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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스라소니'를 찾아서, 동네 뒷산을 올랐습니다

눈 덮인 땅 위에 찍힌 낯선 발자국... 그 '스라소니'인 걸까요

등록 2021.02.22 09:21수정 2021.02.2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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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시골에 잠깐 살았었다. 집 앞산에서 기괴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가끔씩 들려왔다. 어린 마음에 그 소리가 들리는 저녁이면 공포에 떨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는 잠이 들곤 했었다.


부모님은 우리가 그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하면 앞산에 호랑이가 산다고 더 겁을 주었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어젯밤 앞산에서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친구들에게 말을 했다. 친구들은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그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개호지'라고 했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개호지라는 동물에 대해 친구들도 잘 설명해주지 못했다. 어른들이 개호지라고 하는 소리를 그대로 학습해 전달했던 것뿐이었다. 이솝우화나 동물도감 속에서도 나오지 않던 그 '개호지'라는 동물에 대해 궁금했던 것은 어린 시절 시골에 잠시 살았던 그 기간뿐이었다.

그 후로 쭉 나는 도시에서 자랐고 개호지라는 동물에 대한 정보를 접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개호지라는 동물은 내 기억 속에서 사장되었다.

그 개호지가 이 놈이었다니 

"하룻밤 새에 우리 닭들을 다 잡아가 버렸어. 한두 마리도 아니고 예닐곱 마리나 물어갔다니까. 이제 두 마리밖에 안 남았어."


도시 생활을 접고 전원 속의 삶을 시작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전원주택을 짓고 닭장까지 지어서 손수 알을 꺼내고 병아리까지 까는 모습을 꿈꾼다. 그런 그림 같은 생활은 어느 날부터 닭들이 한 마리씩 없어지다가 어떤 짐승에게 무참하게 뜯어 먹힌 닭의 사체를 보게 되면, 닭장을 정리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닭장을 보수하는 것으로 닭을 사수하려 해보지만 그 잔인한 짐승은 인간보다 더 약아서 기어이 닭장에 침투해 닭들을 전멸시키고 만다. 이런 이웃들을 나는 봐 왔다.

적극적인 사람은 감시 카메라를 동원해서 그 잔인한 짐승의 존재를 알아내려 한다. 그런 사람은 TV 동물농장에서나 볼 수 있고 대부분은 그냥 유정란은 마트에서 사 먹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만다. 원주민들에게 너구리나 살쾡이가 닭들의 포식자라는 정보를 알아내기는 했어도 그 야생의 것들을 적극적으로 막을 방법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닭장 위쪽으로 낯선 발자국들이 나 있어서 산속으로 무작정 따라가다가 전에 못 보던 큰 발자국들을 봤어."

닭장에서 키우던 닭들을 야생 동물에게 빼앗겼던 이웃은 요 며칠 눈 내린 산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녔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시골에 살면서 야생의 생태계에 익숙한 그였다.

"눈 위에 고양잇과 동물이긴 한데 삵도 아니고 엄청 큰 발자국이 많아졌어."
"그럼 호랑이라도 되나.... 호호"


순전히 그냥 웃자고 한 소리였다. 강원도 깊은 산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호랑이가 우리 동네처럼 낮은 산지로 둘러싸인 곳에서 살 리가 만무했다. TV에서 백두산 호랑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직후라서 그런 말이 나왔을 뿐이었다.

"혹시 개호지라고 아나?"

아스라이 먼 기억 속에서 한 단어가 끌어올려 졌다. 어린 시절 이후 관심 밖으로 멀어졌던 '개호지'가 시골 살이 20여 년 만에 소환되었다. 그동안 너무 깊이 잊어서 검색 창에서 찾아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단어였다. 즉시 개호지의 신상을 탈탈 털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개호지'는 '스라소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개호지가 스라소니란 말여? 난 건달 이름인 줄 알았네."

스라소니는 동물의 이름보다 오래전에 방영된 드라마 속 인물로 더 많이 검색되었다. 호랑이보다는 작고 삵보다는 큰, 못생긴 호랑이 새끼 같은 동물인 스라소니는 평안도 사투리였다. 호랑이에는 생김새로 치이고 인간의 영역을 침입해 만행을 저지르는 삵과는 달리 깊은 산 속의 은둔자처럼 살아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존재였다.

