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냉장고에서 꺼내 닭장에 넣은 달걀, 손주의 반응이

거제도 갯가마을의 좌충우돌 양계 일지 ②

등록 2021.01.23 17:36수정 2021.01.24 17:39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막 낳은 달걀 미처 알둥지를 마련해 주지 않아서 바닥의 구석에 달걀을 낳았다. 암탉 4마리가 하루에 약 2~3개의 알을 낳는다. ⓒ 이승열

 
입식 사흘째를 맞아 종일 수탉이 빽빽거리고 암탉도 좀 불안한 기색이 보였다. 어제 최초 계란 두 개를 수거하여 손주들에게 자랑했더니 일요일에 와서 직접 그날 새로 낳은 계란을 걷어 오는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약속을 하기는 했는데 아직 계란을 낳지 않는 곤란한 일이 생겼다. 어쩔 수 없이 딸네 가족들이 진주에서 출발했다는 연락을 받고 도착 10분 전에 냉장고에 보관 중이던 어제의 계란 두 개를 닭장 안에 넣어 두었다.

역시 도착하자마자 손자는 닭장으로 뛰어갔다.

"와, 할아버지 저거 봐. 계란 두 개나 낳았어요. 내가 가져와도 돼요?"

조심스럽게 계란을 꺼내 온 손주가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계란이 좀 작고 차가워요. 닭이 몸속에서 계란을 낳으면 따뜻할 줄 알았는데."
"할머니, 냉장고 안에 계란 넣어두면 안 돼요. 병아리가 추우니까. 알았죠?"


헉, 낳은 지가 오래 돼서 그럴 거라고 변명했지만 내가 졌다 싶었다. 할매 할배의 총기가 떨어진 건지 다섯 살 손주가 영리한 건지는 헷갈렸지만, 손자가 천재인 편으로 정리했다.

"손주 이놈들아. 할미 할배가 뽈뽈 기어 다니면서 꺼냈다가 다시 넣는 이 계란 사랑을 너희들은 언제 커서 알것냐."

그나저나 닭들이 괘씸했다. 그러나 딸네 가족들이 다 가고 나서 다시 닭장에 들어가 보니 그새 계란 한 알을 낳아 두었다. 알 낳은 것은 닭 마음대로지, 사람 마음대로는 아닌 모양이다.
 

처음 보는 닭장이 신기한 손주들 외갓집의 닭장이 신기한지 오자마자 닭장으로 뛰어 가서 달걀을 꺼내 왔다. 손녀는 무서워 했고 손자는 스스럼 없이 들어가서 알을 가져 왔다. ⓒ 이승열

 
손주가 온다면 좋고 간다면 더 좋다

어제 딸네집 식구들이 왔다 간 후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나는 4시에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온 후 다시 잤고 아내는 피곤한지 계속 잤다. 하긴, 밥 먹이고, 목욕시키고, '동대문이 열렸다' 하면 기어들어 가고, 공룡책 읽어 주고, 동요 같이 부르고, 삐진 손녀 달래주고... 그러다가 한바탕 웃고 하다 보면 진이 다 빠진다.

세상의 할배할매들은 "손주가 온다면 좋고, 간다면 더 좋다"라며 손주 사랑과 자신의 노구를 싸잡아 말한다. 손주가 생기기 전에는 그 말이 좋다는 말인지 안 좋다는 말인지 헷갈려서, 손주가 생기면 할배 할매들은 노망이 들어 말에 논리가 없어지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저녁 늦게 떠나는 차를 배웅할 때, 손자가 창문을 열고 "할머니 수고하셨어요, 고생 많이 하셨어요"라고 하니 작은 손녀도 "할머이 슈고하셩셔요"라고 따라 했다. 늦은 밤, 주차장에서 그 말을 들으며 할배 할매들 말을 떠올렸다.

닭이 밤중에 자다가 알을 낳는 줄 아는 초보 농부
 

텃밭의 상추와 열무 가족이 먹기 위해 심었던 상추와 열무는 이제 닭 차지가 됐다. 열무의 무우 부분은 먹지 않고 남겼다. 절반 이상이 없어져서 점점 불안해 진다. ⓒ 이승열

 
다음 날 아침 7시 반에 텃밭의 열무 세 뿌리를 뽑아 들고 닭장에 갔더니 계란은 없었다. 잠자는 아내를 깨워 계란이 없더라고 했더니 이렇게 말한다.

