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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들, 목숨 걸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인터뷰]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시회 연 윤석남 화백

등록 2021.02.28 20:32수정 2021.02.2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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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리는 윤석남 화백 ⓒ 이희훈

 
"아마 다락방에서 숨어지내지 않았을까요?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나 심적으로 강한 사람들이 아니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자신이 없어요. 어쩌면 그래서 더 목숨 걸고 싸웠던 이분들이 마음에 새겨진 것 같기도 하고요." 

1939년 만주 봉천(현재 중국 심양)에서 태어난 여든셋의 노화백 윤석남씨가 "일제강점기 때로 돌아가면 '싸우는 여성들'처럼 독립운동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받고 한 답이다. 

삼일절 102주년을 앞두고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에서는 '싸우는 여성들, 역사가 되다'라는 제목으로 윤석남 화백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시관에는 윤 화백 스스로 풀을 먹여 빳빳해진 가로 94cm, 세로 210cm 대형 한지 위에 강주룡, 권기옥, 김마리아, 김명시, 김알렉산드라, 김옥련, 남자현, 박자혜, 박진홍, 박차정, 안경신, 이화림, 정정화, 정칠성 등 독립운동가 14인의 초상이 걸렸다. 14인 모두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목숨을 걸고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을 위해 싸웠던 여성들이다.

윤석남 화백은 "작품이 좋건 나쁘건 시민들이 다시 한번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면서 "코로나19 때문에 지난해 9월에서 연기됐던 전시가 삼일절을 앞두고 열려 시기상 딱 들어맞게 됐다.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다"라고 밝혔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5일 오후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서 검은 정장에 붉은 목도리를 두른 윤석남 화백을 인터뷰했다. 윤 화백의 작품에는 유독 붉은색이 많이 포함됐는데, 이에 대해 그는 "붉은색은 순수한 피를 의미한다"면서 "목숨을 내걸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설명했다.

윤석남 화백은 1967년 성균관대 영문과를 수료한 뒤 전업주부로 생활하다 나이 마흔이 돼 '그림을 그려야겠다'라는 마음을 먹고 실천에 옮겼다. 1983년 뉴욕으로 건너가 그림 공부를 했다. 이후 자연과 여성 등을 주제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1996년 우리나라 여성미술가 중 최초로 이중섭미술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엔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2019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독립운동은 남녀 다르지 않아... 자신을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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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리는 윤석남 화백 ⓒ 이희훈

 
사실 윤 화백을 만나러 학고재 갤러리에 갔을 때는 '여성'과 '독립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가 얼마나 주목받을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우였다. 인터뷰를 위해 전시관에 머물렀던 25일은 목요일 오후임에도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실제로 이날 전시관에서 만난 시민들은 하나같이 "작품이 매우 인상 깊다"면서 호평을 숨기지 않았다. 친구와 함께 전시관을 찾은 대학생 정민영(23)씨 역시 "윈색적이지만 현대적인 그림이 시선을 뺏는다"면서도 "그녀들의 사연은 보고 있으면 윤석남 작가가 왜 이토록 강렬하게 눈빛을 그렸는지 알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윤 화백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윤 화백은 독립운동가들의 눈빛과 손 등을 강렬하게 표현한 이유에 대해 "눈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결단력과 대담함 등 기운을 표현하고 싶었다"면서 "손은 뇌와 마찬가지로 내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표현하는 일을 하는 부분이자 살아온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부분이다. 억셀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윤 화백은 "그 시절은 여성에 대한 대우가 지금과 비교하면 얼마나 천했느냐"면서 "그럼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나라를 위해 남녀를 따지지 않고 목숨을 바쳤다. 처음에는 이 지점이 모순이라 생각했는데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그림을 그릴수록 이것 역시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을 찾아가는, 자존감을 찾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서훈을 받은 여성 독립운동가의 숫자는 공적을 인정받은 전체 독립유공자 중 3%에도 미치지 못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01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여성들은 가부장제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이중삼중의 차별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면서 "광복을 위한 모든 노력에 반드시 정당한 평가와 합당한 예우를 받게 하겠다"라고 밝혔지만 2020년 12월 기준 전체 1만 6000여 명의 독립유공자 중 여성은 450여 명에 불과하다. 

"지금이라도 서훈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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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리는 윤석남 화백과 그녀의 작품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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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리는 윤석남 화백과 그의 작품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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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리는 윤석남 화백과 그의 작품 ⓒ 이희훈

 
이로 인해 윤 화백이 그린 14인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김명시, 이화림, 정칠성 등 인물들은 명확한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에 몸담았다'는 등의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윤 화백이 "중국에 남았든 이북(북한)으로 넘어갔든 지금이라도 서훈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면서 "그림들을 통해 그런 부분(서훈)을 강력하게 제시하고 싶었다. 가슴으로라도 우선 인정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말한 이유다.

