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봉오동 10년 적공의 결실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19회] 마침내 역사적인 봉오동 전투가 시작되었다

등록 2021.01.25 18:26수정 2021.01.25 18:26
1
원고료로 응원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봉오동전투는 이 지역의 '터줏대감' 격인 최운산 형제들이 리드하였다. 지형은 물론 산간 마을의 구조까지 훤히 꿰고 있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이곳으로 솔가하여 이주할 때부터 답사하고 준비해온 '사업'이었다.

'10년 적공'이 마침내 결실의 계절을 맞았다. 
 
a

봉오동 들머리에 있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 표지석 봉오동 들머리에 있는 봉오골 반일 전적지 표지석 ⓒ 박도

 
일본군의 움직임 등 비밀 정보를 관리하던 최운산 장군은 일본군이 북간도 무장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급습할 것이라는 첩보를 받았다. 일제와의 대규모 독립전쟁이 눈앞에 다가온 것을 간파한 최운산 장군은 자신의 소유지이며 천혜의 요새라고 불렸던 봉오동의 지형적 특색을 이용하여 봉오동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보름 전에 이미 모든 전쟁 준비를 완료하고 일본군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최운산 장군은 1920녀 5월부터 전쟁에 대비하여 마을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켰다. 주민들은 가재도구까지 챙겨서 마을을 떠났다. 대통합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는 전시체제로 편성되어 연대별로 각 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적군의 진입로가 잘 보이는 위치에 교통호 형태의 참호를 파고 중요 지점에 기관총을 배치했다. 또한 전쟁 물자를 보급하는 특별부대를 편성하고 부상병을 신속하게 치료할 수 있도록 의무부대도 후방에 배치했다. (주석 1)


봉오동은 "독립군을 편성할 때에 사령부를 봉오동에 설치하기 위하여 기성촌락을 군사촌으로 개발한 것은 주로 최진동 동생되는 최운산과 최치홍 형제의 노력의 결과이다." (주석 2)
  
a

봉오동 전적지 봉오동 전적지 ⓒ 박도

 
이강훈이 둘러보았던 봉오동의 실상이다. 

왕청현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가량 떨어진 산간이다. 장백산의 지맥인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꾸불꾸불 갈지자 형으로 장장 20리를 뻗은 계곡 지대에 1백 수십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이 부락에는 최명록 3형제가 있어서 그들의 지도 밑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재류동포의 생활과 기타 모든 면에서 잘 짜여 있었다.

가옥구조도 한국식이어서 마치 국내의 한 지방 같았다. 중국인 가옥이 몇 집 끼어 있어서 며칠 만에 한 번씩 중국 관헌이 순시를 돌 뿐 독립군의 자유무대였다. (중략) 봉오동은 대부분이 새로 지은 번듯한 가옥인 데다가 특히 상촌은 도로망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이곳은 천연적으로 일기당천 만부부당한 요새로 된 것을 인공을 가해서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꾸미자는 계획이었다. 마을 한쪽에는 새로 지은 목조 교사가 있었으며, 교사 앞에는 독립군의 연병장이 있었다. (주석 3)


1920년 6월 27일 새벽 6시 30분경 일본군 척후부대가 고려령 서편 고지에 나타났다. 매복 중이던 독립군 전위대의 일제 사격을 받고 퇴각했다가 오전 11시 30분경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고려령을 넘어왔다. 


마침내 역사적인 봉오동 전투가 시작되었다.
 
a

초모정자산, 산 아래마을이 봉오동 중촌이었다. 초모정자산, 산 아래마을이 봉오동 중촌이었다. ⓒ 박도

 
산으로 올라온 일본군의 후미가 매복지점을 지날 무렵 봉초봉 독립수 아래에 서있던 사령관 최진동 장군이 전투개시를 알리는 신호총을 발사했고 동시에 맹렬한 사격이 시작되었다. 완전히 포위된 일본군은 혼란에 빠졌다. 

더구나 마굿간에서 탈취해 간 말들이 총소리에 놀라 높이 뛰어올랐다. 백마를 빼앗아 탔던 일본군 장교는 말에서 굴러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다. 기관총과 대포가 실린 수레를 끌고 간 말들은 무기를 실은 채 마을을 향해 거꾸로 내달렸다. 본격적인 총격전이 계속되었다. 

무기를 내리기도 전에 말들이 무기를 싣고 마을을 향해 달려가 버리는 바람에 일본군은 대포와 기관총 등 일부 대형무기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했다. (주석 4)


주석
1> 최성주, 앞의 책, 20~21쪽.
2> 이강훈, 『무장독립운동사』, 96쪽, 서문당, 1975.
3> 앞의 책, 95~98쪽.(발췌) 
4> 앞의 책, 31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봉오동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AD

AD

AD

인기기사

  1. 1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2. 2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민주당은 앞으로 꽃길? 서울에서 포착된 '이상 징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