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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에 열광하는 사람들 심리, 단순하진 않았다

[막장의 세계⑤] <펜트하우스> 통해 본 막장드라마, 무의식과 현실의 모순된 반영

21.01.29 07:44최종업데이트21.01.29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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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 폭력, 복수, 욕망 등을 총망라한 드라마를 '막장 드라마'라고 부른다. 얼마 전 높은 시청률로 막을 내린 <펜트하우스> 시즌1이 증명하듯 이미 막장은 우리 사회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최근 들어선 예능에까지 막장적 요소가 곁들여지고 있다. '막장의 세계'에선 불과 몇 년 사이 우리 삶에 훅 들어온 '막장'의 요모조모를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본다.[편집자말]
나는 오마이뉴스에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을 연재하고 있다. 워낙 드라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일상 짬짬이 드라마를 보며 휴식을 취하는데, 종종 그 인물들의 심리를 추리해보는 직업의식이 발동된다(나의 직업은 상담심리사다). 그런 생각들을 글로 엮은 게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이다. 그런데 소위 '막장'으로 분류되는 드라마 속 인물에 대한 글을 썼을 땐 늘 분노 어린 댓글들이 달린다.
 
'이 드라마 절대 안 본다.'
'이런 드라마에 무슨 글을 쓸 가치가 있다고!'

 
나 역시 이런 드라마를 볼 때마다 마음 가득 불편함이 밀려온다. 사실 얼마 전 종영한 <펜트하우스>는 '드라마 인물 탐구생활' 한 편을 쓴 후 7회부턴 아예 시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승승장구했다. 시청자들은 열광했고, 이 드라마 출연진들은 한 단계 인기가 상승했으며 시즌2, 시즌3가 나온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심리학의 '인지부조화' 이론에 따르면 자신이 비난하는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은 부자연스런 행위다. 사람들은 상반되는 생각과 감정을 동시에 느낄 때 불안해지고 이를 일치시킴으로써 불편을 해소하려 한다. 때문에 나처럼 드라마 시청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드라마가 '좋다'고 호평하든지, 어떤 조치를 취해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막장 드라마에 관해서라면 이런 이론이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막장 드라마를 나쁘다고 생각하고 욕을 하면서도 계속 본다. 왜 대체 우리는 '막장'에 빠져드는 걸까?
 
억압된 욕구의 반영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프로이트는 인간의 마음은 상반되는 두 가지 충동, 즉 에로스와 타나토스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다. 에로스는 자기를 보존하고자 하는 욕구와 성적 욕구를 합쳐 부르는 말인데 프로이트는 이를 삶을 향한 본능이라고 보았다. 에로스는 '리비도'라는 형태의 정신적 에너지로 축적되어 인간의 내면 세계를 움직인다. 반면, 타나토스는 죽음의 본능 혹은 파괴의 본능으로 불리는데, 자신이나 타인을 파괴하거나 공격하고 하고 싶은 충동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이 두 가지 본능이 인간의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다고 했으며 이런 본능이 지나치게 억압될 때 사람은 병이 든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간 사회는 본능적 욕구를 마음껏 표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도덕과 윤리, 사회적 관습, 법과 제도는 본능들을 사회에서 용인 가능한 방법으로만 표현하도록 통제한다. 때문에 본능적인 욕구는 원초아의 영역에 무의식으로 저장된다. 사람들은 자라면서 초자아를 발달시켜 사회의 도덕과 윤리, 관습을 내면화하고 자아를 통해 원초아와 초아자의 갈등을 조정하며 본능과 현실을 조화시켜 간다.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 저장된 본능적 욕구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때때로 말실수로 드러나기도 하고, 스트레스 상황에서 불쑥 튀어나기도 하며, 매일 밤 꾸는 꿈은 무의식적 욕구가 활동하는 무대가 되어준다.
 
나는 최근 방영된 <펜트하우스>를 보면서 이 드라마가 마치 '꿈'같다는 생각을 했다. 동화에나 나올 법한 성에 갇힌 상류층 사회, 중세 유럽의 귀족처럼 차려입고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밤 중 '꿈'에서나 만날 수 있는 설정일 테다. 비현실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개연성 없고 극단적인 사건들은 마치 꿈 속에서 무의식적 욕구가 드러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불륜과 세속적 성공에 대한 집착은 에로스를 연상시켰고, 살인과 죽음, 폭력적인 장면들은 타나토스를 떠올리게 했다. 돌아보면 <펜트하우스>뿐만이 아니었다. 현재까지 '막장'이라고 불린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현실에서 금기된 사랑과 배반과 복수 등을 주요 동력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각기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막장 드라마'는 현실에서는 충족하기 힘든 무의식 속 본능적 욕구를 매우 잘 반영하고 있다. 무의식적 욕구를 자극받은 시청자들은 그 매력에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의식의 차원에서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에 비난을 퍼붓지만, 무의식 차원에서는 자꾸만 끌리게 된다. 때문에 '의식'에선 욕을 하지만 '무의식'에선 찬양하는 이중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동화속 왕자님들처럼 차려입고 시체를 처리하러 가는 <펜트하우스>의 인물들 ⓒ SBS

 
카타르시스 경험
 
'막장' 프로그램들의 영향은 단지 무의식을 반영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은유추출기법을 활용해 막장 드라마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분석한 김봉현, 김병철, 김경란, 조수선의 2019년 논문(은유추출기법을 활용한 TV드라마 콘텐츠의 소비 경험 및 소비 의미에 관한 이용자의 심리구조와 공유개념 분석에 관한 연구: 막장드라마를 중심으로)에서 참여자들은 막장 드라마를 통해 '현실의 어려움을 잊고' '기분 전환을 하며' '엄두도 못냈던 자유분방함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즉,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는 의미다. 카타르시스란 무의식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표현함으로써 정서적으로 정화되는 과정을 말한다.
 