스라소니는 우리나라에서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이며 국가적으로는 멸종된 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삵보다는 크고 호랑이와 표범보다는 작은 고양잇과 동물이다. 호랑이나 표범은 잘생기고 가죽의 무늬가 아름다워서 인간 욕망의 대상으로 남획되어 멸종되었다.

스라소니는 범도 아니고 고양이도 아닌 어중간한 생김새 때문에 인간의 관심 밖으로 사라져 버린 야생 동물이었다. 산의 나무들이 땔감으로 사라져가면서 스라소니들은 점점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목격담들은 많지만 사진이나 동영상 등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없었다. 우리 이웃도 발자국을 봤을 뿐이지 실체를 본 것은 아니었다.

"걔네들이 영역 표시를 하면서 흙을 뿌리거든. 고양이과 동물들은 뒷발로 흙을 뿌리면서 다니는데 그런 장소를 여러 군데서 봤어."

총총총... 희미한 형체로 남은 발자국 

어디에서 들은 것만 많은 어설픈 지적 호기심의 영역에 범 한 마리가 내려오고 있었다. '잔디 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요즘 중독되어 있는 <범 내려온다> 의 가사 그대로였다. 옛말 그대로의 가사를 따른 노래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했다. 범의 생김새를 묘사하다가 왕모래를 흩뿌리는 이 대목이 곡으로는 하이라이트였지만 가사로는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이었다. 범의 생태를 몰랐으니까.

노래 가사 한 줄에 대단한 학문적 근거라도 찾은 것처럼 설레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충족하지 못했던 개호지에 대한 호기심의 근원이 해소될 시기가 온 것 같았다.
눈이 녹기 전에 이웃 사람과 함께 개호지 또는 스라소니로 추정되는 발자국을 사진으로 찍어놓기 위해 산에 올랐다.

며칠 전 이웃 집 근처에서 선명하게 찍혀 있던 발자국은 희미한 형체만 남아있어서 흔적으로서의 의미를 잃었다. 눈 위에서 다양한 종의 야생동물을 만났지만 우리가 찾는 개호지의 것은 아니었다. 더 선명한 발자국들의 찾아서 산 정상으로 오르던 우리는 드디어 호랑이 발자국과 비슷한 발자국을 만났다.
 

눈 오는 날 산에서 발견한 동물의 발자국. 개호지(스라소니)로 추정되는 동물의 특징인 일렬로 난 발자국 ⓒ 오창경

커피 빨대와 발자국 대략 25센티미터 정도 되는 빨대의 길이와 비슷한 동물의 발자국 ⓒ 오창경

 
하얀 눈 위에 네 발이지만 뒷발로 앞발자국을 디뎌서 한 줄로 길게 다니는 습성을 지닌 고양잇과 짐승의 발자국이 길게 뻗어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보았던 멋진 범의 자태가 그 발자국 위로 겹쳐 보였다. 25센티미터의 커피용 빨대를 발자국 옆에 놓았더니 길이가 비슷한 크기였다.

"요즘 산에서 뭔가에 뜯어 먹힌 고라니의 사체가 자주 발견된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아마도 얘네(개호지 또는 스라소니)들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생태계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시골 마을이 고라니의 천국이 되어간다고 걱정하던 때가 있었다. 최근 도로와 농로를 가리지 않고 수시로 출몰하던 고라니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는 했다. 장림 깊은 골에 살던 스라소니들이 숲이 울창해지고 고라니 같은 먹잇감이 풍부해지자 낮은 산골로 영역을 넓히고 개체 수도 늘려가는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아프리카의 광활한 사바나에 열광하는 것은 다양한 동물 군상들 때문일 것이다. 포유류에서 파충류, 조류 등 우리 근처에서는 볼 수 없는 신기하고 신비한 동물들과의 만남 때문일 것이다. 이런 동물들이 근처에 있고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다.

충청도 말로 개호지, 또는 작은 범이라고 불리는 스라소니가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라고 부르는 노랫말처럼 우리 산골 마을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호랑이가 없는 산에서 주인 노릇을 하며 살아도 우리는 해치지 않고 반겨줄 것이다. 그리하여 스라소니가 토종 애니메이션에 등장할 날도 기다려 본다.
#개호지 #스라소니 #범 내려온다 #고라니 #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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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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