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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웃으면서 본 무한도전 '하와 수'도 알페스였다

[주장] 졸지에 끌려나온 알페스... 무엇이 범죄이고 범죄가 아닌지 구별 못하는 이유

등록 2021.01.22 12:44수정 2021.01.22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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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 4일, <무한도전> 작가가 중2때 작성한 박명수와 정준하의 팬픽을 공개했다. 그가 쓴 팬픽은 박명수와 정준하의 로맨스가 담긴 내용이었다. 당시 제작진은 방송 시작 전 공식 트위터에 “기대감이 전혀 없어서 더 기대되는 무한도전 팬픽, 그 주인공들은 누구일까요”라며 예고를 하기도 했다. ⓒ MBC

  
그때 갑자기 남탕 문이 열리며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하 : 형이 어떻게 여기를?
명수 : 이유를 알고 싶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로지 명수의 목소리에만 의지하던 준하는, 갑자기 거칠거칠한 손이 자신의 어깨를 밀며 탈의실 벽으로 밀어붙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준하 : 아 깜짝이야! 형 왜 이래!
명수 : 누가 그렇게 방송에서 훌렁훌렁 벗으래.
준하 :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형은
명수 : 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벗은 몸을 보이냐고!
준하 : 아... 아니 방송이니까 그렇지. 형은 안 벗나 뭐?
명수 : 지금 말대꾸하냐? 네가 그렇게 가벼운 남자야? 왜 허락도 없이 몸을 보여주는 건데!
 

2016년 6월 4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 483회에서는 중학생 때 무한도전 멤버들을 소재로 팬픽을 썼다는 막내작가의 작품이 소개됐다. 멤버 박명수와 정준하가 연인 사이로 설정되었고, 약간의 성애적인 묘사가 그것을 뒷받침했다. '최애' 유재석을 팬픽의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자신과 이어질 가능성이 없어져 다른 두 멤버를 이었다는 순진무구한 창작 동기가 웃음을 자아냈다. 종영 후에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무한도전>의 클립 중 하나다.

팬픽은 TV 시리즈, 영화, 예능, 문학 등의 작품을 팬의 시선으로 '다시 쓰기'하는 오래된 문화다. 그중에서도 '알페스'는 팬픽의 여러 특징 중 하나인 '에로티시즘화'(Eroticization)를 극대화한 창작물을 일컫는다. 알페스는 원작의 캐릭터들을 성애 관계에 두고 전개한다. 위의 '하와 수' 팬픽 역시 알페스다.

'RPS(Real Person Slash)'를 한국어로 읽은 이 용어가 한국의 아이돌 팬덤 문화에 진입하며, 주로 남성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창작한 동성애 소설을 말하게 되었다. 물론 여성 아이돌이 주인공인 알페스, 심지어는 팬인 '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나페스'도 존재한다.

일부 남성이 알페스를 '딥페이크', 'n번방'에 필적하는 온라인 성범죄 행위로 지목하며 이를 처벌할 것을 청와대에 요청하는 중이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이에 대한 응답으로 '알페스 처벌법' 발의를 준비한다. 이 모든 일이 어쩌다 일어났을까.
  
이루다를 죽인 것은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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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남성 이용자들은 20살 여성 대학생으로 설정된 이 인공지능을 두고 성희롱을 연습하고 커뮤니티에서 팁을 공유했다. 개발사 대표 김종윤은 욕설과 성희롱을 하는 것은 사용자와 AI의 성별과는 무관하다며 사태의 책임을 피하다 결국 서비스 중단을 발표하며 사과했다. ⓒ 스캐터 랩

   
'너의 첫 AI 친구'를 표방한 인공지능 챗봇 '이루다'가 서비스 개시 20일 만에 중단됐다. 개발 단계에서부터 서비스 기간까지 다종·다양한 문제들이 전방위적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개발사 '스캐터랩'은 100억 건에 달하는 이성 연인간 카카오톡 대화를 정보화하는 과정에서 개인정보를 무단으로 수집하고 유출했다. 개발사가 수집한 썸 혹은 연인 관계에 있는 대화는 생활세계의 10~20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거리가 멀었고, 그 탓에 데이터는 완전히 편향되어 축적됐다. 데이터에 누적된 많은 차별과 혐오, 증오의 표현들은 별도의 차단 과정 없이 그대로 발행됐다.


