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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도서관에 사서교사 4명? 시대를 너무 앞섰다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 인천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건립한 길영희 선생 ②

등록 2021.03.05 12:57수정 2021.03.05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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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근대 도서관 제도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이식된 도서관은 이제 시민이 가장 자주 이용하는 일상 공간이자 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우리 역사와 도서관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잊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서관 선구자임에도 잊힌 사람의 발자취를 찾아 그들을 다시 조명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잊은 사람들을 ‘기억’하기 위해 ‘기록’합니다.[기자말]
(* 1편 '인천의 '돌대가리'로 불린 교장이 학교에서 벌인 일'에서 이어집니다.)

1960년대 제물포고 신입생은 입학할 때 문학 또는 교양도서를 1권씩 도서관에 기증했다. 제고 신입생이 1인 1책 기증 운동을 펼친 이유는 뭘까? 훌륭한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음에 감사를 표하고, 더 훌륭한 도서관을 후배에게 물려주자는 뜻에서 벌인 운동이다. 1969년 제고 도서관은 820여만 원의 비용을 들여 건물을 증축하고 내부를 다시 단장했다. 


도서관 시설도 남달랐다. 열람실 뿐 아니라 음악감상실, 어학 실습실, 시청각 자료실, 참고도서실을 따로 두었다. 3층 자습실은 책상마다 스탠드를 설치하고, 방음과 냉난방 시설까지 갖췄다. 21세기인 지금도 사서교사 한 명 배치되지 않은 학교가 흔하다. 1960년대 제고 도서관에는 도서관학을 전공한 사서교사 4명과 직원 5명이 상근했다. 

도서관을 학습에 활용할 수 있도록 1학년 신입생은 50시간에 달하는 도서관 교육을 정규과목으로 이수했다. 독립 예산으로 도서관을 운영하고, 도서관 발전 3개년 계획을 따로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제고 도서관은 시대를 앞서간 곳이다. 20세기에 존재한 21세기 학교도서관이었다. 

서슬 퍼런 군사 정권 시기에 제물포고 도서관 서가에는 마르크스(Marx) 원전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 정도로 제고 도서관의 장서량은 대단했다. 한때는 인천시립도서관에 필적하는, 인천에서 가장 훌륭한 도서관이었다. 30만 권이 넘는 장서에 534석의 좌석을 갖췄으니, 지금도 웬만한 공공도서관은 제고 도서관의 발치에 미치지 못한다. 

제물포고의 탄생이 '혁명적 개교'였던 이유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길영희 교장은 1950년대 후반 서울에서 명성을 떨친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을 둘러본 후 독립 건물로 도서관을 지었다. 경기고 교장이었던 김원규와 길영희는 평양고등보통학교와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 동문이다. 두 사람 모두 한국 중등교육의 선구자인 동시에 한국 학교도서관 분야 선각자다. ⓒ 백창민

 
무감독 시험, 완전 개가제 도서관뿐 아니라 제물포고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규율부를 두지 않는 무규율부 제도, 학생이 주관하는 전교생 월례 조회, 운동부를 두지 않고 전교생이 체육부원이 되는 학교, 학생 글만 싣는 교지까지⋯. 제고는 달라도 많이 달랐다. 무감독 시험과 함께 무규율부와 무운동부 제도는 제물포고의 '3무'(三無)로 꼽혔다. 제물포고등학교의 개교가 '한 학교의 개교'가 아닌 한국 중등교육이 나아갈 바를 정한 '혁명적 개교'였다는 평가가 여기서 나온다. 

1961년 대학 입시에서 제물포고는 서울대 전체 수석과 여러 단과대 수석을 휩쓸었다. 이 과정을 통해 제물포고등학교는 전국구 명문 '제고'가 되었다. 길영희는 제자들이 단순한 인재가 아닌 혼탁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를 바랐다. 교모 배지를 빛과 소금으로 도안하고, 교훈을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으로 지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가르침 덕분일까? 제고는 교훈에 걸맞은 인재의 요람이 되었다. 


제물포고등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도서관 앞에 있는 강당, '성덕당'(成德堂)이다. 성덕당은 1935년 인천공립중학교 개교와 함께 지은 건물이다. 기둥을 세우지 않고 15m 너비의 공간을 확보한 것이 특징이다. 성덕당은 인중-제고 학생뿐 아니라 인천 지역사회의 대형 집회 공간으로 자주 쓰였다. 길영희 교장이 함석헌, 유진오, 백낙준, 현상윤 같은 당대의 석학을 강사로 초빙해, 학생과 시민에게 청운의 꿈을 길러준 공간이다. 