"닭도 밤에 자야 계란을 낳던지 할꺼 아잉교. 당신이 자다 일어나서 오줌누듯이 그 애들도 자다 일어나 계란을 쏙 낳것소."
"아니, 일어나 보니 흰 눈이 내려 있고 잠을 깨보니 묵은 종기가 터져 있는 게 세상 이치다 아이요."


아내는 "그런 아침의 기적은 다 어릴 때의 일이고 지금 와서 그리싸면 우짜요. 고마 더 자소. 오전에 낳것지..."라며 투덜거렸다.

손톱만 한 텃밭의 열무와 상추는 이제 반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내는 잠만 자고 있다. 혼자서 닭들의 양식을 걱정하다가 아침이 지나 가고 있다. 닭이 짖어도 아침은 가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제때에 알을 낳지 않는 닭을 보며 고민했다. 이럴 때는 무작정 화를 낼 일이 아니라 과학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실을 늙어가면서 깨달았다. 아내가 혼자 일을 나간 사이 원인 규명에 몰입했다.

그러다 햇볕 부족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역시 연구하면 다 된다. 우리 주택은 남향으로 번듯하게 지어 놓고 닭집은 북향의 축대 밑에 지어 줬으니 닭 보기가 민망하다. 그렇다고 집을 맞바꿔서 우리가 닭장에 살 수는 없다.

그렇다면 미러법을 도입해야겠다. 먼저 태양의 각도와 이동 속도를 파악해야 한다.
23.5도로 기울어져 있는 지구의 북반구에는 여름에는 태양각이 크고 겨울에는 작다.

태양 각도 = 90- 위도 + (태양 경사도: 동지에는 -19.9, 하지에는 23.5)의 공식에 대입하면 우리 거제도는 동지에 태양각이 약 30도가 나온다. 다음, 해가 동쪽 산으로 떠서 서쪽 산으로 사라지는 각도는 약 80도였다. 아내의 전신 거울을 안방에서 꺼내 와서 반사각을 맞췄다. 닭장의 우측에서 좌측 끝까지의 각도는 10도이니 하루에 8번만 이동시켜 주면 된다.
 

자칭 '수동식 태양광 스마트 양계 시설' 햇볕을 직접 받지 못하는 닭장에 거울의 반사각을 이용하여 난방기능을 보완했다. 하루에 약 8회 정도 각도를 조정해 줘야 한다. ⓒ 이승열

 
백수인 나에게 이 일은 식은 죽먹기다. 먹고 이동시키고, 쉬고 이동시키고, 졸다 이동 시키고 하면 끝이다. 이로써 '수동식 태양광 스마트 양계시설'이 완벽하게 구축되었다. 나중에 아내가 와서 거울을 찾으면 모른다고 시침을 떼면 된다. 혹시 들키더라도 밤에는 안방에, 낮에는 닭장 앞에 두면 된다고 설득할 생각이다. 닭 다섯 마리 키우기가 딸 둘 키우기와 손주와 놀아 주기보다 힘들다.

아무리 언문이 막힌 닭들이라지만 이래도 계란을 낳지 않으면 저놈들은 닭도 아니다. 진짜로! 좌충우돌 양계의 길은 춥고 복잡하다.
덧붙이는 글 거제도 갯가에 엎드려 살면서 백봉 오골계 다섯 마리를 키우는 은퇴한 백수입니다. 생전 처음 키워보는 닭과 씨름하면서 생긴 이야기가 코로나로 지친 일상에 작은 웃음이라도 주면 좋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2019.2월에 퇴직한 후 백수이나, 아내의 무급보좌관역을 자청하여 껌딱지처럼 붙어 다님. 가끔 밴드나 페이스북에 일상적인 글을 올림.

AD

AD

인기기사

  1. 1 주한미군 범죄 중 가장 잔혹한 사건
  2. 2 김정은 삼촌 김평일의 '평탄한' 인생
  3. 3 6개월째 수입 0원...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여행'
  4. 4 조국이 분석한 윤석열이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유
  5. 5 내장사 대웅전 방화범은 예비 승려... 불교계 망연자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