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들의 존엄에 대한 변론

[서평] 김원영 지음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등록 2021.01.25 10:13수정 2021.01.2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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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에 튕기는 빗방울을 새가 먼저 알고 입을 다물었다. 배곯은 새끼들에게 하나라도 더 가져다줄 먹이는 비 장막에 가리었다. 갠 날, 꽁지까지 스며드는 빗물을 이따금 털어내도 삶까지 마른 것은 아니었다. 하루를 디뎌, 인생을 버텨내는 휠체어, 지팡이, 확대기, 화면 낭독기, 구부러진 숟가락이 비장애인의 시야 바깥에 있다. 비는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내리었다. 비는 날씨가 아니었다. 비는 꿈이었다. 생명이었다. 변론이었다. 존엄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드는 생각이었다.
 
"고유성을 존중받지 못하는 인간은 흐릿하게만 기억되고, 번호나 기호로만 존재하며(교도소가 수인번호로 재소자를 호명하는 이유는 그의 개별적 인격성이 제한된 상태임을 드러낸다), 특정한 장애나 성적 지향, 성별, 인종 등으로만 호명된다. 나라는 사람은 존중받지 못할 때는 그냥 한 사람의 장애인이지만, 존중받을 때는 장애를 가진, 그리고 그 밖에 이러저러한 특성과 이야기를 가진 김원영이 된다."(14p)
 
'가온'이라는 순우리말이 있다. 옛말 중 '가온데'에서 따온 말로, '세상의 중심이 되어라'는 뜻이다. 얼핏 보면 강한 어감이지만 삶이라는 공간으로 단어를 불러오면, 단어는 어떤 색도 띠지 않은 채 이곳저곳에 기준선을 세운다. 왜냐하면 중심이라는 고정불변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가온의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되어라'는 술어가 동반 돼 있는 까닭에 '가온'은 그 어디에 붙여도 '중심'이라는 날개를 편다.
 

<책표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사계절/2020) ⓒ (주)사계절출판사


골형성부전증으로 휠체어를 타는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은 장애나 질병, 즉 아픈 몸을 가진 사람들의 개인 서사를 통해 '가온'을 말하고 있었다. 일상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는 시혜의 대상이 아닌, 삶의 주체로서, 그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갖는 '존엄'을 말했다. 이 책의 핵심이다. 책은 장애인의 삶을 두고 잘못됐다 명명하는 사회적 차별적 기호에 대한 항거이자, 장애인들의 존엄에 대한 변론이었다.

자기 서사의 탄생과 커버링 압력
 
"며칠 아팠다가 낫는 감기나 한 달 정도 입원했다 치료를 받고 끝나는 일시적인 질병은 우리가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계기가 되고, 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는 기회가 될 뿐이다. 하지만 만성적인 질병, 늘 약을 먹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고, 때로는 빨리 죽음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 질병이나 우발적인 사고로 갖게 된 '장애'라는 몸 상태는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이이야기narrative가 된다. 내 몸이 가진 이 속성, 흔적, 경험으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정체성이란 결국 한 사람의 이야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128~129p)

몸이 기억하고, 몸이 반응하는 몸의 서사는 결국, 가장 강렬한 통증이자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오감이 생성한 서사이다. 나름의 방식으로 서사는 납득 돼야 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 없이는 만성적 질병이나 장애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장애인을 존엄한 존재로 대우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인생의 자율적인 형성 주체, 작가/저자를 존중함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장애는 노련할 수도 없으며, 극복해야 할 대상은 더더군다나 아니다.

저자는 1960년대 미국 서부의 버클리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된 자립생활운동이 자신의 10대와 20대의 삶에 영향을 미쳤으며 한 사람의 평등한 인간으로서 자기 결정권(자율성)의 가치를 깨닫게 해줬다고 말한다. 하지만 건강하고 독립된 정신의 가치가 장애인운동에 새로운 고민을 주었다. 그 대상이 주로 신체장애를 가진, 일부 남성 장애인들에게만 해당됐기 때문이다.

존엄은 헌법에서 추구하는 가치이자, 위계가 있을 수 없다. 자립생활운동이 '발달장애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이는 장애라는 추상어가 아닌, 개별적 서사에 집중한 저자의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질문이었다.

장애를 앓는 사람이 개별적이듯, 장애 역시 개별적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것을 장애라 말하고, 국가는 마치 시혜를 베풀 듯 복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물음이, 어쩌면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한 저자의 동력이지 않았을까.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생리나 출산 등)을 티 내지 말 것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 문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장애로 인한 특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사회적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예다."(199p)

저자는 이러한 커버링 압력을 깰 수 있는 것이 바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라고 말한다.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어떤 상황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원래 여기서는 그렇다'는 것이 통용되기 때문이다. 막연한 근거가 아닌, 제대로 된 설명을 요구하는 운동만이 커버링 압력, 차별의 본질을 건드릴 수 있을 것이다.

왜 그것이 중요한지, 청각장애인이 왜 회사에서 보청기를 가려야 하는지, 그것이 사내 분위기에 위화감을 정말 주는 것인지, 그것이 고객에게 불편함을 줄 것이라는 근거에는 인과성이 있는지 등이 그 예다. 이것이 단순히 주류와 비주류의 '대화'에만 제한할 것이 아니었다. 저자는 법이 이를 강제하거나 유도해야 함을 주장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성은 밥을 먹고 용변을 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밥을 먹고 용변을 보는 일은 너무나 중요하지만, 그렇게 동물로서 생명을 유지한 이후부터는 인간으로서 우리의 고유성이 출현한다. 밥을 먹고 용변을 보는 '스타일', 입는 옷, 향수 취향, 외출 횟수, 데이트 상대방을 고르는 기준, 머리 길이,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지 여부,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입장 등이 전부 축적되어 자신만의 개별적 서사가 창조된다. 각자의 서사를 존중하는 법이라면 '왜 당신은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이 법에게 묻는다. '당신은 왜 내가 이렇게 하면 법의 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습니까? 이게 왜 그렇게 '문지기'인 당신에게 중요합니까?'" (201~202p)
 
서로 돌봄-민주주의 시대의 가치
 
"장애인이나 병에 걸린 사람들이 우리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라면 성금을 보내고, 구세군에 거금을 쾌척하면서도 막상 그 신체와 5분도 같이 앉아 밥을 먹지 못하고, 그 신체가 버스에 올라타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하고, 그 신체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를 짓는 일에 반대한다면 그 자체로 혐오이며 다른 해명이 필요하지 않다."(267p)
 
세상에 영원한 강자는 없다. 천만년 살듯하여 만든 진시황의 만리장성도 그 아들 대에 그저 변방을 그어 놓은 돌탑에 그쳤다. 우리 몸은 질병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문장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이 산다는 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


좀 더 이기적으로 말한다면, 돌봄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할 때 약한 자의 지팡이가 되어주고, 약할 때 강한 자의 거울이 되어주는 삶, 그것이 서로 돌봄-민주주의의 시대적 가치 아닐까.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지음,
사계절, 2018


#실격당한자들을위한변론 #김원영변호사 #오마이뉴스 #김성훈 시민기자 #책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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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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