막장드라마를 통한 카타르시스는 두 가지로 일어난다. 먼저, 드라마 속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을 표출하는 것이다. 극 중 금기된 사랑에 자신의 에로스를 담아보고, 주인공들이 대신해주는 폭력에 이입해 안전하게 나의 공격성을 표현할 수 있다. 억눌린 본능들을 간접적으로 충족시키고 표현하는 것은 정서적인 스트레스를 해소해준다.
 
또 하나는 이런 자극적이고 터무니없는 세계가 펼쳐지는 드라마에 대해 '욕'을 하는 행위를 통한 카타르시스다. 사람들은 등장인물의 면면 속에 현실에서 대놓고 비난할 수 없는 대상을 대비시킨다. 나를 괴롭히는 상사나 시가 식구들, 속 시끄럽게 하는 남편을 대신해 이와 유사한 특성을 지닌 드라마 속 인물들에게 욕설을 퍼붓는다. 이 행위 자체가 바로 억압해둔 분노의 표출인 것이다. 게다가 막장 드라마의 인물에 대한 비난은 타인의 공감을 얻는다. 함께 욕해주는 사람들과 소통의 기쁨까지 느낀다. 카타르시스와 공감을 동시에 얻으며 감정의 정화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막장 드라마의 카타르시스 기능은 주 시청자층이 여성인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여전히 가부장적인 문화 속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비교적 자유롭게 성적인 욕구나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욕구들을 억압하도록 사회화되어온 여성들은 드라마를 통한 정서적 해소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실의 투영
 
하지만 막장 드라마가 무의식만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막장 드라마는 현실의 문제들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삶의 조건들을 투영하기도 한다.
 
2010년대 중반까지 '막장 드라마'의 스토리를 이끌어온 동력은 주로 불륜, 치정 혹은 고부간의 갈등이었다. 하지만 2010년대 후반으로 넘어오면서 막장 설정에 아이들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2018년 방송됐던< SKY캐슬 >은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지위를 대물림하기 위한 부모들의 경쟁이 주요 소재였다. 지난 해 화제를 모았던 <부부의 세계>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한 이혼을 위해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폭행을 목격하게 하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했다. 최근 종영한 <펜트하우스> 역시 부모들의 무모한 경쟁과 질투의 뿌리는 자녀들의 입시 문제에 있었다. 특히, <펜트하우스>에는 부모의 폭력성을 청소년 자녀들이 답습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막장 드라마에서 자녀 문제가 주요한 소재로 등장했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의 부모들이 자녀를 '대상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겠다. 이는 계층간 이동이 더욱 제한되면서 자신의 부와 권력을 자녀에게 물려주어 공고히 하거나, 자녀를 이용해 신분 상승을 꾀하고 싶은 욕망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흐름은 몹시 위험해 보인다. 잘못된 부모의 태도를 매우 극적으로 그것도 상류층의 권력 유지 수단으로 그려내는 것은, 자녀를 대상화하는 현실의 문제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또한 청소년들이 이들 드라마를 시청한다면 또래들의 '막장'에 과몰입해 악영향을 받을 가능성도 농후해보인다.
 
한편, 막장 드라마를 시청하면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모순된 감정은 인간이 처한 현실의 이중성을 그대로 투영한다. 앞서 인용한 김봉현 외의 논문에 따르면 막장드라마의 시청자들은 자신을 '한심하고 유치하게' 느끼면서 '불편하고 복잡한 심정'으로 드라마를 시청한다고 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삶을 얻지만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져 가고,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면서 스스로를 기쁘게 하고자 애쓰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인간의 삶 자체가 모순을 품고 있는 것이다. 불편한 감정들을 감내하면서도 드라마를 시청하는 행위는 죽는 줄 알면서도 살아가고,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보편적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최근 방영된 막장 드라마들에는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된 경쟁과 질투가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SBS <펜트하우스>의 한장면 ⓒ SBS

 
이처럼 막장 프로그램에 '욕하면서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가 처한 억압적이고 이중적인 현실과 관련이 매우 깊다. 억눌린 욕구들이 많을 때, 현실에서 이런 욕구들을 건강하게 해소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막장'에 끌린다. 특히, 코로나 19로 인해 사회적 통제와 억압이 더욱 심해진 요즘엔 드라마뿐만 아니라 예능프로그램까지 '막장'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제 '막장'을 일상적으로 접한다. 하지만, 매일같이 보는 '막장'은 더 이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한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불륜과 폭력, 반인륜적인 이야기들은 오히려 불쾌감과 혐오를 가져올 뿐이다. 자칫, 이런 프로그램에 자주 노출된 어린 세대들이 '막장'을 '진실'로 받아들일까 겁이 나기도 한다. 프로그램 제작진들에게 책임감이 더욱 요구되는 시점이다.
 
억압과 통제가 존재하는 한, 건전하게 본능적 욕구들을 표현하고 해소하는 문화가 정착되지 않는 한 '막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좋지 않은 것인 줄 알면서도 계속 막장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욕하면서도 이들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사람들. 막장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씁쓸하면서도 애틋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필자의 개인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막장드라마 펜트하우스 심리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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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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