소상공인에 대한 정부의 지원, 과감한 재정정책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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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강화된 2단계 사회적 거리 두기로 자영업자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가운데 2020년 9월 1일 서울의 한 커피전문점에 '힘듭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 연합뉴스

 
이 전쟁과도 같은 상황에서 '공동체의 총화로서의 시스템'인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전부는 아닐지라도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개인적 손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있는 그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아닐까요? 비록 재정 건전성이 일부 악화된다 해도, 국가 부채가 증가한다 해도, 국가적 차원의 재난이 특정 집단의 희생 위에서 극복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사실 정부 탓만 할 일도 아닙니다. 병자호란 이후를 생각해봅시다. '홍제천 목욕 이후로는 정조 문제를 불문하라'는 정부 방침이 있었지만, 환향녀들을 치욕으로 내몬 것은 결국 당시의 '시민사회'였습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정부는 자영업자 구제 안 하고 뭐 하는 거야"라고 욕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하늘에서 돈을 끌어오는 것도 아니고, 결국 정부 재정은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됩니다. 정부의 과감한 재정 투입을 촉구하고, 그 재정 투입이 가져올 세수 부담에 기꺼이 동참하는 것, '다 좋은데 세금은 올리지 말고'라는 해괴한 주장을 하지 않는 것,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서울 수복 이후의 대한민국 정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정부가 했었어야 했던 말, 하지만 하지 않았던 말은 이런 것이었을 겁니다.

'우리에게 닥친 비극적인 현실 때문에 당신들이 받은 극심한 고통을 헤아리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 당신들이 겪은 고통은 바로 우리 중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고통이었다. 어쩌면 당신들 덕에 고통을 피할 수 있었던 이들과 정부가 힘을 합쳐 당신들을 돕겠다. 그것이 우리의 미안함을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것이다.'

하지만 17세기에도, 20세기에도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단순히 영웅호걸들의 무용담에 감탄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겁니다. 역사 속의 과오들을 생각하며, 후대인 우리는 선대보다 조금 더 나은 현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역사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그래서 옛적의 중국인들은 '거울 감(鑑)'이란 글자로 역사를 표시하기도 했던 것이겠지요. 역사는 현재를 비춰보는 거울이니까요.

다시 한번 바랍니다. 세월이 흐른 뒤 '모두가 코로나19로 고통받았으나, 모두가 함께해 이겨냈다'라고 역사 속에 기록되기를. 그러기 위해서 정부가 과감하게 소상공인에게 재정을 지원하라고 우리 모두 정부를 강제하기를, 그리고 그에 따른 세수 부담을, 꼬박꼬박 월급 받으며 어떻게든 살고 있는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소망합니다.

PS.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첫 부분을 보면, 신미양요 이후 미군에 포로로 잡힌 조선인들 앞에 조선인 통역사가 나타납니다. 이제 돌아갈 수 있나 보다 해서 들뜬 그들 앞에서 통역사는 '조선 정부가 너희를 송환받기 원하지 않는다'고 전합니다. 극 중에서 훗날 극단적인 친일 매국노가 되는 통역사 이완익은 말했습니다.

'조선은, 니들을, 버렸다.'

그 말을 듣고, 어리던 '장포수'가 지었던 이글거리는 분노의 표정을 기억합니다. 그 표정이 21세기에 재연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해당 글은 이효근 기자님의 페이스북에 올라온 글입니다. 동의를 받아 싣습니다.
#코로나19 #소상공인 #정부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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