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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분 30초 영상에 담긴 진실... 정연주가 그렇게 두렵나

[하성태의 인사이드아웃] 방심위원장 내정설에 비난 일색인 보수언론과 야당에게

등록 2021.01.25 21:00수정 2021.01.2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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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7월 25일, 서울고등법원 213호 법정. 판사가 "피고인 정연주"를 호명하고는 "1946년 11월 24일생, 직업은 뭐죠?"라고 묻자, 그 피고인 정연주가 "전(前) 동아일보 기자입니다"라고 답한다.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동아일보> 해직 기자 10명이 법정에 섰다. 한국의 사법부는 이들에게 자신들을 쫓아낸 신문이 보도하지 않는 사실들을 손글씨로 써서 배포했다고 죄를 물었다. 이른바 '민주인권사건일지' 사건이었다.

판사 앞에 선 당시 30대 해직 기자 정연주는 "시간도 많이 지나고 배도 고프고 하니까, 간단하게 끝내겠습니다"라며 최후 진술을 이어갔다. 꽤 당돌한 선언이었지만, 거짓말이 아니었다. 진짜 간명하면서도 묵직한, 당당함이 철철 넘치는 2분 20여 초짜리 최후진술이었다.
 
5.16 군사 쿠데타, (박정희) 정권의 부도덕성, 뭐 이런 것도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제 자신의 심정만 간단히 말씀드리고 최후 진술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도대체 왜 성동구치소 그 감방에 누워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유가, 원인이 떠오르지 않아요. 제가 그럼 범했다는 죄라는 게 뭐냐. 나를 여기 집어넣은 건 뭐냐.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 게 죄라는 겁니다. 나무를 나무라고 한 사실, 서울대학교에서 애들이 데모했다, 함평고구마사건으로 농민들이 단식을 했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이 억울하게 똥물을 뒤집어 썼다, 이런 정말 말할 수 없는 처절한 코미디, 이런 것들이 지금 이 땅에 서슴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사건의, 이번 2심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이라는 것 명약관화한 것이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실들, 표정 하나하나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기록해서 이 역사에 증언할 것입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장고에서 발굴된 '역사의 법정' 속 녹취 음성

딱 여기까지였다. 법정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재판부는 해직기자 정연주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고, 동료 안종필·박종만·김종철 기자 등 9명에게도 1년에서 2년 형을 판결했다.

서슬 퍼런 유신 시대 박정희 정권의 재판부가 내린 판결이었다. 그로부터 30여 년 후, 해직 기자 정연주는 다시 법정에 섰다. 이명박 정권 시절이었다. 그는 <한겨레>를 거쳐 참여정부 시절인 2003년 KBS 사장에 취임했고, 연임 중 법인세를 많이 내서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로 고발을 당했다. '배임죄'였다.

2008년 '정연주 죽이기'의 재현?


<정연주 씨, KBS 非理(비리) 다 밝히고 사퇴하라>(2008년 2월 21일), <정연주 KBS 사장의 버티기는 '民意(민의) 역주행'이다>(같은 해 4월 11일), <KBS, 정연주 방송인가 국민 방송인가>(같은 해 5월 21일), <KBS '정연주 폐해' 청산하고 대수술 나서라>(같은 해 8월 6일). KBS의 정연주 해임 사건을 둘러싼 <동아일보>의 사설들이다.

정 전 사장의 '친정'인 <동아일보>가, 동료 및 후배들이, 이리도 집요했다. <동아일보>의 오매불망 바람처럼, 정 전 사장은 결국 KBS에서 해고됐고, 검찰로부터 불구속 기소 됐다. 4년 뒤인 2012년 대법원이 무죄를 확정했다. 이명박 정권과 정권의 하수인인 KBS 구성원들 그리고 검찰과 언론의 합작품이라 할 만했다.

그중 보수언론의 '정연주 죽이기'는 도를 넘는 수준이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유독 심했다. 같은 해 2월 <기자협회보>는 <동아·조선 'KBS·정 사장' 집중포화>란 기사에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KBS와 정연주 사장 관련 기사와 사설·칼럼 건수에서 다른 일간신문에 비해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정적인 내용도 가장 많았다"라며 정 전 사장에 대한 두 신문의 부정적 기사가 2배 이상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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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KBS사장이 2008년 8월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본관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원의 해임요구 결정 등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벌어진 사퇴압력에 대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 권우성

 
그랬던 <조선>과 <동아>가, 지난해 창간 100주년을 맞은 두 '족벌' 언론이 다시금 정연주 전 사장을 겨냥하는 형국이다. 최근 정 전 사장에 대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위원장 내정설이 돌면서다. 신호탄을 쏘아 올린 것 역시 <동아일보>였다. 22일 <동아일보>는 <방심위원장에 정연주 내정… 野 "이념편향 인사 철회를"> 기사에서 복수의 여권 관계자 입을 빌려 정 전 사장 내정설을 기정사실로 했다.

