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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분도 피해자야" 나를 울렸던 당신을 추모하며

빈안학살 피해자 고 응우옌떤런씨와 함께한 기억들... 3월 5일 온라인 '1004 기억콘서트'

등록 2021.02.24 21:36수정 2021.02.24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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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 형은, (베트남전 때 식구가) 몇 명이나 죽었어요?"
"나는 두 명. 어머니, 여동생"
 

그날 나는 처음으로 베트남전쟁 당시 서로 다른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이 만나는 것을 봤다. 2015년 4월 베트남 호치민시(Ho Chi Minh City). 빈안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과 퐁니·퐁녓학살 피해자 응우옌득상 그리고 그의 여동생이자 같은 사건의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이 만난 날이었다.

런 아저씨는 난생처음 한국을 방문하기 위해 고향인 빈딘성을 떠나 국제선 공항이 있는 호치민시에 온 터였다. 이 역사적 발걸음에는 탄 아주머니도 동행했고 두 사람은 일주일간 서울·대구·부산을 다니며 한국 사회에 그날의 '불편한 진실'을 전할 가슴 떨리는 일정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나는 두 사람의 비자 발급과 출국 준비를 도왔다.

사상 최초로 베트남 피해 당사자들이 한국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나 역시 긴장 속에 그날 하루를 두 사람과 보냈다. 

   

2015년 4월 6일, 국회 정론관에서 열린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학살 피해자의 기자회견. 왼쪽부터 퐁니·퐁녓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 빈안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 호치민시 전쟁증적박물관장 후인응옥번. ⓒ 한베평화재단

 
항상 피해 지역에서 자신의 집이나 위령비 앞에서 마주했던 피해자를 대도시인 호치민시에서 만나니 느낌이 생경했다.

그랬다. 두 사람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응우옌떤런이고 응우옌티탄이었다. 공항에서 두 사람을 만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전쟁'과 '학살'이라는 말이 아닌 다른 일상의 언어들로 나는 두 사람을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런 아저씨는 말수가 적은 점잖고 상냥한 시골 아저씨로, 탄 아주머니는 하고 싶은 말은 꼭 하고 힘이 넘치며 어리광도 있는 농촌 아주머니로. 활동가인 나로서는 묘하게 즐겁고 흐뭇한 시간이었다.

피해자와 피해자의 만남, 연대와 변화의 시작이 되다

두 사람의 첫 대면은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만나자마자 서로를 바라보는 신뢰의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상처는 서로 닮아 있었다.

한국군 학살 피해로 인해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자매를 잃었고 본인도 몸에 치명상을 입고 살아남은 피해자라는 그늘 속에 두 사람은 50년이란 세월을 살았다. 런 아저씨는 탄 아주머니와 마주하며 학살 피해로 희생된 하나뿐인 여동생 응우옌티풍을 떠올렸고, 탄 아주머니는 런 아저씨를 보며 학살 피해로 중상을 입고 살아난 오빠 응우옌득상을 봤다. 탄 아주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사람은 친 오누이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평생 잊지 못할 한국에서의 일주일을 함께했다.


둘 사이의 편안했던 공기는 호치민시 공항 근처의 상 아저씨 집에 도착하자 급변했다. 학살 피해 당시 복부와 엉덩이에 큰 부상을 입었던 상 아저씨는 후유증이 심했다. 조금만 무리를 하면 졸도(기절)를 했고, 방금 전 있었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였지만 정신적 후유증 때문에 홀로 집 밖을 나서지도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집에서의 일상은 큰 문제가 없었다.

 

퐁니·퐁녓학살 피해자 응우옌득상과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 호찌민시에 거주하고 있는 그가 마침 고향 퐁니·퐁녓을 방문했을 때 평화기행단을 만나 당시 사건을 증언했다. 피해 당시 14세였던 그는 ‘1968년 2월 12일’에 겪은 일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 한베평화재단

 
두 사람이 처음 만나던 그날도, 상 아저씨가 자신의 집에서 런 아저씨를 만날 것이기에 아마도 별일이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손님이 집을 방문하면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물으며 그를 편안한 곳으로 안내하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상 아저씨는 아니었다.

그는 런 아저씨와 짧게 인사를 나누고선 불쑥 퐁니·퐁녓학살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군의 위협에 방공호에서 나갔다가 총을 맞고 쓰러졌던 14살의 그 날, 헬기로 후송되어 살아났지만 7년간 병원을 전전했던 이야기 등을 상 아저씨는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당신이 내 아픔을 이해하겠냐는 듯, 마치 한국군에게 쌓아뒀던 억울함을 퍼붓는 것처럼, 말투는 거세져만 갔다.

