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눈을 파고 걸어간 길, 확길

말을 만드는 사람은 누구인가

등록 2021.03.02 11:31수정 2021.03.02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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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새벽 강원도 동해시 한 아파트 주차장 모습 ⓒ 이무완

 
겨울이 다 가도록 눈 내리지 않더니 3월 시작하는 날 눈이 내렸다. 매화가 핀 지 오래고 얼음새꽃이 피고 산수유 꽃봉오리가 노랗게 부풀어 오늘내일 터질 땐데 눈이 왔다.

2일 오전 4시까지 내린 눈으로만 치면 미시령 72cm, 진부령 65cm, 속초 설악동 53cm, 양구 해안면 40cm, 고성 현내 39cm, 북강릉 36cm가 내렸단다. 그야말로 잣눈이요 길눈이다. 2일 오전 강원도교육청은 66교는 휴업, 26교는 등교 시각을 조정한다고 안내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폭설'이라고 난리다. 사흘 연휴로 동해안으로 봄나들이 나섰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쏟아진 무더기눈에 고속도로에서 발이 묶였다고 소식을 전한다. 사실 봄 문턱에 내리는 갑작눈이 어디 처음이랴.

지난 2014년에는 9일 동안 1m 넘게 내렸다. 당시 기상청은 1911년 기상 관측을 시작한 이래로 가장 오래도록 가장 많은 눈이 내렸다고 발표했다. 방송에서는 헬리콥터를 띄워 길이 끊긴 산골 마을을 보여주었다. 드문드문 집들이 보이고 생눈길에 사람 걸어간 흔적이 보인다.

이렇게 걸어간 흔적을 뭐라고 하나. 강원도 말로는 '확길'이라고 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을 처음 걸어간 흔적이 마치 확 모양으로 났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디딜방아 ⓒ 이무완


확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확은 방앗공이가 쿵쿵 떨어지는 돌절구 모양으로 우묵하게 판 돌이다. 디딜방아는 발로 디뎌 곡식을 찧거나 빻는 방아다. '발방아'라고도 한다. 확은 '호박'이라고도 한다. 굵은 방아채 끝에 공이를 달고 다른 쪽에 다리(디딤판)가 있다. 공이를 빼고 보면 로마자 Y를 꼭 닮았다. 방아채 끝에 달린 공이가 내리찧는 우묵한 데가 '확'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눈길을 갈 때, 처음 가는 사람은 삐뚝빼뚝 걸어갈 수밖에 없지만, 그 뒤를 가는 사람은 한결 수월하다. 앞사람이 밟은 자리만 따라가면 되는 까닭이다. 이렇게 한 사람 가고 또 한 사람 지나간 길에 흔적은 어떻게 남을까.

영락없는 디딜방아 '확' 모양으로 길이 난다. '확길'은 생눈을 파고 걸어본 사람들이 몸으로 만들어낸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사전에서 찾으면 없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뿐만 아니라 '우리말샘'에서도 찾을 수 없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확길'을 찾아본 결과 ⓒ 국립국어원

 
서산대사가 쓴 '답설야중거'란 한시가 생각난다. 백범 선생은 이 시를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단다. 우리 지역말로 재미 삼아 바꾸어 적어본다.     
 
畓雪野中去(답설야중거) 생눈 길을 가고 그랠 직에는 
不守頀亂行(불수호난행) 어지릅게 가지 마와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간 확길이
隨作後人定(수작후인정) 낸중 오는 사람인테는 이정표가 된다와     
 
누구라도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말씀이다. 


말난 김에 '폭설, 기습폭설' 같은 말도 생각해 본다. 폭설은 사납게 내리는 눈이다. 기습폭설은 갑작스럽게 내리는 많은 눈이다. '눈'보다 '말'이 한결 더 무섭고 사납다. '기습' 같은 말은 전쟁터에서나 쓸 말이다. 같은 뜻으로 하는 말이라면 '무더기눈'이나 '갑작눈' 같은 부드러운 말로 바꿔 써보면 어떨까.      

※ 잣눈, 길눈, 생눈: 둘 다 많이 내린 눈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국눈은 겨우 발자국이 날 정도로 살풋 내린 눈을 말한다면 한 자나 한 길이 될 만큼 많이 내린 눈은 잣눈, 길눈이라고 한다. 생눈은 내린 눈이 아무도 밟지 않고 그대로 쌓인 눈을 말한다. 달리 숫눈이라고도 한다. 
#확길 #강원도말 #동해삼척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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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글쓰기 교육, 어린이문학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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