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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의 조선사회 일원으로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6회] 허균이 스무 살 때에 겪은 정여립 사건은 그에게 심정적으로 많은 충격을 주었다

등록 2021.03.07 17:01수정 2021.03.07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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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의 죽도. 정여립의 꿈이 서렸던 곳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여기서 끝나게 된다. ⓒ 김태성

 
허균이 태어나서 2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는 태평성대는 아니지만 안정된 테두리 안에서 굴러가고 있었다. 학문적으로 크게 빛나는 일도 있었다. 이이와 성혼(成渾) 사이에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전개되고, 안동에 도산서원이 세워지면서 이황을 제사지냈다. 정철(鄭澈)이 「관동별곡」에 이어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지었다. 

이런 중에 내외적으로 재앙의 짙은 그림자가 싹트거나 밀려드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정여립 '모반사건'과 집권세력 동인이 남인ㆍ북인으로 갈려 본격적인 당파싸움이 시작되었다. 정여립은 1570년 문과에 급제한 뒤 이이의 총애를 받았으나 이후 당시의 집권 세력이던 동인 쪽으로 전향했다. 선조의 눈 밖에 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 전주로 돌아갔다. 

고향에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신분에 관계없이 사람들을 모아 정기적으로 활쏘기 대회를 했다. 여기에는 전라도뿐 아니라 황해도 사람들까지 참가했다. 1587년에는 대동계를 동원하여 그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이 반역 조직이라는 고발에 따라 관련자들이 잡히고 정여립은 피신했다가 자살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 계열의 1000여 명이 처벌을 받았으며, 전라도도 반역의 땅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다. 

한편 이 모반사건(謀反事件)이 조작이라는 주장도 있다. 곧 정여립이 정말로 반역을 시도했다면, 집에 각종 문서를 남겨 놓고 자신의 별장으로 도망가 쉽게 잡히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대동계는 '전쟁에 대비하여 무예를 닦는 모임'이었으며, 정여립은 관리들에게 살해된 뒤 자살로 위장 보고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여립이 평소 "천하가 공물(公物)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으리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성현의 통론(通論)은 아니다.……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는 등의 과격한 주장을 한 점,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도참신앙을 퍼뜨렸다는 점, 선조를 비판하고 조선의 운수가 다했음을 주장하는 문서가 나왔다는 점에서 반역 기도가 사실이라는 주장도 있다. (주석 1)

  

전라북도 진안군 죽도마을 서인(西人)의 젊은 인재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이 갑자기 집권 세력인 동인(東人)을 자처하자 선조가 이를 비판한다. 정여립은 벼슬을 버리고 전라도 죽도로 내려와 군사 조직 성격의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뒤 이를 점차 전국 규모로 키워간다. 정여립은 "목자(木子, 李이씨)가 망하고 전읍(奠邑, 鄭정씨)가 일어난다."거나 "천하는 공공의 물건(天下公物, 임금 개인 것이 아니라는 뜻)"이라는 말을 일삼은 혁신적 사상가였다. 1589년 10월 정여립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는 고발이 선조에게 들어가고, 그를 따르던 세력의 일부가 체포된다. 정여립은 죽도에서 자살한다. 선조는 서인 정철에게 사건 처리의 책임을 맡긴다. 그 이후 3년에 걸쳐 정철은 선조의 지원을 받아 동인 세력 1천여 명을 죽인다. 임진왜란 발발 직전까지 선조와 조정은 이 일에 매달렸다. ⓒ 정만진

 
정여립사건으로 큰 변을 당한 동인은 정철이 실각하자 그의 처벌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는 등 조정의 크고 작은 문제가 정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허균이 스무 살 때에 겪은 정여립 사건은 그에게 심정적으로 많은 충격을 주었다. 

대외적으로는 1575년(선조 8) 3월 대마도주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자 많은 배를 만들고 있다고 알려왔다. 그런 와중에 일본은 통신사를 보내달라는 등 이중의 연막전을 폈다. 

세종대왕이 등극하던 1419년 6월 이종무를 시켜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쓰시마)를 정벌한 이래 이곳 대마도주는 해마다 조선에 공물을 바치고 식량을 얻어갔다. 사실상 조선의 속방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열도를 장악하면서 조선에 침략야욕을 준비하자 대마도주가 이를 조선에 알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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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쓰시마 조선통신사 황윤길 현창비 ⓒ 김수종

 
선조는 1590년 3월 황윤길과 김성일 그리고 허균의 이복형 허성을 대표로 하는 통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일본의 정황을 살피라는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었다. 1년 만에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생각이 있다고 보고하자 부사 김성일은 그와 반대 의견을 제시하였다.

황윤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빛이 번쩍거리니 담대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하고, 김성일은 "그 눈이 쥐와 같아 족히 두려울 것이 없다"고 평가절하했다. 이때 허성은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기록이다. 

또한 동인ㆍ서인의 당파의 의론과 더불어 각기 그 당파의 무리를 옹호했으나, 허성이 홀로 왜적은 반드시 우리나라를 침략한다고 하여 그 친구가 그 까닭을 물으니, 허성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저 일본 지역에 이르니 곳곳마다 성지(城池)요, 다만 피폐하고 잔약한 군졸만 있었는데, 이는 성을 평정한 때문임을 깨달았다"고 했다. 당시에 허성은 당파를 두둔하고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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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의 서산선사라는 사찰에 있는 김성일의 탑. 위의 것에는 학봉이란 호를 따서 ‘학봉탑’이라고 새겨져 있고, 아래 것에는 ‘김성일 공양탑’이라고 새겨져 있다. ⓒ 김종성

 
허성은 그 중용을 잡았으나 조금 황윤길의 말을 도왔다. 임금이 이르기를 "세 사람의 견해가 이와 같이 같지 않음은 무엇이냐?"고 하자, 유성룡이 말하기를 "설령 수길이 순리를 침범했으나 그 행동거지를 듣건대 족히 두려울 것이 없는 듯하고, 더구나 그 세계는 요컨대 위험한 말로 두렵게 함에 지나지 않으니, 만일 그 사실을 얻지 못하고 갑자기 명나라에 아뢴다면 변방에 소란만 일으킬 테니 이미 대단히 미안하고, 그리고 복건(福建)은 일본과 멀지 않으니, 만일 이 아룀이 일본 사람의 귀에까지 떨어진다면 그들과 의심의 틈새를 이룸이 없이 보전키 어려우니, 결단코 상주함이 옳지 않습니다."했다. (주석 2)

선조는 김성일의 보고만 믿고 무대책으로 안주하고 있었다. 


주석
1> 하일식,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153쪽, 일빛, 1998.
2> 정약용 저, 정해렴 역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24쪽, 현대실학사, 2001.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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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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