상 아저씨는, 자신도 모르게 흥분하며 50여 년 전 그날의 상처에 휘둘리고 있었다.

오빠가 귀한 손님을 거실에 세워두고 거친 말과 감정을 쏟아내자, 탄 아주머니가 몇 번이고 상 아저씨를 말렸다. 하지만 끝내 상 아저씨는 상의를 걷어 올려 자신의 복부에 난 끔찍한 상처를 런 아저씨에게 보여줬다. 순간 거실에는 침묵이 흘렀고 옆에 있던 나도 정신이 멍해졌다.

피해자, 치유 불가의 상처를 품고 사는 이들

어색함을 깨기 위한 반사적인 질문이었을까. 상 아저씨는 런 아저씨에게 당신의 가족은 몇 명이 죽었냐고 불쑥 물었다. 런 아저씨는 담담히 대답했다. 두 명, 어머니와 여동생. 그러자 상 아저씨의 눈빛이 점차 평안해졌다.

가족들은 상 아저씨를 건넛방으로 황급히 데려갔고, 그렇게 사태는 마무리됐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일까. 나는 '평화기행'이나 '피해자 인터뷰' 같은 준비된 자리가 아닌, 피해자 가슴 속에 그간 잠들어 있던 울분과 원망이 예기치 않게 적나라하게 표출된 순간을 본 것이라고, 당시 상황을 속으로 그렇게 받아들였다.

   

“방금 제가 여러분에게 한 이야기는 모두 제가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진실입니다.” 빈안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이 피해 사실을 증언한 후 자주 했던 말이다. 2016년 2월 25일, 한베평화재단 참배단이 빈안학살 50주기 위령제 참석을 하루 앞두고 응우옌떤런의 자택을 방문했을 당시의 모습. ⓒ 한베평화재단, 조우혜

 
그 후 30분 정도였다. 나는 런 아저씨와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남자들끼리, 짧은 이야기와 침묵을 어색하게 주고받는 그런 대화였다. 한국행을 앞두고 런 아저씨는 떨린다고 했다. 그러나 무섭지는 않다고 했다. 

아마도 그게 내 마지막 질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런 아저씨에게 조금 전 상 아저씨 때문에 불쾌하지는 않으셨었느냐며, 상 아저씨의 그런 모습을 나도 처음 봐 무척 당황스러웠다며 런 아저씨는 괜찮았는지, 심정은 어떠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런 아저씨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짧은 답변을 들려줬다.


"(그 분도) 피해자잖니..."

순간 아저씨의 얼굴에는 슬픔과 공감이 교차한 묘한 표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너는 잘 모르겠지'라는 듯한 표정도 묻어 있는 듯했다. '피해자잖니'라는 말의 깊고 아련한 울림에, 나는 더 이상 런 아저씨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날의 기억을 살고 있는 상 아저씨를 보며 런 아저씨는 자신을 봤을 것이고, 빈안 마을에 살고 있는 수많은 피해자와 유가족을 떠올렸을 것이다. 

흥분한 상 아저씨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고 있던 런 아저씨의 까만 두 눈동자. 나는 그 눈빛이 너무도 서럽게 느껴졌다. 분명 런 아저씨의 영혼 어딘가에 상 아저씨와 같은 분노와 원망의 소용돌이가 있으리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한편 그때 아저씨의 점퍼 주머니에는 며칠 뒤 국회에서 있을 기자회견에서 낭독할 성명서가 있었다. 런 아저씨는 꼬깃꼬깃 접어온 성명서를 접었다 펴다를 반복하며 조용히 낭독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그저 기자회견 준비를 하는 것이라 가볍게 여겼다. 그런데 런 아저씨가 성명서를 거의 외워서 국회에 갔다는 사실을 며칠 뒤에야 알게 됐다.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제안했고 성명서 작성에도 도움을 드렸지만, 원고를 외운 것은 환갑을 훌쩍 넘은 런 아저씨의 자발적인 의지였다. 자신이 겪은 이 일이 정말 진실이고, 이것이 나의 진심이라고, 아저씨는 어떻게든 한국 사람들에게 간절히 호소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응우옌떤런과의 20년, 한국 사회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한국 방문 후 5년 뒤, 2020년 11월에 런 아저씨는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임종 사흘을 앞두고 호치민시의 병원에서 런 아저씨를 만났다(관련 기사:
"살아남은 내가 진실 말해야"... 그분이 돌아가셨다 http://omn.kr/1rssc ).

누군가 떠났을 때, 그 존재의 빈자리와 직면하고서야 남은 사람들은 그의 실존을 더 명징하게 이해한다. 런 아저씨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그랬다. 


'응우옌떤런은 나에게 무엇인가. 그는 한국 사회에 어떠한 존재였나.' 

