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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모레 육십, 어느 젊은 할아버지의 명절증후군

음식으로 가족을 괴롭히지 마시라, 그건 죄악이다

등록 2021.02.13 12:08수정 2021.04.12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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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 날이 왔다. 민족의 대명절 설이다. 우리 식으로 진정한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다. 물론 노는 날이다. 뜻 깊은 휴일인지라 앞뒤로 하루씩 더 논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만나 함께하라는 나라의 배려다. 아이들은 세뱃돈 받을 생각에 들뜨고 직장인들은 맛난 것 먹으며 사나흘 동안 게으름 부릴 수 있으니 신난다. 코로나19로 가족 상봉조차 어려운 지경이지만 설은 여전히 즐겁다.


하지만 난 그 생각만으로도 어깨가 무지근하다. 추석 지낸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 그 날이 가까워질수록 한숨이 짙어진다. 영락없는 명절 증후군이다. 남자가, 그것도 이제 손주 재롱이나 볼 중년 할아버지가 그게 뭔 소리냐 하시겠지만 진짜 내 심정이 그렇다. 그 속내를 남들은 전혀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명절증후군의 사연

어머니와 둘만 남은 지 3년째다. 그동안 우린 추석과 설이면 어김없이 차례를 지내왔다. 아버지 기일도 꼭 챙긴다. 일 년에 2번 차례상을 차리고 제사를 1번 모신다. 처음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게 후손 된 도리려니 생각했다. 단 그냥 시늉만 하는 정도? 최대한 간소하게 차리고 지내왔다. 어머니 건강도 그렇고, 명절이라고 올 사람도 없었다.

나도 그리 생각했다. 그저 전 몇 장 부치고, 고기와 생선에 과일 몇 개 있으면 되지 싶었다. 별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말만 그렇다. 현실은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유별난 음식 고집으로 더 힘들었다. 뭐든 당신 손으로 직접 해야 하는 분이다. 행여 나물 하나라도 사다 쓴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다. 팔순을 훌쩍 넘기고 온몸이 다 불편한 몸인데도 그러신다.


몸을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시니 들고, 옮기고, 씻고 써는 건 내 몫이 됐다. 어머니는 한 자리에서 부치고, 무치고, 볶고 끓이신다. 나는 제주(祭主) 역할도 하고 설거지와 뒷정리까지 담당한다. 그건 딱히 그러자고 합의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자연스레 업무분장이 이루어진 거다.

해 본 사람은 안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얼마나 번거롭고 고달픈 일인지. 품도 많이 들고 걸음도 많이 옮겨야 한다. 나중엔 팔다리며 어깨까지 다 아프다. 특히 설거지는 백미다.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도대체 저걸 언제 꺼냈지 싶게 접시며 그릇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다. 그게 뭐라고 그리 엄살이냐 하시는 분도 있겠으나, 그건 평소 그런 일 안 해 본 분들 말씀이다.

지난 추석까지 그랬다. 뭐든 하면 할수록 익숙해져야 하는데, 이건 갈수록 힘들어진다. 게다가 2월엔 비슷한 일을 두 번 연거푸 치러야 한다. 아버지의 기일이 있어서다. 나도 그렇지만 노모에게도 더 이상은 무리다 싶었다.

며칠 전 어머니께 긴급회의를 요청했다. 안건은 설 차례와 제사의 통합방안이었다. 차례는 조금 더 약소하게 차리자, 제사는 집에서 하지 말고 나만 아버지 수목장에 가 약식으로 치르자고 제안했다. 내가 세례까지 받은 엄연한 그리스도인이란 사실도 은근히 강조했다. 웬일인지 어머니는 그 의견을 별 수정도 없이 선선히 받아들이셨다. 말씀은 안 하셨지만 그동안 어머니도 힘드셨던 모양이었다. 우리의 양자회담은 순조롭게 끝이 났다.

누구에게 혼자 떠맡기지 말고
 

올해 차례상 가짓수도 양도 대폭 줄였다. 너무 허전해 뵈는 듯해 조상님들께 죄송스러웠다. ⓒ 이상구

 
이번 설은 '2.1 합의(어머니와의 회의가 2월 1일에 있었다)'에 의거한 그 첫 번째 차례였다. 어머니는 약속대로 나물 세 가지에 생선찜과 육전, 산적과 동그랑땡 그리고 녹두전 '몇 장만' 하셨다. 상이 허전해 보일 정도였다. 양도 지난 추석의 반만 하셨다. 손님 없이 두 식구만 먹으면 2~3일 정도 먹을 양이었다. 혼자 하는 원맨쇼 차례와 음복까지 잘 마무리했다.

대망의 설거지 차례였다. 참 희한한 노릇이었다. 음식의 양과 가짓수는 줄었는데, 설거지는 하나도 줄지 않은 것 같았다. 꼬박 1시간이 걸렸다. 접시와 그릇들을 잘 말려 제자리에 넣어두고 의자에 앉으니 피곤함이 밀려온다. 아직 진득한 기름 냄새가 가시지 않은 집안은 적막하다. 안방에 드신 어머니의 코고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려온다.

그러실 만도 하다. 어머니의 설은 이미 열흘 전부터 시작됐다. 식재료를 사 오고, 녹두를 불리고, 만두를 빚으며 일찌감치 설을 준비해 오셨다. 명절 당일에는 오전 내내 서 계셨다. 그러니 그럴 만도 했다. 대수술을 받은 후엔 부쩍 기력이 쇠하셨다. 많이 좋아지긴 했어도, 예년 같진 않으시다. 아들 잘못 둔 덕에 저 연세까지 이 고생이시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설거지 거리들 믿을 수 없다. 이만큼 쓴 기억이 없는데도 설거지 거리는 계속해서 쏟아져 나온다. ⓒ 이상구


코로나로 가족들 만남까지 제한됐다. 온 가족이 왁자하게 모여 앉아 음복을 하고 정을 나누는 풍경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그래서 아쉽지만, 또 그 때문에 오히려 살맛난다는 분들도 많다. 명절스트레스로 고생하던 이 땅의 며느리들이 그렇다. 내가 직접 그거 하지 않을 땐 그 분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흘겨보기까지 했다.

사람은 그렇게 어리석다. 제가 직접 겪어 보지 않고는 남의 사정 헤아리지 못한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가만히만 있으면 좋으련만 참견하고 타박하고 심지어 무시한다.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손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입으로만 부려먹고 골탕까지 먹이기 일쑤다. 이제부턴 그러지 마시라. 그건 죄악이다. 그런 건 꼭 대가를 치르게 돼 있다.

예수의 충직한 사도 바오로도 일찍이 그를 경계했다.
 
"그대의 형제가 음식 문제로 슬퍼한다면, 그대는 더 이상 사랑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로마서 14:15)."

그 '음식'이란게 우리의 명절음식을 가리킨 것은 아니겠으나 '형제' 대신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넣어 생각하면 코로나 이전 우리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가. 

나는 지금 그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형제를 돕지 않은 죄다. 하지만 이런 거라면, 먹을 것 나르고 그릇 씻는 벌이라면 얼마든지 받겠다. 그건 내 어머니가 여전히 음식을 짓고 계시다는 말과 같은 셈이니 그렇다. 불가능하겠지만 그리 해주시길 신에게 기도해 본다.

오늘 아침에 본 새해 첫 태양은 무척이나 붉고 탐스러웠다. 그 태양의 기세처럼 여러분 모두 건승하시길.
#설날 #차례 #명절증후군 #설거지 #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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