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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고문후유증으로 병고에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46회] 최운산 장군은 끝까지 무장투쟁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등록 2021.02.21 15:24수정 2021.02.2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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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반병률

 
최운산은 모두 여섯 차례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과 옥고의 후유증으로 그토록 건장했던 육신이 차츰 허물어져갔다. 육신뿐만 아니라 척살의 대상이던 일제가 욱일승천의 기세로 중원대륙을 침탈하고 있어서 정신적인 아픔도 이에 못지 않았다. 

감옥에 있을 때 가문의 큰 기둥이었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1941년에는 육친이면서 동지이고 전우이던 맏형을 잃었다.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전향하거나 귀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늘 아래 어디에서도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국이 정신과 육신을 짓눌렀다. 

30여 년 동안 만주대륙을 누볐던 무장 최운산은 어느덧 50대 중반의 연치에 이르렀다. 오랫 동안 독립전쟁을 하느라 많았던 재산도 대부분 소진되었다.

"30년이 넘는 긴 시간 대규모 무장독립군 부대를 유지하느라 모든 재산을 소진했고, 해방이 가까워졌을 무렵엔 재산 관리조차 벅찼던 간도 제일의 거부 최운산 장군의 재산도 모두 바닥이 났다. 1945년 그에게 남은 것은 가족들이 살고 있던 봉오동 수남촌의 집 한 채와 집 주변의 텃밭뿐이었다." (주석 5)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조직의 책임자는 항상 맏형 최진동의 명의로 넘기고 자신을 뒷켠에서 실무나 군자금 모으는 일에 매진하였다. 이명과 가명을 자주 사용함으로써 누구 못지않는 무장독립운동 지도자이지만,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다. 

노령과 만주의 독립운동자들은 특히 러시아의 과격파와 연결하여 그들의 원조에 기대를 걸었다. 한편 중국인들과도 공동전선을 펴기도 하여, 1915년에 장종휘(張宗輝)에 의하여 간도 국자가에 만들어진 만국개량회(萬國改良會)에 많은 지도자가 참가하였다. 여기에 참가한 저명한 사람은 이동휘ㆍ정재면ㆍ권사용(權思容)ㆍ유기연(柳基淵)ㆍ유찬희(柳儹熙)ㆍ하희옥(河熙玉)ㆍ정안립(鄭安立), 최빈(崔斌)ㆍ유흥윤(柳興允) 등이었다.

이와 같이 만주에서는 "대한독립을 모의하려는 일 이외에는 사회도 없고, 교육도 없고, 종교도 없다"고 할 정도로 모든 것이 귀일되고 있었다. (주석 6)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항일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최운산 장군은 북만주 제1의 거부이자 무장투쟁을 전개한 항일독립투사였다.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빛나는 승리를 전취한 제1의 요인은 수년 간 독립군을 훈련시키고 양성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헌신과 희생의 결실이었다. ⓒ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최운산은 1915년 간도 국자가에서 중국인들과 공동전선을 펴고자 창설한 만국개량회에 참여하는 등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앞의 인용문 명단 중에 최빈(崔斌)이 바로 최운산이다.


일제의 야욕은 종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1941년 12월 8일 미국령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해 4월 일제는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이탈리아와 함께 파시즘세력의 주축국이 되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1935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 1937년 일제의 중일전쟁 도발,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탄과 1938년 독일의 폴란드 침략 등 파시즘세력의 광기는 일제의 진주만 기습으로 마침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영국ㆍ프랑스ㆍ중국ㆍ소련ㆍ미국 등이 연합국이 되어 이에 맞섰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무모한 도발은 우리의 독립을 가져올 것으로 내다보았다. 최운산도 이 같은 인식에 다르지 않았다. 중일전쟁에 이어 태평양전쟁은 국내는 물론 만주의 한인들에게는 실날같은 희망 속에서도 현실적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징용ㆍ질병과 전비 명목의 수탈, 탄압으로 이어졌다. 

최운산 장군은 1924~1926년 3년간 투옥당한 것을 시작으로 평생 여섯 차례나 체포되어 감옥에 갔으나 가족들이 수감 날짜를 모두 기억하지 못해 정확한 날짜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워낙 기골이 장대하고 뛰어난 무술인이었지만 잡혀갈 때마다 매번 심한 고문을 당했고 석방될 때에는 수레에 실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고문 후유증을 심하게 앓다가도 강건한 체질로 건강을 회복하고 나면 이름을 바꾸고 변장한 모습으로 다시 비밀리에 무장투쟁에 뛰어들곤 했다. 일생에 걸친 투옥과 고문에도 최운산 장군의 독립운동 의지는 단 한순간도 꺾이지 않았다. 

이렇게 일생 동안 쉴 새 없이 굴곡을 겪으면서도 최운산 장군은 끝까지 무장투쟁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주석 7)


주석
5> 최성주, 앞의 책, 72쪽.
6> 오세창,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김창순ㆍ박성수 편』, 『한국독립전쟁사』, 78~79쪽, 삼광출판사, 1989.
7> 최성주, 앞의 책, 82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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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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