한 달 넘게 내 머릿속에는 그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한국군 최대 민간인 학살 피해로 손꼽히는 빈안학살의 대표적인 피해자, 20년 동안 한국 정부에 사과 요구를 한 생존자, 한국을 방문해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한 최초의 베트남전 한국군 피해자, 자신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현수막을 들고 나타났던 한국 참전군인에게 진심을 담아 편지를 보냈던 피해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문자답 속에서 나는 마지막 질문을 떠올렸다. 런 아저씨는 나에게 무엇을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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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4월, 퐁니·퐁녓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연두색 옷)과 동명의 하미학살 피해자 응우옌티탄(하늘색 옷)이 한국을 방문하여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피해자·유가족 103인의 청원서를 청와대에 제출하기에 앞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언젠가부터 응우옌티탄도 학살 피해 증언을 마친 후 응우옌떤런과 비슷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가 진실인 것을 여러분은 믿을 수 있겠습니까.” ⓒ 한베평화재단

 
런 아저씨의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 나는 퐁니·퐁녓 마을의 탄 아주머니를 찾았다. 우리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를 끌어안았다. 아주머니의 품에 안긴 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런 아저씨가 돌아가셔서 너무 슬퍼요."

불쌍한 것, 불쌍한 것…. 탄 아주머니는 오히려 등을 쓰다듬으며 나를 위로했다.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탄 아주머니는 런 아저씨와 한국에 갔던 일주일을 떠올렸다. 당시 런 아저씨가 자신을 친여동생처럼 보살펴줬던 일들을 탄 아주머니는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2015년 응우옌티탄의 한국 방문은 물론 지금처럼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하는 자신도 없었을 거란 이야기.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도 자신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지만 런 아저씨가 용감히 피해자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울컥했다는 이야기...

 
"현우씨. 국회 기자회견은 잘 끝났어. 개인적으로 나는 정말 감동이었어.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를 거야. 베트남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 사는 시골 마을의 농부, 그것도 한국군 피해자가 한국의 국회까지 찾아와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게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말이야.

런 아저씨는 너무 당당했고 잘하셨어. 놀랍더라. 빈딘성에서 보던 런 아저씨와는 달랐어. 피해자가 스스로 역사의 무대에 올라서니 그 사람이 변했다고나 할까."

 
당시 기자회견 통역을 했던 구수정 선생님(한베평화재단 상임이사)이 훗날 내게 들려준 이야기다. 그 후 3년 뒤인 2018년, 시민평화법정 참석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탄 아주머니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울먹였지만 당당히 한국 정부와 시민들을 향한 성명을 발표했다. 3년 전 런 아저씨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빈딘성 박물관에 소장된 빈안학살 아카이브 자료집에 수록된 응우옌떤런의 사진. 자료집에는 그의 진술서도 첨부되어 있다. ⓒ 한베평화재단

 
빈안학살 희생자 1004명, 55주기 맞아 한국서 열리는 '1004 기억콘서트'

응우옌떤런이 세상을 떠났다. 2019년, 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피해자·유가족 103인의 청원 요구를 한국의 국방부는 거절했다. 2020년, 응우옌티탄은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시작했고 '피고 대한민국'은 다양한 변론을 펼치며 완강히 맞서고 있다. 

2021년, 여전히 국정원은 세 차례에 걸친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한국군의 퐁니·퐁녓학살 관련 자료의 목록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이 거대한 국가범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기억의 시효는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무심히 흘러만 가는 세월 속에서 매년 한베평화재단은 베트남의 피해자와 유가족의 부고를 접하고 있다.

다가오는 2월 26일에는 런 아저씨가 없는 빈안학살 55주기 위령제가 베트남의 빈딘성에서 열린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런 아저씨와 빈안 55주기를 추모하는 '1004 기억콘서트'가 3월 5일 저녁 7시에 열린다(
행사 참여 링크 바로 가기, 문의 한베평화재단). 

런 아저씨의 묘에는 "가족과 한국의 친구들이 함께 묘를 세우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한국 사회는 자신의 역사 속에 베트남 피해자 응우옌떤런에 대해 어떠한 문구를 새길 것인가. 아직 우리에게는 베트남전쟁에 관하여 묻고, 기억하고, 기록하고, 이야기할 것들이 너무도 많이 남아 있다. 
덧붙이는 글 필자는 한베평화재단 아카이브팀장으로 근무 중입니다. 2010년부터 베트남 현지에 거주하며, 평화활동가로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와 관련된 일을 해왔습니다.
#응우옌떤런 #빈안학살 #1004 기억콘서트 #한베평화재단 #응우옌티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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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베평화재단 활동가. 평화란 고통을 이해하려는 마음에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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