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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어두운 그림자... 균열을 내야 했다

[내가 쓴 '내 인생의 책'] '준비론' 극복하고 '투쟁론'을 정립한 '학생운동의 전망'

등록 2021.02.22 10:53수정 2021.02.22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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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군사독재의 압제와 '준비론'의 확산

1982년 초, 아직 광주학살의 어두운 그림자가 자욱했다. 전두환 군사독재의 철권 정치가 모든 사람의 가슴을 짓누르는 가운데 사회 전체에 공포와 패배주의는 가시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투쟁을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현실을 감안한다고 해도 선봉대격인 학생운동조차 예상 외로 잠잠하기만 했다. 

마침내 그 이유를 알게 됐다. 당시 '야학비판'이라는 팸플릿이 학생운동권에서 읽히고 있었다. 그 주요 논리를 쉽게 얘기하자면, 지금 군사독재에 맞서서 투쟁을 해봤자 희생만 늘어날 뿐이며 학생운동의 지도부가 사회운동, 특히 노동운동 지도부로 그대로 이전하는 장기전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현장준비론'이었다. '노동대중 조직'이란 명분으로 당면 투쟁과 희생의 임무를 회피하기 용이한 논리였다. 이러한 '야학비판' 팸플릿의 논리는 의외로 심대해 전두환 군사독재의 극악한 압제와 함께 운동이 자칫 장기적 침체기에 놓일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준비론'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논리를 정리해 알리는 팸플릿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무렵 난 수배 상태였고, 고 이범영을 비롯해 문국주, 박우섭, 박승옥, 민종덕 등 선배들과 인천 구월동에 함께 살고 있었다. 고 김근태 선배도 바로 그 옆에 살고 계셨다. 그래서 매일 같이 함께 민주화운동의 진로에 대해 토론하고 농구도 하면서 서로 격려하며 살고 있었다. 선배들에게 내 생각을 얘기하고 바로 일을 추진했다.

학생운동의 역사 전통으로부터 '투쟁론'을 정립하다 
 

'학생운동의 전망'과 '야학비판' '학생운동의 전망'과 '야학비판' 팸플릿의 첫 페이지 ⓒ 민청련동지회

 
먼저 절친이었던 오세중(현재 변리사)을 만나 몇 마디 나누자 오세중은 자신도 이미 그런 생각이었다며 곧바로 의기투합했다. 1970년대 학생운동사와 객관적 정세 분석, 결론으로 한국 학생운동의 임무와 방향이라는 내용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학생운동의 역사적 전통을 분석하고 이로부터 한국 학생운동의 위상을 구명함으로써 현재의 임무를 도출하고자 했다. 1970년대 학생운동사는 이미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학생운동사를 집필한 바 있던 오세중이 맡고, 내가 '서울의 봄 회군'과 '야학비판'의 논리에 대한 평가를 비롯한 최근 학생운동의 동향 및 향후 방향을 쓰기로 했다.

객관 정세를 쓸 한 명이 더 필요했다.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의 주류이자 '준비론'의 본영이었던 '무림' 진영 쪽 사람이면 가장 적격이었다. 그래서 유기홍을 생각해냈다. 유기홍(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1980년 서울대 학보에 3.1운동 관련 기고문을 발표한 바 있었는데, 글이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그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유기홍의 학회 선배인 반병률 선배에게 학내 데모로 투옥됐다가 막 출소한 유기홍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해 선배의 상도동 집에서 만났다. 물론 제안을 하자마자 금방 같이 힘을 모으기로 했다.

1982년 3월 대방동 카페에서 3명이 함께 만났고, 작업이 시작됐다. 목차를 잡고 자료들을 수집해 토론을 하면서 방향을 잡아갔고, 두 달이 채 못 돼 각자가 맡은 내용을 거의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매일 같이 김근태, 신동수 그리고 이범영 등 구월동 선배들에게 전체 상황을 상의했고 논리도 계속 보강했다. 오세중도 따로 서울대 농법회의 선배였던 이범영을 만나 상의하면서 의견을 구했다.