이에 앞서 전날(21일)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노골적인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온 정연주 전 KBS 사장을 이 정권이 혹시라도 방심위원장 후보로 검토하고 있는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즉각 철회하기 바란다"라며 내정설을 공식화했다. 그러면서 주 원내대표는 민주당 추천 방심위원들이 "민언련 일색"이라며 정치적 편향성을 지적했고, 정 전 사장의 과거 전력이나 자식 국적 문제까지 거론하고 나섰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물론 <조선일보>까지 화력을 보탰다. <조선일보>는 23일 자 사설에서 <文, 정연주 방심위로 TV 방송에 '조심하라' 노골적 위협>이라며 정 전 사장 내정이 현 정부의 방송장악 의도라 몰아갔고, <동아일보>는 같은 날 <방심위 공정성 훼손할 정연주 위원장 내정 철회하라>란 사설에서 "정 전 사장을 위원장에 앉힌다는 것은 공공연한 공정성 포기 선언"이라고 주장했다.

임기 3년인 강상현 4기 위원장의 임기는 이번 달 말까지다. 정 전 사장 내정설이 돌자마자, 역시나 보수언론과 보수야당이 사설과 당 회의 모두발언으로 주거니 받거니 논란을 증폭하며 과거 '정연주 죽이기'를 재연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보수 기독교계인 한국교회언론회도 23일 논평을 내고 "중립을 지키라"며 으름장을 놨고, 앞선 22일 보수 성향 KBS노동조합 역시 '정연주 반대'를 내건 논평을 내며 동조에 나섰다. 이들은 도대체 무엇이 두려운가.

무엇이 두려운가

정말 정치적 중립이 목적이라면, 현 제도를 바꾸자고 주장해야 옳다. 방심위나 방통위 이사, 공영방송 이사 모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중립성 논란이 일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보수야당 및 보수언론의 '정연주 반대' 주장이 진정성을 얻으려면, 적어도 정치권 추천 폐지, 시민추천 제도 찬성 정도의 주장을 솔선해야 하지 않을까. '공영방송 정상화' 이후 사장 선임에 시민평가단 제도를 도입한 MBC처럼 말이다.

내정설이 도는 정연주 전 사장 개인의 자질은 어떠한가. 이명박 정부가 출범시킨 이전 방심위 위원장의 이력은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명예교수, 검사 출신 변호사,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등이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자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과 논설위원을 지냈고, KBS 사장을 역임한 정 전 사장이 이전 위원장들보다 이력이 부족한가. 도리어 현장 언론인 출신 위원장이 하마평에 오르는 것은 환영할 일 아닌가.

21일 주호영 원내대표는 "정 전 사장은 공영방송 전파를 통해서 대한민국 건국의 유공자들을 친일파로 몰아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역사편향 논란을 야기하고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를 반신자유주의 투사로 추켜세워서 혹세무민해왔다"라면서 케케묵은 2006년 <KBS 일요스페셜> '신자유주의를 넘어서 차베스의 도전'을 거론한 바 있다.

극우보수 정치인들이 틈만 나면 거론하는, 사실과는 달리 왜곡‧과장된 '베네수엘라의 몰락'을 정연주 공격을 위해 재차 소환한 꼴이다. 차라리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슬 퍼렇게 '언론개혁'을, '검찰개혁'을, '조중동 비판'을 쉬지 않고 있는 정 전 사장의 내정 자체가 두렵다고 고백하시기를.

30년 전 법정에서의 결기 그대로, 쉼 없이 칼럼을 쓰고, 방송에 출연해 개혁을 부르짖는 정 전 사장의 개혁 의지가 왜 껄끄러운지를 제대로 밝히시기를. 그게 아니라면 "정연주 사장의 퇴임은 KBS 흑역사의 시작"이라며 이명박 정권 당시 KBS 암울했던 시기를 고백한 언론노조 KBS 본부의 고백에 귀를 기울이시라.   
 
정 전 사장의 퇴진은 한국공영방송 흑역사의 시작이었다(...). 정치권력의 입김 아래에서 공영방송의 수장이 물러났다. 4년 뒤 배임혐의는 무죄로, 그에 근거한 해임도 무효로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장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KBS의 뒤틀린 역사도 돌이킬 수 없었다. 

이후 정치권력에 대한 부역이 횡행했고 이에 저항하는 공영방송인은 인사학살과 징계로 수없이 희생되었던, 한국 공영방송의 흑역사 10년이 계속됐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 감히 정연주 사장에 대해 논하는가?

- 22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의 '정연주 전 사장 비판하는 KBS노조, 잣대부터 똑바로 하라' 논평 중에서
#정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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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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