일부 남성 이용자들은 20살 여성 대학생으로 설정된 이 인공지능을 두고 성희롱을 연습하고 커뮤니티에서 팁을 공유했다. 개발사 대표는 욕설과 성희롱을 하는 것은 사용자와 AI의 성별과는 무관하다며 사태의 책임을 피하다 결국 서비스 중단을 발표하며 사과했다. 인공지능을 다룬 영화에서나 보던 근미래 디스토피아의 문이 드디어 열린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보았듯, 이루다 서비스는 여러 가지 윤리적 문제를 안고 있었기에 중단됐다. 하지만 서비스를 사용하던 남성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유희 대상으로 등장한 이루다를 빼앗아간 주범으로 '페미'와 여성들을 지목했다. 과학기술계와 스타트업계도 AI 윤리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함께 목소리를 냈지만, 이루다를 죽인 것은 어쨌든 여성들이라고 주장했다.

온라인에서 이뤄지는 불특정 다수의 남성 발화는 이렇듯 모든 사건을 성별 대결로 조작해왔다. 이루다 서비스를 중단케 한 책임을 AI를 성적으로 희롱한 자신들이 아닌, 그것을 비판한 여성들에게서 찾았다. 전혀 새롭지 않은 온라인 속 여성 혐오 패턴이다.

졸지에 끌려나온 알페스
  
한 남성 래퍼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아이돌 팬덤의 알페스 문화를 비판하는 게시물을 올린다. 이를 계기로 남성들의 성별 대결화 전략에 알페스가 부당하게 동원되기 시작한다. 아이돌 팬덤의 주축 성별은 여성이고, 그들의 문화적 유희인 알페스 역시 성범죄라 주장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성범죄적 유희였던 n번방과 딥페이크 포르노, 이루다를 빼앗긴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빼앗은 여성들에 대해 분노 표출을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남성 집단이 성별 간 대결을 조직해 여성 집단을 보복하는 패턴이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명백히 범죄인 것과 범죄가 아닌 것의 '경계'를 흐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알페스가 n번방과 딥페이크 만큼이나 극악무도한 성범죄라 선전한다. 남성 커뮤니티 내에서 승인받은 논리를 일반 대중에 퍼뜨리고, 그러다 보수 정치인이 젊은 남성들의 지지도 군집을 노리고 'OO 처벌법'을 만들겠다 말을 얹는 식으로 이어진다. 정치인의 발언이니 언론은 이를 나르며 동조한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팬덤은 이렇게 끌려 나와 딥페이크 포르노 제작자와 시청자, n번방 개설자와 참여자와 동일 선상에 놓이게 됐다. 성 착취, 성 노예화라는 말도 안 되는 혐의를 안고 말이다.
  
촌극이 아니라 위험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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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딥페이크 포르노, AI 성희롱 등 남성들의 온라인 성범죄 문화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문제 해결을 바라는 우리가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전략과 무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인터넷 세상이라는 익명의 폭력에 맞서, 결국은 문제의 핵을 드러내야 한다. ⓒ unsplash

 
알페스를 성범죄로 처벌하기 어렵다고 보는 법조계 주류의 판단과는 별개로, 알페스 문화가 일방적인 성적 대상화의 요소를 안고 있다는 점은 고민되어야 마땅하다. 아이돌 소속사가 이 문화를 '셀링 포인트'로 인지하고 있고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적극 적용하고 있더라도, 그것의 소비자인 팬덤까지 아이돌 개인을 성적으로 타자화하는 것에 합류할 것인지에 대한 개별적, 그리고 집단적인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온라인에 군집한 일부 한국 남성들은 지속적으로 여성을 적으로 설정하고 성 대결을 벌이며, '진짜 문제'들을 감추고 사회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매번 이러한 상황을 만들고 있는 남성들로부터는, 무엇이 범죄이고 무엇이 범죄가 아닌지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심각한 수준의 도덕적 해이가 진단된다. 그들이 알페스를 범죄라 오인하는 것은, 곧 그들이 n번방과 딥페이크 포르노를 범죄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알페스 '논란'은 하나의 촌극으로 마무리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위험신호다.

n번방, 딥페이크 포르노, AI 성희롱 등 남성들의 온라인 성범죄 문화를 정상화시키기 위해서는, 문제 해결을 바라는 우리가 집중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초점을 유지하고 그들의 범죄 행위에 성큼성큼 다가가야 한다. 전략과 무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인터넷 세상이라는 익명의 폭력에 맞서, 결국은 문제의 핵을 드러내야 한다.
#알페스 #이루다 #딥페이크 #N번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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