대표적인 이가 윤 화백의 작품에서 하얀 중국옷을 입고 나무 봉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앉아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이화림 지사다.

1905년 평양 출생인 이화림 지사는 1930년대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에서 활약했다. 1931년 이봉창 의사가 일왕에게 폭탄을 던졌을 당시 바지 안쪽에 폭탄을 숨길 수 있도록 고쟁이를 만들어줬다. 이듬해인 1932년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졌을 때 사전답사를 함께하고 거사를 도왔다.

이후 약산 김원봉이 만든 조선의용대에 참여해 중국 전역을 돌며 항일투쟁의 최전선에서 독립투사들을 치료하는 일을 맡았다. 해방 후 중국에 남아 의학 공부를 계속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참전해 의무병으로 활동한 행적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다.

조선의용군 출신 김명시 장군 역시 마찬가지다. 윤 화백의 작품에서 매서운 눈초리로 말을 탄 모습으로 표현된 김명시 장군은 일제강점기 당시 고려공산청년회 유학생에 뽑혀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조봉암 등과 함께 중국공산당 상하이 한인특별지부 조직 임무를 수행했다. 1930년 5월엔 하얼빈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징역 7년을 살았다.

출옥 후엔 항일무장투쟁의 최전선인 조선의용군에서 무정 장군 등과 함께 활동하며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해방 뒤 사회주의 활동을 이어가다 이승만 정권 수립 뒤인 1949년 10월 부평 유치장에서 목을 맨 시신으로 발견됐다. 보훈처는 '사망 경위 등 광복 후 행적 불분명'을 이유로 김명시 장군에 대한 서훈을 미뤄오고 있다.

"가장 애착 가는 인물은 정정화 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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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리는 윤석남 화백이 그림에 대해 설명했다. ⓒ 이희훈

 
윤 화백은 자신이 그린 14인 중 특별히 애착 가는 인물로 정정화 지사를 꼽았다. 윤 화백 작품 속에서 파란색 중국 옷차림으로 기차역 대합실에 앉아 있는 모습의 정정화 지사는 쪽 진 머리를 한 채 담담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윤 화백은 "제일 처음 그린 인물이 정정화 선생이었다"면서 "총을 들고 전선에 나가 싸운 것은 아니었지만 독립운동을 하러 중국으로 떠난 시아버지(김가진)와 남편(김의한)을 상하이까지 홀로 찾아갔다. 이후엔 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위해 밀사로 수차례 국경을 넘었다. 얼마나 애쓰다 돌아가신 분이었냐.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울림을 줬지만 특히 정정화 선생님은 더 큰 울림을 줬다"라고 평가했다.

"정정화 선생님의 얼굴은 사진을 참조해 그렸어요. 나머지는 상상을 해서 그렸습니다. 상하이 기차역에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으로 가야 하는데 마침 옆에 수더분한 조선 여성이 앉아서 졸고 있는 거죠. 너무 긴장되는 순간인데, 졸고 있는 조선 여성을 만남으로써 훨씬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어요."

정정화 지사는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피난길에 함께 올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임정의 살림을 책임진 인물이다. 그러나 해방 후 고향에 돌아온 뒤론 고난의 연속이었다.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편 김의한은 납북됐다. 자신은 서울에 남았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부역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남편과 생이별한 뒤로는 1991년 눈을 감을 때까지 재회하지 못했다.

윤 화백은 인터뷰 말미에 조심스럽게 100인의 여성독립운동가를 그릴 때까지 "'할 수 있을까'라는 불안감도 있지만 몸이 허락할 때까지 힘을 내 볼 것"이라면서 "지금 여든셋이니 앞으로 7년은 더, 최소 구십까지는 그림을 그리겠다"라고 의지를 밝혔다. 

"작품 하나를 마치기까지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려요. 인물에 대한 공부도 공부지만 온전히 표현하기 위해서 고민하고 고민해야 할 부분이 많아요. 특히 세밀한 문양이 들어가면 이를 표현하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죠."

실제로 윤 화백은 지사들의 얼굴을 드로잉한 뒤, 원본 크기의 초본을 만들어 한지에 옮기고 채색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한다. 2m가 넘는 초상화 옆에 각 지사들의 얼굴 드로잉과 소형 초상이 나란히 걸린 이유다. 윤 화백이 한 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를 그리기까지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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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화백과 자신이 그린 여성독립운동가들의 초상과 함께 나란히 섰다. ⓒ 이희훈

 
윤 화백의 '싸우는 여자들, 역사가 되다' 전시는 오는 4월 3일까지 서울 삼청동 학고재 갤러리 본관에서 이어진다. 학고재 갤거리 관계자는 "오는 3월 1일은 월요일이라 원래라면 정기휴관일이지만 이번에는 삼일절을 맞아 특별개관을 한다"면서 "윤석남 화백이 복원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많은 분들이 봐주기를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윤 화백의 이번 전시는 따로 관람료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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