최종 마무리작업은 함께 합숙하면서 진행하기로 하고, 광명 철산리 백경진, 권민성 선배에게 부탁하여 선배 아파트에서 3일 동안 토론과 집필 작업을 하면서 향후 학생운동의 방향에 대한 마지막 문안을 총정리했다.

유기홍이 서문과 발문을 감동적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내가 서울 인쇄 골목에서 종이를 구입하고 민종덕 형의 타자 작업과 박우섭 형의 인쇄를 거쳐 '학생운동의 전망'이라는 팸플릿이 최종 완성됐다. 배포 작업도 내가 책임을 맡아 서울대 인문대 서클룸, 연대와 고대 그리고 성대 서클룸, 기독교회관 등지에 배포했다. 배포 작업에는 인천 최인숙씨가 항상 나서줬다.

'선도적 정치투쟁체'로서의 한국 학생운동 위상 정립

'학생운동의 전망'은 '전망'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전망'의 요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선도적 투쟁체로서 당면하는 정치투쟁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림'과 '야학비판'의 준비론에 대해서 '전망'은 "학생운동 지도부가 그대로 사회운동으로 이전하여 사회운동 지도부를 형성한다는 논리는 전체 운동의 지도적 현실과 학생운동의 당면 현실을 혼동하는 것으로서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비판했다.

당면의 현실 문제는 본질 문제의 한 표현으로서 예를 들어, 이는 고교 3년생이 대학입시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고시 공부를 한다고 고시 책을 사는 것과 동일하다는 논리였다. 또 그간 학생운동이 정치투쟁 일변도로 학생 대중과 유리됐다는 '야학비판'의 주장은 학생운동 현실에 대한 몰이해이며, 학생운동 투쟁의 역사 경험과 학생 대중의 정치의식에 대한 과소평가라고 단언했다.

'전망'은 이로부터 "현 단계에서 학생운동은 민중운동의 선도체로서의 정치투쟁을 요구받고 있으며, 시위는 학생운동의 최고 형태로서 학생 대중의 열기를 수용해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특히 '전망'은 가두(街頭)시위를 강조하면서 "정치투쟁의 궁극적인 장소는 가두로서 학생운동은 민중에의 직접 선전을 통해 전민중적 항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고 기술했다.

민주화운동 투쟁의 불꽃을 다시 살려내다

'전망'은 학생운동만이 아니라 운동권 전체로 순식간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반향은 대단히 신속하고도 컸다. '전망'은 여름방학 기간에 배포됐는데, 2학기가 되자마자 각 대학에서 투쟁의 열기가 이어졌다.

물론 우리 3인도 직접 각 대학 학생운동의 투쟁에 '접촉'했다. 그리고 만여 명의 학생이 모이는 연고전, 고연전을 기회로 삼아 마침 당시 사회적 분노를 일으키고 있던 일본 교과서 왜곡 문제를 내세워 가두시위를 '계획'했다. 이 계획은 극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실로 몇 년 만에 다시 전개됐던 가두시위였다.

또 김근태 선배의 조언으로 영등포산업선교회에 집결해 원풍모방 노조에 대한 탄압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자는 유인물을 서울대에 배포했고, 집회는 성공적으로 실행됐다. 그리고 11월 3일 학생의 날을 기념해 각 대학이 연대하는 큰 규모의 가두시위도 전개됐다.

'학생운동의 전망',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이정표

결국 '학생운동의 전망'의 주장과 논리는 1980년대 초반 전두환 군사독재의 극악한 탄압과 함께 그에 수세적으로 반응해 '준비론'을 명분으로 내세워 투쟁과 희생을 포기하고 방기하는 패배주의를 극복해냈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을 비롯하여 민청련 등 청년운동도 신속하게 활성화됐으며, 전체 민주화 진영이 전열을 정비하게 됐다. 실로 우리 운동사에서 전환점을 알리는 중요한 이정표라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된 역량에 의해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도 성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학생운동의 전망 #소준섭 #학생운동 #오세중 #유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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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학 박사, 국회도서관 조사관으로 근무하였고, 그간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 등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해왔다. <이상한 영어 사전>, <변이 국회의원의 탄생>, <논어>, <도덕경>, <광주백서>, <사마천 사기 56>등 여러 권의 책을 펴냈다. 시민이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의 심각한 기후위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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