성덕당 양쪽에는 "유한흥국(流汗興國 흐르는 땀이 나라를 부흥하게 한다)", "위선최락(爲善最樂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즐거움이다)"이라는 사자성어가 내걸려 있었다. 조회 때 인중과 제고 학생은 이 말을 구호처럼 외쳤다. 길영희 교장이 늘 강조한 이 문구는 그의 묘비에도 새겨졌다. 인중과 제고 제자 중에는 성덕당 훈화 과정에서 터진 길 교장의 '사자후'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성덕당은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제물포고등학교가 한국 도서관에 미친 영향
 

1959년 개관 무렵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내부 한국 공공도서관과 대학도서관 상당수는 1987년 민주화 이후 ‘폐가제’에서 ‘개가제’로 바뀌기 시작했다. 1960년부터 개가제로 운영한 제물포고 도서관이 얼마나 선구적으로 완전 개가제를 도입했는지 알 수 있다. 1950-60년대 한국에서 개가제로 운영한 곳은 미국이 직접 운영한 USIS 도서관 뿐이었다. 개관 무렵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내부 풍경을 담은 이 사진은 사서교사였던 최근만 선생이 찍은 사진이다. ⓒ 인중제고총동창회

 
제물포고 도서관은 '성지관'(成志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1998년 9월 1일부터 내건 성지관 현판은 지금도 도서관 건물에 걸려 있다. 도서관이라면 지혜(智慧)를 뜻하는 '성지관(成智館)'이라 이름 지었을 법 한데 '성지관(成志館)'이다. '지(志)'는 선비[士]의 꿋꿋한 마음[心]을 뜻한다. 철학자 안병욱이 '지(志)'에 관해 쓴 글처럼, 뜻을 세우면[立志] 잘 키워[養志] 끝내 이루라는[成志] 의미가 아닐까 싶다. 덕(德)과 함께 지(志)를 강조하는 '성덕당'과 '성지관' 이름에서 제물포고등학교가 지향하는 인재상을 엿볼 수 있다.

인중과 제고 교장을 겸한 길영희는 5·16 쿠데타 이후 정년이 단축되면서 퇴임했다. 퇴임한 그는 충남 덕산에 농장을 마련하고 1968년 가루실농민학원을 열어 농민교육에 힘썼다. 길영희는 금연과 도박 폐지 운동을 위해 마을 주막을 '도서실'로 운영하기도 했다. 정년을 마친 후에도 길영희는 교육운동가로 살았다. 

'제고 도서관'은 길영희 교장이 학교를 떠난 후에도 이 나라 교육 현장과 도서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해숙 선생 이야기가 한 사례다. 정해숙 선생은 1964년 제물포고등학교와 도서관을 견학한 후 크게 감동했다. 1966년 정해숙은 전남여자고등학교 사서교사로 발령받자마자 도서관을 완전 개가식으로 운영했다. 제물포고 도서관이 준 감동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훗날 정해숙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5~6대 위원장으로 활약했다. '수학교사'였던 그녀가 '사서교사'를 거쳐, 참교육 실현을 위한 '투사'로 살아가게 된 계기에는 길영희와 제고 도서관이 큰 영향을 미쳤다. 길영희 교장을 한국 교육사뿐 아니라 한국 도서관사에서 비중 있는 인물로 다뤄야 할 이유다.

대한민국 사서교사 1호 최근만
 

제물포고등학교 사서교사 최근만 1930년 7월 22일 태어난 최근만은 6년제 인천중학교를 6회로 졸업했다. 육군사관학교 도서관과 경기고등학교 도서관을 거쳐 모교인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일했다. 최근만은 한국도서관협회 제4대 사무국장을 지냈다. 현대건영을 창업해서 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 백창민

 
1959년 완공된 제물포고 도서관은 독립 건물로 지은 학교도서관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올해로 건립 62주년을 맞은 제고 도서관은 하루하루가 한국 학교도서관의 살아있는 역사다.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 운영에는 길영희 교장뿐 아니라 사서교사 최근만의 역할이 컸다. 

인천중학교 졸업생인 최근만은 육군사관학교 도서관에서 일하다가 경기고등학교에서 1년 정도 학교도서관을 경험했다. 제물포고 도서관 건립과 함께 최근만은 모교 '사서교사'로 일했다. 학교도서관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절인 만큼 사서교사 역시 흔치 않았다. 

