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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돌대가리'로 불린 교장이 학교에서 벌인 일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건립한 길영희 선생 ①

등록 2021.03.05 12:57수정 2021.03.0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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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도서관은 이제 시민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일상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역사와 도서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잊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서관 선구자임에도 잊힌 사람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잊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기자말]
제물포고등학교가 자리 잡은 웃터골은 응봉산에 있는 분지다. 일제강점기 웃터골에는 인천 공설운동장이 있었다. 이 때문에 웃터골은 제물포 청년운동의 발원지로 꼽힌다. 해방 후 웃터골에 자리 잡은 제물포고등학교는 '웃터골 학교'라 불렸다. 

3층으로 지은 제물포고 도서관은 밤늦도록 불빛을 밝혔다. 인천 사람들은 그런 제고 도서관을 '인천의 등대'라고 불렀다. 한때 "제고 도서관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제물포고는 일찍부터 공부하려는 학생을 위해 새벽 4시에 도서관을 열었다. 인천의 새벽과 밤을 밝힌 '제고 도서관' 이야기는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인천의 어둠을 밝힌 도서관
 

1959년 완공 당시 제물포고 도서관 모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으로 문을 연 학교도서관은 진주여고 도서관이다. 진주여고는 1952년 3월 도서관을 개관했으나 독립 건물로 도서관을 마련하진 않았다. 제물포고 도서관은 해방 이후 ‘독립 건물’로 새로 지은 최초의 학교도서관으로 알려져 있다. 개관 당시 1층이었던 좌측 건물동은 1969년 증축해서 2층이 되었다. ⓒ 인중제고총동창회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역사는 1957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물포고에는 관사로 쓰던 일본식 목조 건물이 있었다. 제물포고는 이 단층 관사를 개조해서 68석의 열람석을 갖춘 도서관을 개관했다. 도서관을 마련했지만 길영희(吉瑛羲) 교장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도서관의 중요성을 간파한 길영희 교장은 기성회비와 미국군사원조처(AFAK)의 자금을 합쳐 건립 비용을 마련했다. 1959년 5월 19일 착공한 도서관은 11월 27일 3층 건물로 완성되었다. 건물 설계는 경기도 교육당국이 맡았고,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지었다. 도서관 건립에 350만 원이 들었다. 

도서관 건립 과정에서 길영희 교장과 교사, 학생들은 건물 자재를 등짐으로 직접 날랐다. 학교 구성원이 '땀 흘리며' 직접 지은 도서관이다. 길영희 교장은 공사 현장에서 실족해서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7개월 만에 완공된 제고 도서관은 1,081권의 장서로 출발했다. 최신식 건물에, 책과 사서교사, 도서관에 관심 많은 교장과 학생까지… 모든 걸 갖춘 도서관이었다.

의사를 꿈꾼 그는 왜 퇴학 당했을까?
 

벽돌을 나르는 제물포고 학생들 제물포고 초대 교장 길영희는 흐르는 땀만이 나라를 번영케 한다는 ‘유한흥국’(流汗興國)을 강조했다. 학교 건물을 지을 때도 길 교장은 솔선수범했다. 교장 뿐 아니라 교사, 학생들까지 모두 학교를 세우는 데 함께 했다.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도 그렇게 완공되었다. 교장부터 학생까지 피땀으로 지은 도서관이다. ⓒ 인중제고총동창회

 
제물포고등학교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길영희는 교장 재직 시절부터 유명했다. 1950년대 교육계는 금권과 부정이 판을 쳤다. 길영희는 오직 성적만으로 학생을 뽑았다. 비리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길을 걸었다.

인천 시민과 학생은 그런 길 교장을 '돌대가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돌대가리'라고 불리자 길 교장은 자신을 '석두(石頭)' 선생이라 칭하며 웃어넘겼다. 교내에서 모르는 학생을 만나면 이름을 물어 외웠다. 길 교장이 학생 사진과 이름이 적힌 종이를 책상에 두고 학생 이름을 외워 불렀다는 일화도 전한다.


길영희는 1900년 11월 30일 평안북도 희천군 희천면 읍상동 92번지에서 태어났다. 1914년 희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8년 평양고등보통학교(평고)를 졸업했다. 1918년 4월 길영희는 의사가 되기 위해 경성의학전문학교(경의전)에 입학했다. 경의전 시절 학생대표로 3·1 운동에 참여한 길영희는 퇴학을 당했다. 의사의 길이 막힌 길영희는 이후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경의전 출신으로 3·1 운동에 참여한 인물 중에 한위건(韓偉健)과 백인제(白麟濟)가 있다. 한위건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한위건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악연'으로 얽힌 인물이다. 백인제는 의사의 길을 계속 걸어 최고의 외과 의사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경찰에 체포된 길영희는 1920년 2월 만기 출소했다. 감옥에서 나온 길영희는 1923년 8월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히로시마고등사범은 도쿄고등사범학교와 함께 일본에서도 입학하기 어려운 학교로 꼽혔다. 히로시마고등사범 학생 정원은 700명밖에 되지 않았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이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35명에 불과했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시절 길영희는 수업 시간 외에는 도서관에서 공부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도서관'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았나 싶다. 길영희가 졸업한 평양고등보통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일제강점기 건물 설계도가 남아 있다. 히로시마고등사범을 포함해 그가 거친 학교에는 모두 '도서실'(圖書室)이 있었다. 

