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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ㆍ청산리대첩을 기리는 '승전기념일' 제정하자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 / 53회] 후기 - 무장투쟁의 금자탑인 두 대첩의 역사적 의미를 현재에 평가로 되살려야

등록 2021.02.28 18:51수정 2021.02.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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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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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 독립운동 역사상 최대의 승리, 청산리대첩을 표현한 ‘청산리전투도’ ⓒ 국가보훈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것은 이해 6월의 봉오동대첩과 10월의 청산리대첩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장투쟁의 금자탑인 두 대첩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를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국치 10년 만에 최초의 항일전에서 승리한 전승이었다. 국난ㆍ국치ㆍ국망의 과정에서 수많은 의열ㆍ의병투쟁이 있었지만 대부분 개인 또는 소수에 의한 자기희생적인 투쟁이었다. 그런데 봉오동 전투는 800명, 청산리전투의 경우 5개 연합부대 1200명의 독립군이 참전하였다. 대한제국 군대가 1907년 강제해산된 후 최대 규모의 독립군이 편성되고,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이었다.

둘째, 1919년 3ㆍ1혁명이 일제의 야만적인 학살작전으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진압된 후 국내의 의혈청년들이 국경을 넘고, 오래 전부터 만주일대에서 무장전쟁을 준비해온 독립군 지도자들과 힘을 모아 항일전쟁을 치렀다. 그런 의미에서 3ㆍ1혁명의 연장전이다. 

셋째,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승만의 비현실적인 외교노선에 빠져 있을 때, 만주지역 우리 독립군의 무장전쟁은 임시정부의 노선을 바꾸는 계기가 되고, 이후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에 이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게 되었다. 

넷째, 1876년 불평등 강화도조약 이래 일방적으로 당해온 일제의 침략과 만행 그리고 수탈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한민족이 봉오동ㆍ청산리대첩으로 다시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고, 이후 일제패망 때까지 국내외에서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상무정신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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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최초의 독립전쟁인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의 격전지 ⓒ 박도

 
다섯째, 일제는 우리 독립군을 전투력이 없는 오합지졸로 얕보았다가 두 차례나 패전을 겪은 수모를 당하였다. 봉오동전투에서 참패한 일본군은 최신무기로 무장한 정예 제19사단 병력을 주축으로 각 사단에서 차출하여 2만 5천 명 규모의 군사력을 동원했으나 이번에도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이후 일제는 한국 독립군을 두려워하였다. 

여섯째, 우리 독립군은 오래 전부터 본격적인 항일전에 대비하여 최운산형제 등의 노력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체류중이던 체코군단으로부터 기관총 등 현대식 무기를 구입하여 국치 이래 최초로 무장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신흥무관학교 출신 군관들로부터 현대식 군사훈련을 받고 치밀한 작전으로 일본군을 물리치게 되었다. 이후 중국에서 활동 하는 우리 독립 운동 단체들은 하나같이 무장독립운동을 목표로 삼았고 군사훈련과 신식 무기 구입을 서둘렀다. 


일곱째, 두대첩은 각지에 산재해 있던 독립군 부대가 대표자회의를 열어 하나의 독립군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일제와 싸워 승리하였다. 독립운동 세력의 연대는 이후 중국 관내 독립운동가들의 유일당운동과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정부수립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는 신간회운동으로 나타났다. 

여덟째, 두 전투의 승리는 중국정부와 인민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하고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는 봉오동전쟁에서 패배한 후 보복으로 경신참변을 일으켜 간도지역 한인마을을 습격, 극히 제한된 통계를 통해서도 살해된 한인이 3,700여 명, 불탄 가옥이 3,300여 채에 이르렀다.            
이같은 만행은 국내외 동포들의 대일 증오심과 독립정신을 불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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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반일전적지 기념비(2004. 6. 1. 제3차 항일유적답사 때 촬영). ⓒ 박도

 
일제강점기 1920년대 초반 그야말로 욱일승천하는 일본의 세계적인 최강 육군 제9사단 병력을 상대로, 그것도 산 설고 물 설은 이역땅 만주에서 우리 선열들은 지극히 어려운 여건에서 왜적과 싸우고 통쾌하게 승전고를 울렸다. 우리가 일제와 싸워서 이기기는 1876년 강화도조약 이래 처음이며, 멀리는 1597년 이순신장군이 12척의 남은 배로 133척의 왜군을 명량해협에서 물리친 이후 323년 만의 쾌거였다. 그야말로 청사에 빛나는 승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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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반일 전적지’기념비가 있는 봉오저수지 입구. 일대가 모두 전적지이겠지만, ‘봉오동전투’가 일어났던 계곡과 마을은 물에 잠겼더군요. 서운했습니다. ⓒ 조종안

 
정부에 제안한다.

봉오동ㆍ청산리대첩을 기리는 '승전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할 것을 제안한다.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대통령령)에 따르면 국가기념일은 역사적인 평가와 정부의 의지가 있으면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이 선언하면 된다.

국가기념일은 지난 2019년 9월에 지정된 부마민주항쟁기념일을 포함하여 총 51개의 기념일이 지정되어 있다. 의병의 날, 현충일, 서해수호의 날, 예비군의 날,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기념일,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6ㆍ25전쟁일, 국군의 날, 재향군인의 날, 경찰의 날, 학생독립운동기념 일, 순국선열의 날 등 역사관련 기념일이 적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해외에서 왜군과 싸워 크게 이긴, 그리하여 독립운동사는 물론 민족사에 상무정신과 독립정신을 고취한 승전기념일을 제정하여 국민과 후손들에게 길이 전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두 대첩의 상징적인 어느 날을 '승전기념일'로 지정하여 두고두고 기리면 하늘 나라에 계신 100년 전 선열들도 기뻐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운산 #최운산장군평전 #무장독립투사_최운산장군 #봉오동전투 #청산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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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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