1964년 8월 13일 교육부는 25명에게 '사서교사 자격증'을 발급했다. 대한민국 수립 후 처음으로 발급한 사서교사 자격증이다. 최근만은 사서교사 자격증을 받은 25명 중 가장 빨리 이름을 올렸다. '대한민국 사서교사 1호'를 배출한 곳이 제물포고 도서관이다. 

최근만은 1966년 5월 23일 정부 수립 후 최초로 발급된 정사서 자격증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그는 사서교사 중에 가장 빨리 정사서 자격증을 발급받은 사람이다. 제고 도서관에서 활약한 최근만은 1967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도서관협회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사서교사 출신으로 한국도서관협회 살림을 맡은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한국 학교도서관은 1960년대 중흥을 맞았다. 그 시절 최근만은 학교도서관의 중흥을 이끈 선구자 중 하나였다. 

영원한 스승, 작업복 입은 성자
 

길영희 동상 길영희의 뜻을 잇기 위해 1984년 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1986년 초판이 나온 『길영희 선생 추모문집』은 판을 거듭하며 출간되고 있다. 이 책은 ‘교장학’(校長學)의 전범이자 교육계 필독서로 알려져 있다. 길영희선생 기념사업회는 1993년 7월 31일 제물포고 도서관 2층에 ’길영희 문고’를 설립했다. 인중제고총동창회는 길영희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동상을 제물포고 교정에 세웠다. ⓒ 백창민

 
농민 교육에 힘쓰던 길영희 교장은 1984년 3월 1일 세상을 떠났다. 누구나 삶에 결정적인 날이 하루쯤은 있게 마련이다. 길영희 인생에서 결정적인 하루는 언제일까? 바로 3·1 운동이 벌어진 1919년 3월 1일이다. 삶이 전환점을 맞은 65년 후 그날, 길영희는 세상을 떠났다. '영원한 스승'이었던 그의 관은 자녀들이 아닌 제자들이 운구했다. 말년에 가루실농민학원을 운영한 그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둔리에 묻혔다. 

길영희가 흘린 땀[流汗] 덕분에 제고[興校]와 도서관[興館]은 흥했다. 이곳에서 배운 학생들은 제물포를 넘어 이 나라의 동량이 되었다. 일제가 남긴 주입식 교육이 횡행한 교육계에 길영희는 '자율교육(honor system)'이라는 씨앗을 뿌렸다. 문교부 장관이었던 오천석은 그런 길영희를 이렇게 평했다.

"작업복을 입은 성자"

2000년 11월 25일 제물포고등학교는 학교 발전에 공헌한 길영희 교장의 동상을 교정에 세웠다. 2000년은 그가 태어난 지 100주년이 된 해다. 길영희 교장이 직접 작사한 제물포고등학교 교가는 "여기는 희망의 집 제물포고교"로 시작한다. 길영희 교장이 건립하고 사서교사 최근만이 운영한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은 수도권을 대표하는 '희망의 도서관'이었을 뿐 아니라 전국의 학교가 부러워하는 '꿈의 도서관'이었다.

길영희는 자신을 '도서관인'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17년 동안 제물포고에 머물며 남긴 발자취는 한국 도서관 분야에 뚜렷한 업적으로 남았다. 길영희를 '인천의 도서관인', 나아가 '한국의 도서관인'으로 재평가해야 할 이유다. 식민지를 벗어나자마자 분단과 전쟁을 겪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그는 자주 열변을 토하곤 했다. 1961년 10월 4일 퇴임 강연에서 길영희는 마지막 사자후를 터뜨렸다. 

"Be ambitious!(포부를 가져라)"

교육과 도서관에 대해 길영희는 광인(狂人) 같은 '열정'을 보였다. 그의 열정이 제물포고 도서관의 '신화'를 만들고, 한국 도서관에 '역사'로 남았다.
#길영희 #제물포고등학교 #인천중학교 #학교도서관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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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해서 책사냥꾼으로 지내다가, 종이책 출판사부터 전자책 회사까지 책동네를 기웃거리며 살았습니다. 책방과 도서관 여행을 좋아합니다. <도서관 그 사소한 역사>에 이어 <세상과 도서관이 잊은 사람들>을 쓰고 있습니다. bookhunter7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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