조선교육회 장학생이었던 길영희는 장학금을 모아두었다가, 조선인 노동자에게 나눠줬다. 유학 중에 함께 공부하던 조선인 동기가 갑자기 숨지는 일이 생겼다. 길영희는 이역 땅에서 숨진 조선인 학생의 장례를 앞장서서 치렀다. 대한민국 1호 사서이자 히로시마고등사범 후배 이규동의 회고다. 

일제강점기 그가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친 이유
 

후생농장 시절 길영희와 동지들 길영희와 함께 이상촌 건설에 뛰어든 여러 동지의 사진. 왼쪽부터 장기려, 김문찬, 길영희, 박원선, 이호철이다. 경성제대 법과를 졸업한 박원선은 훗날 연세대 교수로 상법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의사로 유명한 장기려 뿐 아니라 전염병 예방 분야 선구자인 전종휘도 후생농장을 함께 운영했다. 농장 이름은 실학 이념인 ‘이용후생’(利用厚生)에서 따왔다. ⓒ 인중제고총동창회

 
1929년 길영희는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스승 니시 신이치로(西晋一郞)의 추천장까지 받았으나 그는 공립학교 교사가 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 교육 당국은 3·1 운동 시위 전력자인 길영희를 공립학교 교사로 채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후 10년 동안 길영희는 모교인 배재고보와 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로 일하면서 길영희는 이상촌 건설을 꿈꿨다. 그는 도산 안창호와도 교류했다.

1939년 10월 31일 길영희는 경신학교를 떠났다. 이상촌 건설을 위해 인천 만수동에 마련한 후생농장(厚生農場)에 집중하기 위함이었다. 길영희와 인천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땀 흘려 농사지으며 농촌 계몽 운동을 펼쳤다. 

그 시절 조선인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길영희는 농민과 농촌 계몽 없이는 독립도 어렵다고 생각한 듯하다. 교육자뿐 아니라 사회운동가로서 길영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1945년 해방을 맞자 인천중학교(인중) 재학생과 졸업생이 길영희를 찾아왔다. 농촌 계몽 운동에 매진하던 그를 교장으로 '추대'하기 위함이었다. 인천중학교 구성원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길영희는 교장이 되었다. 

교장이 된 길영희는 강병두, 박충집, 배인철, 선우휘, 조병화, 피천득처럼 출중한 인물을 교사로 초빙했다. 6년제 중학교 과정이 지금처럼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바뀌자 그는 인천중과 제물포고 교장을 겸했다. 인천뿐 아니라 한국 중등교육에 이정표를 세운 '길영희 신화'의 시작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5년 12월, 인천중학교는 신흥동 '인천부립도서관' 건물을 임시 교사로 사용했다. 훗날 한국 학교도서관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중-제고가 한때 도서관을 학교로 삼았다는 점도 이채롭다. 

학교가 믿지 않으면 누가 학생을 믿느냐
 

길영희 교장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 교장이 된 길영희는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좋은 교사를 초빙했다. 이런 일화도 전한다. 한 교사가 술에 취해 길영희 교장 집에 찾아가 주정을 부렸다. 이후 그 교사가 다른 학교로 떠나자 길 교장은 다시 모셔왔다. 행패를 부린 교사를 길 교장은 왜 다시 데려왔을까? 길 교장의 대답이다. “선생이 교장을 위해서 있나. 그 선생은 학생을 잘 가르쳐. 그러면 됐지, 더 이상 무엇을 바래.” ⓒ 인중제고총동창회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인천중학교와 제물포고등학교 교장을 겸직한 그는 한국 중등교육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다. 1956년 길영희 교장은 '무감독 시험'을 도입했다. 학생을 믿고 교사가 시험을 감독하지 않는 제도다. 길 교장이 무감독 시험을 도입한 이유는 학교가 학생을 믿지 않으면 누가 믿겠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감독 시험' 시행 첫해에 평균 60점 이하 낙제생이 53명이나 나왔다. 길영희 교장은 부정행위보다 양심적인 낙제를 택한 학생들을 전교생 앞에 불러 세웠다. 그는 낙제생을 꾸짖는 대신 '제고의 영웅'이라 칭찬하며 1년 동안 학비를 면제해 줬다. '무감독 시험 60년'이라는 제물포고등학교의 빛나는 전통은 이렇게 출발했다.

지금도 제물포고등학교 학생들은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라는 선언을 끝으로 무감독 시험을 마친다. 제물포고등학교는 사립이 아닌 공립학교다. 그런데도 길영희 교장이 시작한 '무감독 시험' 전통은 그 뒤를 이은 교사와 학생에 의해 계속 이어졌다.

1960년 6월부터 도서관을 '완전 개가제'로 운영한 것도 학생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나라 대다수 도서관이 책 분실을 우려해서 '폐가제'로 운영된 시대였다. 제물포고 도서관은 '완전 개가제'로 운영했음에도 책의 분실이 많지 않았다. 책 분실률이 2%를 밑돌았다.

처음부터 책 분실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도서관에서 책이 분실된다는 소식을 듣자 길 교장은 책을 가져간 학생을 적발하는 대신, 학생 한 명 한 명을 만나 간곡히 당부했다고 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만이 자율적인 학교의 근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2편 '고등학교 도서관에 사서교사 4명? 시대를 너무 앞섰다'으로 이어집니다.)
#길영희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중학교 #학교도서관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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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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