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내내 새들에게 피와 살을 다 나눠준 피라칸사스

[디카시로 여는 세상 시즌3 - 고향에 사는 즐거움 74] 입춘

등록 2021.02.05 10:40수정 2021.02.05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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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라카사스 ⓒ 이상옥

   
겨울 내내 새들에게 피와 살을 나눠준,
나무의 덕을 읽는다, 아니 이양하를 읽는

- 이상옥 디카시 <입춘> 


고향집 서재 앞에 서 있는 피라칸사스를 보면서 이양하의 수필 <나무>을 떠올렸다. "나무는 덕을 지녔다"로 시작하는 이 수필은 인구에 회자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이양하가 연희전문 교수 시절 윤동주의 주임교수로 윤동주가 졸업 시에 졸업 기념 시집을 내려고 이 교수를 찾아가 자문을 구했다. 이양하가 윤동주 시가 항일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서 출간하면 일제의 처벌이 예상된다며 출판을 보류시켰다는 예피소드가 전한다.

윤동주는 서시 등 자신의 시들을 필사본으로 3부 만들어 윤동주 자신이 한 부, 이양하가 한 부, 후배 정병욱이 한 부 보관하였다. 정병욱은 윤동주 필사본을 육이오 때 고향집 마루밑 땅 속에 묻어 보관했는데, 해방 후 그걸 정지용 시인의 주선으로 윤동주 시집을 출간하였다는 아름다운 에피소드도 전한다.

이양하가 당시 말리지 않았으면 졸업 기념 시집이 나왔을 텐데, 시단에 알려지지 않는 대학 졸업생의 한 시집이 과연 지금처럼 주목을 받아 윤동주가 국민시인이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결과적으로는 이양하가 윤동주의 졸업 기념 시집 출판을 보류하게 함으로써 사후에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오게 돼 윤동주가 알약 대한민국 최고의 시인으로 등극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피라칸사스에게서 이양하의 '나무'을 보고 또 윤동주를 떠올려 보게 된다. 서재 앞의 피라칸사스 열매를 먹으려고 겨울 내내 산까치를 비롯하여 이름도 모르는 새들이 매일 찾아온다. 피라카칸사스가 나의 서재를 풍요롭게 해주는 것이 이양하의 수필과 융동주의 시가 우리 문화를 아름답게 장식해주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해도 좋다.


피라칸사스의 열매들이 겨울 내내 붉고 탐스럽더니 새들이 매일 와서 따먹는 바람에 이제는 얼마 남지도 않았고 시들기도 해서 진액도 다 빠져버렸다. 마치 자식들에게 아낌없이 다 주어버리고 쪼그라든 어머니의 빈 젖가슴 같기도 하다. 쪼그라든 몇 점 남지 않은 열매를 따먹겠다고 입춘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새들은 한결같이 찾아온다. 쪼그라든 열매마저 다 따먹을 심산인 것 같다.

나무의 덕을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서재 앞의 피라칸사스는 자식들을 위해서 피와 살을 다 나눠주고는 정작 자신은 초라해진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다.
덧붙이는 글 |디카시는 필자가 2004년 처음 사용한 신조어로,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를 한 덩어리의 시로 표현한 것이다.
#디카시 #나무 #이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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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디카시연구소 대표로서 계간 '디카시' 발행인 겸 편집인을 맡고 있으며, 베트남 빈롱 소재 구룡대학교 외국인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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